<100화>
‘리시안셔스도 알지 못하는 저 여자의 비밀을 나만 알고 있다는 거지?’
디에고는 그 사실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디에고는 리시안셔스처럼 첫 번째로 태어난 드래곤도 아니었으며, 이미 수많은 드래곤들이 생겨난 다음에 태어난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아주 작고 볼품없는 채로.
어떤 인간들은 자신이 드래곤인 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다른 동족들은 자신을 드래곤의 수치라며 죽이려 들거나, 조롱하며 폭력을 일삼고는 했다.
디에고가 리시안셔스를 처음 만난 건 다른 드래곤들에게 휩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리시안셔스는 겁에 질린 작은 드래곤을 보고 그 자리에서 다른 드래곤들을 쫓아내고 지켜 주었다. 그때의 일은 디에고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구해 주고 친구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런 동시에 다른 드래곤들처럼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니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 여자에게 자신을 보낸 것이겠지.
자신이 이 여자를 감히 해칠 능력이 없을 거라는, 그럴 생각도 못 할 거라는, 그리고 자신이 이 여자와 그 자신 이상으로 가까워질 리 없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이 여자를 보던 리시안셔스의 눈은 단순히 예뻐하는 것 정도가 아니었어.’
디에고는 바보가 아니었다. 비록 동족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눈에도 띄지 않고 숨고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던 삶이었으나, 누군가의 ‘특별한 감정’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시안셔스가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내는데,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리시안셔스가 인간 여자를 사랑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너희가 우러러보는 리시안셔스가 한낱 인간 여자에게 홀랑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리시안셔스를 상처 주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리시안셔스도 알지 못하는 이 여자의 모습을 안다고 하면, 그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실 이 여자도 내가 만만하니까 숨길 생각도 못 하는 거겠지만.’
첫 번째로 만들어진 인간치고는 볼품없는 인간은, 드래곤으로 태어났으나 볼품없는 자신에게 동지애가 느껴진 모양이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지만 이 인간 여자는 자신을 구한 리시안셔스가 아끼는 존재고, 자신은 그녀에게 몸을 의탁했으니 함부로 공격성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디에고..”
디에고는 제법 친근하게 자신을 부르는 세레티의 목소리에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짠..”
『…….』
그러나 콧잔등에 부딪히는 부드럽고 지독한 향이 나는 꽃잎에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꽃이야..”
『그래서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냥…… 꽃은 향기롭고 예쁘니까. 디에고한테도 보여 주고 싶었어..”
『앞이 보이지 않는 주제에 꽃이 예쁜 건 어떻게 알아?』
“그냥 만지면 알 수 있지..”
대놓고 상처받으라고 한 말인데도 세레티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대꾸했다.
똑같이 불완전한 존재가 하는 말이라서 별로 타격이 없다, 이건가?
인간 중에서도 앞도 보이지 않는 인간에게 무시당하고 있다 생각하자 저절로 이가 갈렸으나, 리시안셔스 때문에 스위트피를 물지는 못했다.
“디에고, 난 일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일? 네까짓 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함께 가 보면 알아..”
거기다가 건방지게도 이 인간 여자는 디에고에게 정말 친한 친구처럼 반말을 하며, 스스럼없이 덥석 안아 들고는 했다.
분했으나 그 분함을 드러낼 수 없어서 더욱 화가 났다.
『이거 놔, 이 하찮은 인간아!』
앞이 보이지 않아 벽을 더듬거리면서 걷는 세레티에게 디에고의 반항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조차 그를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스위트피에게 납치당하다시피 한 디에고가 끌려간 곳은 바로 신전의 서재였다. 거기에는 수많은 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걸로 무슨 일을 한다는 거야?』
“꽃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낼 거야.”
『이야기?』
“내가 꽃을 만지고 향기를 맡으면서 느낀 걸로 꽃말을 짓고, 그에 관한 이야기도 써서 이 책에 정리를 하면, 에리카와 사제들이 이 꽃을 들고 사람들에게 내려가서 내가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거든.”
『그런 쓸데없는 일은 왜 하는 거지?』
“꽃은 아름답고 향기로워서,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내가 만든 꽃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무척이나 행복해한대.”
『네가 지은 이야기니까, 네가 직접 가서 들려주면 되잖아. 왜 너는 뒤에서 가장 고생해 놓고 쏙 빠져 있어?』
세레티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기만 했지만 그 미소가 이미 답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리석기는.
네가 그렇게 사람들의 기쁨을 생각해 봤자, 사람들은 네가 진짜 세레티라는 것도 몰라. 네 존재를 알지도 못해. 알기나 해?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굳이 하찮은 인간에게 해 주는 충고도 아까웠던 디에고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렇게 많은 꽃은 어디서 얻어?』
“에리카와 사제들이 밖에서 새로운 꽃을 발견하면 가져오곤 해.”
『저번에 그들이 가지고 온 꽃의 종류보다 훨씬 더 많은데?』
“아, 그건…….”
세레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더 말을 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비밀을 만드는 게 같잖고 황당했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자신이 마치 세레티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일 거 같아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얄밉고 하찮고 볼품없는 인간은 그런 디에고의 마음도 모르고 여전히 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꽃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 가기 시작했다.
* * *
모두가 잠든 시각.
세레티는 조심스럽게 침대 밑 쿠션 위에 잠들어 있는 디에고에게 손을 뻗었다.
다른 드래곤들과 다르게 나약하게 태어난 디에고는 밤이 되면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고, 한번 잠들면 해가 뜰 때까지 일어나지를 못했다. 고른 숨소리와 함께 오르내리는 몸을 확인한 세레티가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불을 켤 수도 없으나, 어차피 앞이 보이지 않아 온통 새까만 세레티의 세상에서 해가 저문 밤이라는 건 활동하는 데에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세레티는 익숙하게 벽을 더듬었다. 사실 그건 더듬는다기보다는 익숙해진 구조의 벽을 쓸면서 걷는 것에 가까웠다.
이윽고 세레티는 신전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언제나처럼 세레티를 맞이했다. 하지만 오늘은 리시안셔스를 만나기 위해 신전 밖을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세레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누군가가 세레티의 어깨 위에 망토를 걸쳐 줬다.
“신의 숲에 가려고?”
“응.”
“슬슬 이때쯤이면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에리카가 부드럽게 세레티의 팔을 부축했다.
“위험하니까 바래다줄게.”
“항상 고마워.”
“당연한 일인데 뭐가 고마워.”
세레티는 에리카에게 의지한 채 위험하고 경사진 계단을 내려갔다.
위험한 계단이지만 그래도 올라오는 건 혼자서 가능했다. 하지만 내려가는 일이 더욱 위험한지라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내려가면 시간이 더욱 오래 걸리고는 했다. 그래서 신의 숲에 갈 때가 되면 이렇게 에리카가 알아서 세레티를 바래다주러 나오고는 했다.
세레티가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에리카에게 의지한 채 중턱까지 내려왔을 때, 신은 세레티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문을 열어 줬다.
이음새 하나 없이 하나로 뭉쳐져 있던 절벽과 계단이 갈라지고, 높이 솟아 있던 절벽 안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여기서부터는 세레티 혼자 가야만 했다. 세레티 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금지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에리카도 세레티를 따라 들어가려다가 튕겨져 나와 하마터면 계단 아래로 구를 뻔한 적도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에리카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레티는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문이 닫히며 세레티는 정말 완전한 어둠 속에 남겨졌다. 그러나 세레티는 두려움도 없이 저 멀리 있는 빛을 향해 나아갔다.
* * *
“…….”
스위트피는 익숙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왜 하필…….”
바닥에 있는 카페트를 쥐어뜯으며 스위트피가 울분에 차서 외쳤다.
“왜 하필 지금 깨어난 거야! 대체 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보게 될 거 같았는데. 왜 하필 깨어나도 딱 그 직전에 깨어난단 말인가!
스위트피는 분에 차서 바닥을 마구 내리쳤다. 항상 중요한 장면 직전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자신이 꾸는 과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꾸다 만 꿈이 너무 속상하고 아쉽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지금 억지로 잔다고 해서 과거를 다시 꿈으로 꿀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전쟁을 끝낼 단서를 찾는 게 뒤로 늦춰질수록 동맹을 맺은 자들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불안한 날들이 지속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무슨 단서라도 찾아야 할 텐데…….
‘내가 직접 세레티가 되어 보면 어떨까..’
세레티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면…….
그럼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