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스윗-.』
한참 몰려오는 졸음과 전쟁 중이던 스위트피는 자신을 부르는 리시안셔스의 목소리에 눈꺼풀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왜요, 리시안?”
『궁금한 게 있단다.』
“리시안이, 제게요?”
『아까 그랬지.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아, 그거요…….”
『네가 꿈꾸는 평화로운 삶이 궁금한데.』
“…….”
『자세히 알려줄래?』
특별히 말 못 해 줄 이유는 없지만, 이런 걸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의아하기는 했다.
“설명할 것도 없어요. 너무 평범한 소원인걸요. 다른 사람들 사는 것처럼 똑같이 살고 싶다는 거였어요. 언제 다른 드래곤이 자신의 반려를 살리겠다고 내 심장을 뽑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없고,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리시안이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심장을 뽑을 필요도 없는 그런 삶이요.”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네가 말한 그 부분은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으음…….”
『어서, 스윗.』
리시안셔스의 재촉에 못 이겨 스위트피는 자신의 꿈을 조금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집은 작아도 상관없어요. 근데 벽돌로 만든 튼튼한 집이었으면 좋겠어요.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그런 집이요.”
『하지만 그건 내가 알고 있는 너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구나.』
“리시안은 저를 어떻게 보고 있길래 그래요?”
『내가 아는 너는 언제나 최고급 여관만을 고집하고 돈을 밝히던 꼬마지.』
“…….”
왠지 울컥해서 반박하고 싶었으나, 맞는 말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스위트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으음…….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요?”
『물론.』
“전 크고 넓고 화려한 집이 좋아요. 가능하다면 샬롯 그레이엄 양처럼 정원과 후원이 있는 집이면 더 좋고요. 2층에다가 테라스가 있고, 정원에는 화려한 분수대가 있으면 더더욱 좋을 거 같아요.”
『암, 이래야 내가 아는 스윗답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집에는 못 살잖아요? 현실과 타협한다면 겉보기에 예쁜 것보다 실용적인 게 최고죠. 아, 그러고 보니까 현실과 타협할 필요가 없겠네요!”
지극히 현실적이던 스위트피가 갑자기 태도를 달리했다.
“저는 돈이 없지만 리시안은 금화가 넘쳐나잖아요!”
『…….』
“미안해요. 제 미래에는 당연히 리시안이 있을 텐데, 그만 리시안을 뺀 미래를 얘기했네요.”
스위트피가 그동안 고급 여관에서 머물 수 있었던 것도 리시안셔스의 금화를 아끼지 않고 쓴 덕분이기는 했다.
떠돌아다니는 데다 언제 다른 드래곤의 습격으로 다치고 구를지 몰라 실용적인 옷을 입는 것뿐이지, 스위트피는 언제나 반짝거리고 화려하고 값이 나가는 걸 좋아했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라 그런 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뿐.
‘나도 정말 이상하군.’
제 금화를 마음껏 쓰겠다는 이 꼬마를 괘씸해해야 하는데. 이제는 저런 뻔뻔함이 익숙해져서인지, 괘씸한 마음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미래에 살 집을 얘기할 때 자신이 가진 금화를 포함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성장한 스위트피가 자신이 없는 미래로 갈까 봐 두려운 마음이 불쑥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러다가 정말로 신이 만든 드래곤들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다음, 스위트피가 결혼할 인간 수컷을 데려오면 쉽사리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의 꼬마 반려가 결혼할 남자라…….
얼굴도 모르는 놈을 상대로 살벌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리시안.”
잠겨 있는 스위트피의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나서야, 리시안셔스는 머릿속으로 스위트피가 결혼할 수컷을 흠씬 두들겨 패는 상상을 멈출 수 있었다.
“저, 졸려요…….”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한숨 자렴.』
“제가 떨어지면 어떡해요.”
『떨어트릴 일 없어.』
“리시안을 믿긴 하지만, 지금은 다른 드래곤들도 있잖아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졸려서 정신 못 차리는 것보단 지금 자두는 게 낫다. 절대 떨어트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자 둬.』
리시안셔스가 안심시켜주자 그제야 스위트피는 마음 놓고 그의 발목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드래곤이 있지도 않을 미래의 결혼할 남자를 몇 번이고 죽이는 것도 모르고, 스위트피는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오는 수마에 자신을 내맡겼다.
***
신전의 건물 내부, 깊숙한 곳에는 울창한 나무 하나가 있었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가장 먼저 만든 나무였으며, 이 나무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 신전의 사제들은 신이 만든 첫 번째 자연이며 소통의 창구인 나무를 ‘신성나무’라 불렀다. 이러한 신성나무를 관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신이 첫 번째로 만든 인간, 세레티였다.
뚫린 천장 위까지 뻗어 있는 가지는 어두운 밤이 되어 올려다보면 가지가 손처럼 별을 어루만지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신성나무를 만질 수 있는 것도, 신성나무를 통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세레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이 세상을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세상 곳곳이 신이 손길이 가득 닿아 있는 대지 위에는 세레티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세레티처럼 앞이 안 보이는 존재는 물론이고, 그 외에도 불완전한 존재는 없었다. 모든 인간들은 앞이 보였고, 소리가 들렸고, 사지가 멀쩡히 달려 있었으며,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목소리를 내어 웃을 줄 알았다.
그러니 완전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세레티같이 불완전한 존재는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사제들은 세레티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보잘것없는 존재가 신이 첫 번째로 만든 인간이라니. 인간을 대표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니.
사제들은 세레티의 존재를 일반 사람들에게서 꼭꼭 숨겼다. 대신 하루 간격으로 만들어져 세레티와는 거의 쌍둥이 자매처럼 지내는 에리카를 세레티로 속여 사람들에게 내세웠다.
대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신의 사랑을 전파하고 신을 대신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손을 뻗는 일도 에리카가 도맡아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신전에 남아 있는 세레티가 마냥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사제들이 에리카와 함께 신전을 떠나고 없을 때면 세레티는 홀로 분주했다. 오늘도 전날 에리카가 밖에서 가져온 새로운 꽃을 만지며 새로운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바람이 불어온다…….’
멀리서부터 부드러운 온풍이 불어왔다.
세레티는 이 바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일부러 앞이 안 보이는 세레티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신전에 도착할 때면 날갯짓을 부드럽게 하는 리시안셔스를 알기 때문이었다.
“나 왔어.”
알아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대신 입 모양으로 그리 속삭였다. 이 입 모양도 베일에 가려져 있어 리시안셔스는 보지 못할 테지만.
세레티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을 더듬거리자 리시안셔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허공에 들려 있던 손을 잡았다.
“오늘도 다른 인간들은 없나 보네.”
에리카가 사람들을 만나러 나갈 때면 많은 사제들이 그 뒤를 따라나서고는 했다. 보통 한두 명 정도는 신전에 더 남아 있기도 하지만 가끔 드물게 전원이 나갈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날이 잦았다.
세레티가 밤중에 신전을 나가고 에리카가 세레티를 찾겠다고 난리를 피운 이후로, 사제들은 대놓고 세레티를 귀찮아하며 같이 있기 싫은 티를 내고는 했다.
“항상 널 혼자 남겨 두고 나가?”
리시안셔스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세레티가 이 넓은 신전에 혼자 남겨져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거의 반나절은 신전을 비우는 거 같던데.”
반나절이나 되는 긴 시간을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혼자 남겨 두는 게 그의 기준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 듯했다.
‘사람들은 절 싫어해요.’
그래서 따돌림을 받고 있어요.
평생을 지내 온 신전 안에서도 저는 혼자예요.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이었지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세레티는 리시안셔스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자신이 할 말을 적었다.
‘리시안셔스를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혼자 남은 거예요.’
리시안셔스도 신전 안에서 이 여자의 위치가 높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가 말하길 원치 않는 것 같으니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리시안셔스는 굳이 세레티의 아픔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뭘 해 줄까?”
요즘 리시안셔스는 세레티만 보면 뭐든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언제나 세레티의 바람은 소박했다.
항상 신전 안에서만 지내서일까. 부탁을 하더라도 어디로 데려가 달라는 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바다나, 산, 혹은 그냥 하늘을 나는 걸 즐기기도 했다.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던 세레티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리시안셔스가 데려다주는 바깥세상을 마주할 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붉고 빛난다는 노을도, 소금기 어린 바람을 맞으며 바다의 풍경을, 하늘을 날며 맑고 푸르다는 하늘의 풍경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