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숨은 대체 왜 참는 거지..”
“후, 하아-.”
옆에서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를 들은 스위트피는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급하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지, 집중하느라 숨을 참은 거예요!.”
“인간은 집중할 때 숨을 참는 버릇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구나..”
“……그래요. 모든 인간은 집중할 때 숨을 참는다고 쳐요..”
“집중하는 것과 숨을 쉬는 걸 한 번에 같이 할 수 없다니. 인간이란 참……..”
아무래도 리시안셔스의 머릿속에는 자신 때문에 인간은 생각보다 더 어리석은 존재라고 자리 잡힌 것 같았으나 해명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까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해 보였는데, 이걸 다른 인간들은 안 그러는데 자신만 이상한 행동을 한 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나무도 신전과 마찬가지로 멀쩡하잖아요. 뭔가 있을 거 같아서 건드려 본 거예요..”
나무는 신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아마 이 암흑의 땅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나무는……..”
높이 솟아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는 리시안셔스의 눈은 마치 먼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암흑의 땅에 온 뒤로 묘하게 리시안셔스의 기분이 가라앉은 거 같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듯했다.
“일단 신전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옷깃을 흔들며 밝게 말을 걸자,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신전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외관보다 더욱 화려한 내부가 스위트피의 눈을 사로잡았다.
새까맣고 죽어 있었던 풍경과는 다른 상반된 모습이라 더욱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럼 이제 노력해서 뭐라도 수상한 걸 찾아 보자구요!.”
스위트피가 힘차게 외치며 절뚝거리는 다리 따위는 상관 않고 신전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그렇게 뛰어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저는 인간이고 리시안은 드래곤이잖아요. 인간은 이만큼 열심히 돌아다녔으면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요……..”
스위트피는 신전의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사실은 거의 드러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꿈속에서 봤던 서재와 침실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공간을 돌아다녀 봤다. 최대한 많은 곳을 뒤져야 뭐라도 하나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
하지만 무언가를 찾기는커녕, 체력마저 바닥난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
“왜 리시안은 하나도 안 도와줘요? 제가 저만 좋자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같이 찾기는커녕, 열심히 돌아다니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리시안셔스가 뒤늦게 얄미워졌다.
“……미안하구나..”
“……..”
“이제부턴 나도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마..”
하지만 막상 그가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리시안셔스가 과거의 추억 때문인지, 암흑의 땅에 오고 나서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인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스위트피는 그를 더 나무랄 수 없었다.
“아니, 뭐……. 리시안이 잘못했다는 건 아닌데……..”
괜한 민망함에 뺨을 긁적거린 스위트피가 자신이 했던 말을 어색하게 수습했다.
“그냥 같이 찾으면 중요한 걸 더 빨리 찾아낼 수도 있잖아요……..”
“네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리시안셔스는 수긍하는 듯 보였으나, 스위트피는 그의 눈치가 보여서 아무 말이나 더 하려고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녀석들도 왔나 보군..”
리시안셔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위트피가 다시 몸을 일으켜 리시안셔스를 지나쳐 신전 밖을 나가자 저 멀리서 두 마리의 새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저것이 새가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새처럼 보이는 거대한 드래곤들이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캄캄한 밤이 되어 다들 수색을 중단하고 돌아오는 중인 듯했다.
‘저들은 뭐라도 찾았을까.’
부디 작은 단서라도 찾아낸 거면 좋겠다. 그럼 아주 약간의 희망은 있을 텐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주제에, 이런 바람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스위트피는 애써 희망을 누른 채 날아오는 두 마리의 드래곤과 두 명의 반려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 *
모든 드래곤들과 반려가 저택 위, 신전에서 모였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자 칼루스가 작은 불을 붙여 작은 모닥불을 만들려고 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리 시도해도 죽은 땅에는 불조차 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전 안은 멀쩡하니, 각자 방을 하나씩 잡아 묵으면 될 거다..”
미리 스위트피와 신전을 살펴봤던 리시안셔스가 그리 말하자 아케르트는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며 툴툴거렸다.
“다들 찾아낸 것은 있나..”
칼루스의 물음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건 스위트피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찾아낸 게 없는 건 모두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아직은 첫날이잖아요. 내일은 꼭 뭘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허무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을 북돋는 건 스위트피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이들은 널찍한 신전 내부에서 각각 오늘 밤 머물 곳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리시안, 우리는 어디서 묵을까요?.”
“글쎄. 난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만..”
“알잖아요. 전 아무 곳에서나 잠들지 못한다는 거..”
그동안 리시안셔스의 금화로 호의호식한 스위트피가 능글맞게 장난쳤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머쓱해진 스위트피가 빠른 걸음으로 리시안셔스보다 앞서 걸었다.
‘사제들의 방이 모여 있던 복도가 여기였나…….’
기억을 되짚은 스위트피가 향한 곳은 꿈속에서 봤던 복도였다. 사실 풍경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왜냐하면 앞이 보이지 않는 세레티와 한 몸이 되어 겪었던 거니까.
하지만, 손으로 벽을 짚으며 걸어가자, 자연스럽게 사제들의 침실이 모여 있는 복도로,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끝에 있던 세레티의 침실을 찾을 수 있었다.
“왜 그러고 걷지?.”
“네? 뭐가요?.”
“꼭, 마치…….”
침실 문을 열기 직전, 자신을 향한 리시안셔스의 목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이내 말문을 닫아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괜히 신경 쓰이게.
리시안셔스에게서 돌아선 스위트피는 몰래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신전은 외관은 물론이고 내부도 전혀 훼손된 흔적이 없었다. 세레티의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문제를 하나 짚어 보자면…….
지나치게 깔끔해서 문제라고 해야 하나.
세레티의 방에는 정말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 말고는 없었다.
침대나 수납장 같은……. 중요한 가구만 채워져 있었다.
방을 구경할 때면, 방 주인의 취미나 성향을 알 수 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아무것도 못 찾았지만 내일은 꼭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스위트피가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리시안셔스를 향해 희망찬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런 스위트피를 응시하는 리시안셔스의 표정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너의 긍정적인 면을 참 예뻐하긴 한다만, 우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
“최악의 경우라면……..”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경우. 그리고 그러한 날들이 오래 지속되어 갈 때 벌어질 일에 대해서지..”
“……..”
“전쟁을 끝낼 단서를 찾지 못하면 다른 생각을 품을 녀석이 생길 수도 있어..”
“동맹을 맺은 드래곤들 중 배신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리시안셔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드래곤들 뿐만이 아니지. 배신은 인간도 충분히 잘하는 행위니까..”
드래곤들이 먼저 배신할 생각을 못 한다 하더라도, 같은 인간인 콜린 핸슨이나 샬롯 그레이엄이 먼저 배신하자고 제 드래곤을 설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제 반려의 생명이 달린 문제에서 드래곤들도 망설임은 없어질 테고.
사실 스위트피도 그 생각을 못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정이 들어서 그들과 서로 피를 흘리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넌 앞으로 나와 꼭 붙어 지내야 해. 만약 너와 나를 떨어트리려는 자가 있다면, 그자를 먼저 의심해야 된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리시안..”
멀리서부터 자신들을 추격하던 적에게 쫓기던 것보다, 적일지도 모를 동료를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위험하고 불안한 일이었다.
“그런데, 리시안..”
“왜 그러지?.”
“그런 말을 들으니까, 오늘 밤은 편하게 못 자겠어요..”
“네가 언제부터 겁이 많았다고..”
“이런 상황을 겁내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그래. 나도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으니, 너라고 다르진 않겠지..”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던 리시안셔스의 눈빛에서 따뜻한 다정함이 서렸다. 커다란 손이 내려와 스위트피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