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또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아니면 갖고 싶은 거라도.”
세레티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의 손바닥 위에 느릿하게 글자를 적었다.
‘리시안셔스는 제게 부탁할 게 없나요?’
“부탁? 내가, 네게?”
그가 되묻는 걸 보니, 자신이 웃긴 질문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신이 첫 번째로 만든 드래곤이었다. 세레티가 신의 첫 번째 딸이라면, 리시안셔스는 신의 첫 번째 아들이었다. 그것도 자신과는 다르게 완전하게 태어난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제까짓 것에게 원하는 게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리시안셔스에게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리시안셔스도 제게 부탁해야 공평하죠. 늘 저만 리시안셔스에게 폐를 끼치잖아요.’
“내가 좋아해서 해 주겠다는데, 네가 내게 무슨 폐를 끼쳤다는 거야?”
‘정말로 제게 바라는 게 없어요? 서로 주고받아야 공평하잖아요.’
할 말이 많아 느릿하게 리시안셔스의 손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번거로웠던 세레티는 식물의 줄기를 이용해 흙바닥에 빠르게 글자를 써 내려갔다.
세레티가 그의 손을 놓자, 리시안셔스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멀어진 세레티의 손을 바라봤으나 강제로 그 손을 다시 붙잡지는 않았다.
솔직히 강제로라도 다시 붙잡고 싶었지만 세레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세레티가 자신의 손을 잡고 싶다면 잡아 주지만 싫다면 존중해야 한다. 제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저 손을 붙들고 있고 싶긴 하지만…….
“너한테 바라는 건 없어.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 공평한 관계가 될 수도 없고.”
그 말에 세레티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맞아, 그렇지.
리시안셔스와 난 절대 공평한 관계가 될 수 없지.
왜냐하면 난 불완전한 인간이고 리시안셔스는…….
“나만 널 좋아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공평한 관계야.”
끝도 없이 밑바닥을 파고들던 생각이 우뚝, 멈췄다.
“네……?”
너무 놀라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세레티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끔찍한 목소리를 리시안셔스가 듣고 말았다. 아, 아니다. 어쩌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짧은 소리니, 운이 좋으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그의 표정이 어떤지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반면, 이미 세레티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리시안셔스는 이번에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세레티가 그러기를 원하니까.
‘근데 괘씸하기는 하네.’
자신은 베일 안에 있는 세레티의 얼굴도, 꾹 다물고 있는 목소리도 듣고 싶은데. 감히 자신을 안달나게 하고서는 저렇게 모르쇠라니.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
모르는 척은 해 줄 수 있지만 괘씸해서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아…….”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스위트피의 눈앞에 펼쳐진 건 아주 황폐한 땅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땅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온통 새까맸다.
이 땅이 불에 탔던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신화의 시대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리시안셔스조차 까마득하게 느낄 정도로 아주 오래된 일인데, 이곳은 마치 바로 어제 화재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날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은 생각보다 강한 회복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신에게 버림받은 땅이지.』
“…….”
『모든 생명이 떠난 이 땅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는 건 버림받았다는 뜻밖에 안 되니까.』
신에게 버림받아 회복력을 잃어버렸다는 암흑의 땅의 모습은 처참했다.
‘이곳에서 뭘 찾을 수 있을까…….’
이곳에 온 것이 여전히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걱정은 들었다.
이곳에서마저도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스위트피는 동맹을 맺기로 한 이상 저들을 먼저 배신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케르트와 칼루스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배신하고 먼저 이빨을 드러낼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무언가…… 찾을 수 있겠죠?”
『자신이 없는가 보구나.』
“그거야…….”
『네가 강하게 주장한 만큼 무언가가 있기야 하겠지.』
그 대답에 스위트피는 말문이 확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야 내가 암흑의 땅에 오자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언가를 찾아내긴 해야 할 텐데.
엄청난 압박감이 스위트피를 휘감았다.
『만약 못 찾는다 하더라도.』
“…….”
『넌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책하지 않아도 돼.』
“……리시안.”
『내려갈 테니, 꽉 붙잡고 있어.』
무심하게 스위트피를 안심시켜 준 리시안셔스가 부드럽게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래곤의 발이 새까만 땅에 내려앉고, 리시안셔스는 인간화를 하자마자 스위트피를 안아 들었다.
“리시안, 저도 걸을 수 있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이곳은 네가 걷기엔 적합하지 않은 거 같구나.”
스위트피는 곧 그 이유를 알아챘다.
“아악! 아파!”
“콜린! 괜찮아?!”
콜린이 땅에 내려앉자마자 빠른 속도로 신발 밑창이 녹아내렸다. 놀란 아케르트가 허겁지겁 콜린을 안아 들었다.
“이 땅이 조금 뜨겁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미안, 미안. 인간들은 이 정도 뜨거움도 못 견딘다는 것도 깜빡했어…….”
콜린이 울먹거리며 빼액 소리치자 아케르트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뒷 목을 긁적거렸다.
“각자 흩어져서 찾도록 하지. 모여서 다녀 봤자 시간만 버릴 테니.”
칼루스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암흑의 땅은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아 있는 것이 없는 땅이었지만 무척이나 드넓었다. 모여서 다니다가는 시간을 많이 지체할 것이다.
모두 칼루스와 의견이 같은 것인지 선선히 동의했다.
“저와 리시안은 저쪽을 찾아 볼게요.”
그들 중 어디로 갈지 먼저 의견을 낸 건 스위트피였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바다와 맞닿은 높은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절벽 위에는 모든 것이 새까맣고 재가 된 땅 위에서 유일하게 타들어 가지 않은 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하얀 신전이 보였다.
스위트피의 꿈속에서, 에리카와 리시안셔스가 처음 만났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암흑의 땅의 풍경과 상반되는 하얀 신전을 발견한 아케르트의 표정이 갑자기 짓궂어졌다.
“리시안셔스, 괜찮겠어? 저기는 너의 옛 연…….”
“닥쳐라, 아케르트.”
“아, 알았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스위트피는 이미 아케르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눈치챘으나 굳이 그 사실을 리시안셔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샬롯도 칼루스에게 왜 저기만 멀쩡한 거냐는 질문을 했으나 칼루스는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며 샬롯을 안고는 먼저 수색하기로 한 곳으로 떠났다. 아케르트는 리시안셔스를 어떻게든 골려 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으나, 리시안셔스의 눈치를 보던 콜린의 독촉에 결국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가요..”
잠시 말없이 절벽 위를 올려다보던 리시안셔스는 이윽고 스위트피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왜 하필 이곳이지?.”
“네?.”
“굳이 이곳을 살펴보겠다고 한 게 궁금해서 묻는 말이야..”
리시안셔스는 덤덤하게 말했으나, 스위트피는 이곳이 그의 오래된 기억 속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세레티와의 추억이겠지.’
“여기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멀쩡해 보여서요. 수상해 보이는 게 당연하잖아요..”
스위트피의 대답에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묵묵히 신전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기만 할 뿐이었다.
스위트피를 안고도 중심을 잃거나 쉬지 않은 채로 경사진 계단을 빠르게 오른 리시안셔스는 그대로 스위트피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신전이 있는 절벽 위는 뜨겁지 않아서 스위트피 혼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럼 꼬마 경감님. 어서 수색하시죠..”
꼭 무언가를 찾아내리라 다짐하며 눈을 빛내는 스위트피를 보며 리시안셔스가 ‘꼬마 경감님’이라 놀렸으나, 스위트피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다 큰 자신을 여전히 꼬마라고 부르는 말에 발끈하는 것이 되려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은 터였다.
스위트피는 망설이지 않고 바다와 가까운 절벽 끝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꿈에서 세레티가 이 나무를 통해 신과 소통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혹여 자신의 외모가 세레티와 닮은 게 조금이라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나도 신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스위트피는 긴장해서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나무를 만졌다.
‘신께서 제 목소리를 듣고 계신다면 응답해 주세요…….’
조심스럽게 마음속으로 신을 불러 보았다.
“……..”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왜 안 되지? 좀 더 집중해야 하나?’
이번에는 두 손을 나무 위에 올렸다. 그리고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며 나무를 향해 모든 신경을 쏟았다.
‘듣고 있다면 목소리 좀 들려 주세요! 제발……!’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건만…….
신의 목소리는커녕, 점점 숨이 막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