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99화 (99/120)

<99화>

“그러나 걱정 말고 편히 자렴..”

“……..”

“너의 밤은 내가 지킬 테니..”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리시안셔스를 오늘도 스위트피를 지켜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엄청 대단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니고, 이제껏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지켜 주지 않은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어찌 보면 이제는 당연해진 말을 듣는 건데도,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알았어요. 그럼 리시안을 믿고 오늘은 편하게 잘게요..”

침실 중앙에 있는 침대를 확인한 스위트피는 편하게 눕기 위해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바로 침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 될 텐데…….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벽을 짚으며 방을 빙 돌아 침대로 향했다.

그것도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한 행동이었다.

“스위트피..”

“네?.”

“왜 그러고 걷지?.”

스위트피가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다정하던 아까와 다르게 싸늘한 식은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멀쩡히 침대로 걸어가면 될 것을, 굳이 벽을 짚어서 멀리 돌아가는 이상한 행동을 한 이유를 묻고 있는 거야..”

“아……..”

딱히 해명할 길이 없었다.

세레티의 꿈을 꿔서 자꾸 자신도 모르게 그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왜 세레티의 입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듯이 꿈을 꾸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이 그녀와 닮았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하필이면 얼굴이 꼭 닮은 자신이 세레티의 입장에서 과거를 떠올린다는 말을 하면, 리시안셔스는…….

‘절대 기뻐하지 않을 거야.’

혼란스러워하고, 어쩌면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고, 힘들어할 텐데.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오늘 하루 동안 넌, 종종 그런 식으로 걷더군..”

“보기 불편했다면 미, 미안……..”

“네가 불편한 건 다리지, 눈이 아닐 텐데도..”

그러나 상황은 스위트피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지금까지 리시안셔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위트피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다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불편한 다리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줄 알았다.

‘괜찮아. 누구나 화나면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어.’

상대가 자신에게 심한 말로 화를 냈다고 해서 그 말이 꼭 진심일거라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지만…….

“……..”

눈가가 뜨거워졌다.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 스위트피가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그러나 싸늘해진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다시 부드럽게 풀리는 일은 없었다.

“리, 리시……!.”

스위트피가 절뚝거리며 리시안셔스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이미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나간 뒤였다.

‘가서 사과해야 해.’

내가 리시안셔스의 옛 연인을 떠올리는 행동을 한 거니까. 기분 나쁘고 불쾌할 만했어.

스위트피는 왼쪽 무릎이 더욱 아파 오는 듯했으나 아랑곳 않고 그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는 순간, 눈물이 다시 차오른 것도 아닌데 눈앞이 뿌예졌다.

“아……..”

극심한 어지러움과 함께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지금은 안 되는데…….’

과거의 기억이 또 스위트피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세레티의 과거를 보여 주겠다며.

* * *

“내 친구야..”

세레티는 리시안셔스가 친구라고 소개한 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자는 목소리를 내어 세레티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자인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디에고. 목소리를 내서 널 소개해 줘야지..”

『……내 이름은 디에고다, 하찮은 인간.』

“흐음- 굳이 하찮은 인간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리시안셔스의 금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레티의 눈에 빛처럼 형태가 보였으나, 디에고는 눈조차 보이지 않으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모든 드래곤이 리시안셔스처럼 인간에게 자애로울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더욱 예를 갖춰야 했다.

세레티는 허겁지겁 글씨를 썼다.

‘저는 미천한 사제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드래곤 님.’

『네 이름은 왜 빼먹어?』

디에고가 이름을 묻자 세레티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런 세레티를 구해 준 건 리시안셔스였다.

“디에고. 이름을 알려 달라고 강요하지 마. 내가 듣지 못한 걸 네가 첫 번째로 알게 할 수는 없어..”

“쳇..”

“참, 세레티..”

저벅, 저벅. 가까이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예민한 청각을 자극했다.

“내 부탁 들어주겠다고 했었지?.”

세레티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윽고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 친구를 신전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줘..”

“허억……!.”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세레티가 고개를 도리질 치고는 서둘러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제가 어떻게 드래곤 님을 함부로 신전에 모시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거기다가 너무 누추해서 드래곤 님을 모시기엔 턱없이 부족할 거예요.’

“으음……. 사실 디에고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어..”

최선을 다해서 거절했건만, 아무래도 리시안셔스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디에고, 이리 와 봐..”

‘디에고’라는 드래곤은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 건지.

온갖 툴툴대는 말을 내뱉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 안 가 세레티는 리시안셔스에 의해 손이 덥석, 붙잡혔다.

“자, 나를 믿고 손에 힘을 풀어 봐..”

세레티는 그의 말대로 최대한 손에 힘을 풀고, 리시안셔스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손에 비늘이 만져졌다.

‘드래곤……?’

하지만 드래곤의 비늘치고는 부드러웠다. 이윽고 세레티는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것의 형태를 눈치챘다.

품 안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작은 드래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자신이 만지고 있는 건 품에 쏙 들어오는 아주 작은 크기의 드래곤이었다.

“디에고, 잠깐 자리를 비켜 주겠어?.”

『제기랄!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알려주려고 그러지?』

“우리가 부탁하는 거니까 자세한 사정을 말해 줘야지..”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저 인간도 날 비웃을 거야. 인간 주제에 날 조롱할 거라고!』

“세레……. 아니, 이 아이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잠시만 자리를 비켜 줘..”

『당연히 그렇겠지. 말도 못 하고 앞도 못 보는 인간 주제에…….』

“디에고..”

『……알았어.』

리시안셔스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지자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디에고가 이윽고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자리를 비켜 준 것 같았다.

“미안해. 기분 상했지?.”

세레티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디에고가 한 말 중 틀린 말은 없을뿐더러, 신전의 사제들이 자신의 뒤에서 늘 하던 말이라 익숙했다.

“눈치챘겠지만, 디에고는 일반 드래곤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어..”

세레티는 글씨를 써서 되물었다.

‘작게 태어난 것 말인가요?’

“그래. 디에고는 너도 한 품에 안아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아. 그리고 인간화를 하지 못하며 불도 내뿜지 못하지..”

‘하늘을 날 수는 있나요?’

“날 수는 있지만 장기간 비행은 못 해..”

형태는 드래곤이지만, 다른 드래곤들과는 너무 달랐다.

마치 비슷한 생김새의 다른 종족이라 해도 될 정도로.

“그래서 동족들에게 멸시받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기도 하지..”

“……..”

“디에고에게는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해..”

다른 드래곤들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곳은 이 땅 위에 단 한 곳밖에 없다. 바로 세레티가 머물고 있는 신전이었다. 신전을 공격했다가는 신의 엄벌을 받을 텐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굳이 디에고를 공격하려는 자는 없을 것이다.

리시안셔스도 그걸 알기 때문에 세레티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디에고를 신전에서 보살펴 달라고.

다행히 디에고는 다른 이들의 눈으로부터 숨기기 좋은 아담한 크기였다.

‘거기다가 리시안셔스가 내게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잖아.’

자신에게 무엇이든 해 주려고 하는 리시안셔스에게 자신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세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고를 받아 줄 거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자 리시안셔스가 기분 좋게 웃는 소리를 내며 세레티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날이 세레티와 디에고의 첫 만남이자, 인연이 시작된 첫 순간이었다.

세레티는 디에고를 품에 안아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사제들이 디에고를 발견하지 못하게 가방을 메고 다녔다.

디에고는 가방 안에 숨어 지내야 하는 것을 답답해했으나, 어차피 오후에서 저녁 사이에 다른 사제들이 나가면 세레티와 둘이서만 남기 때문에 하루 종일 가방 안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디에고는 리시안셔스도 알지 못하는 세레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사실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그리고 첫 번째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특별하다 불리는 세레티가 신전에서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무시당하며, 자존감은 얼마나 바닥을 기는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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