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케르트의 눈치 없는 얘기에 스위트피의 눈치를 살핀 것도 그뿐이야.’
지켜 준다는 건 비단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해당되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해 오던 순수한 마음이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똑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리시안셔스에게도 스위트피는 소중하니까.
제 인생에서 이렇게 활력이 넘쳤던 적이 얼마만이던가.
분노하고, 상처받고, 당황하고, 즐거워하고.
아주 오래전에 모든 것이 최악으로 끝나고, 무기력함이 온몸을 지배하다 또 어떨 때는 분노에 잠기고는 했었다. 그러나 분노하는 것조차 지쳐 무기력함에 잠겨서 살다가, 모든 드래곤들이 인간들에게 대지를 내어 주고, 잠들어 있던 긴긴 시간.
눈을 뜬 순간, 다시 끝없는 지루한 시간들이 이어질 거란 생각에 죽음과 다름없던 숙면이 끝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깨웠던 작은 꼬마가 제 시간을 빠르게 당겼다.
스위트피는 길게 느껴졌을 자신의 지루한 시간들을 즐거운 찰나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눈 한 번 깜빡인 것처럼 짧게 느껴지는 찰나, 스위트피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나무 그늘에 선 리시안셔스는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토끼의 털을 검지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스위트피를 빤히 관찰했다. 황금을 녹여 실로 뽑아낸 것처럼 눈부신 머리카락도, 숲을 담은 것처럼 느껴지는 눈동자도.
모두 어린 날의 스위트피와 닮았건만. 그저 키가 자라고 젖살이 빠졌다는 이유로,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성숙한 스위트피를 보고 있자니, 뿌듯함과 함께 기묘한 감정이 밀려오는 거 같았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하지.
리시안셔스는 이 감정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전에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거 같은데. 언제였더라.
그래, 예상치 못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런 경이로움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
자신이 지금 스위트피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겹쳐 본다는 걸 알았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린 리시안셔스는 제 시야에 보이는 스위트피의 얼굴을 가렸다.
‘만약 지금의 스위트피가 베일을 썼다면.’
저 가는 몸 선과 손이…….
‘미쳤군.’
제가 키운 아이를 대상으로 오래전 죽은 연인을 겹쳐 보다니. 스위트피의 얼굴을 가리고 제 기억 속의 베일을 썼던 연인의 몸 선을 떠올리던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한심한 짓거리에 헛웃음을 흘렸다.
신이 이어 놓은 꼬마 반려가 자꾸 제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니, 자신도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
세상에서 가장 빌어먹을 쓰레기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리시안셔스의 자괴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햇빛 아래에 눈부시게 보이던 스위트피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반려를 데려오겠다던 그들이 온 것이다.
***
“제, 제 이름은 콜린 핸슨이라 합니다. 17살 때 아, 아케르트를 깨우고 바, 반려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지금 설마 겁먹은 거야? 아니면 수줍음을 타는 거야?”
얼굴색이 창백한 게 수줍음보다는 겁을 먹은 게 틀림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동안 콜린 핸슨의 세상에 드래곤은 두 가지로 나뉘었을 것이다.
아케르트와 아케르트가 아닌 드래곤으로.
아케르트는 콜린을 어떻게든 지켜 주려 했겠지만, 다른 드래곤은 그 반대였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겠지.
지금 이 자리는 콜린이 처음으로 아케르트가 아닌 다른 드래곤들과 교류하는 자리였다. 반가운 마음보다 두려움이 더 큰 게 당연했다.
“제 이름은 샬롯 그레이엄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남자인 콜린 핸슨과 다르게 샬롯 그레이엄은 다른 드래곤들을 보고도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침착했고, 차분했다.
각자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콜린 핸슨은 양치기 소년이었는데, 실수로 목장의 문을 안 닫았다가 빠져나간 양을 찾으러 나갔다고 한다. 도망친 양이 동굴로 향하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가 우연히 아케르트를 봉인에서 깨웠다고 했다.
“아케르트는 절 겁주는 걸 좋아했어요. 드래곤 전쟁에 대해서 설명도 해 주지 않았죠. 틈만 나면 절 잡아먹겠다고 놀려 대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결과적으로 잡아먹힌 것도 아닌데 다 큰 수컷이 엄살이 심하군.”
칼루스가 콜린 핸슨의 겁 많고 움츠러든 태도를 지적했다.
“하지만, 칼루스. 우리 콜린의 걱정이 괜한 걱정은 아니었어. 나도 장난으로만 콜린을 잡아먹겠다고 경고한 것도 아니고. 가엾게도 콜린은…….”
아케르트가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성년이 되자마자 나한테 여러 번 잡아먹혔…….”
“닥쳐.”
“닥쳐라.”
리시안셔스와 칼루스가 거의 동시에 아케르트의 말을 막았다.
“쳇, 너희 왜 이래? 너희의 반려도 다 큰 성인인데. 서로 알 거 다 알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샬롯 그레이엄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케르트가 하는 말뜻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스위트피의 반응은 샬롯과는 달랐다. 오히려 아까의 콜린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스위트피의 눈이 빠르게 콜린 핸슨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신체적으로 절단된 곳은 안 보이는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중얼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심각한 얼굴인 스위트피에게 향했다. 스위트피는 남녀의 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으며, 이론적으로 알 건 다 알았다. 하지만 음담패설을 알아듣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미 실제로 사람을 잡아먹는 드래곤을 본 스위트피는 콜린을 여러 번 잡아먹었다는 아케르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할 수 없었다.
“리시안셔스, 넌 정말 반려를 소중히 여기는구나…….”
예상치 못한 지나치게 순진한 반응에 아케르트도 이번에는 시원하게 웃지를 못했다. 리시안셔스를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스위트피는 이미 충격을 받은 거 같은데, 저 천박하고 더러운 말뜻을 그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윗, 아케르트가 장난친 거다.”
“……장난이요?”
“원래 이상한 소리를 자주 지껄이는 녀석이니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 없어.”
그제야 스위트피는 자신이 불필요하게 심각한 반응을 내보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민망해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타인이 다치는 것보다 자신이 민망한 게 나은 일이니, 아케르트의 말이 농담인 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샬롯과 나는 그레이엄 가의 후원에서 처음 만났다.”
이번에도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시켜 준 건 칼루스였다.
“그레이엄 가의 후원이라면…….”
“맞아요. 저희 집안은 귀족 가문이에요.”
샬롯이 덤덤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증조 할아버지 대에 왕실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죠. 그레이엄 남작가라고 못 들으셨나요?”
자신의 출신으로 으스대지는 않았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들어본 거 같아요.”
사실 스위트피는 귀족들의 세계는 알지 못했으며, 관심도 없었지만 샬롯의 자부심을 망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아는 체를 해 줬다.
“후원에는 아주 오래된 나무가 있었어요. 언제부터 세워져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나무였죠. 설마 저희 가문 후원에 세워진 나무에 드래곤이 봉인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귀하게 자랐던 샬롯이 목숨을 위협받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 칼루스와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가족들이 혹여 위험해질까 봐 한 번도 집을 찾아가지 못했어요. 이 전쟁을 끝내게 된다면 제일 먼저 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어요.”
“저, 저도요. 제가 장남이거든요. 책임져야 할 동생이 여섯이나 있는데…….”
그들은 모두 가족이 있었다. 세 명의 반려들 중 돌아갈 가족과 집이 없는 건 스위트피뿐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이제 많이 괜찮아졌지만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싼 손길에 스위트피는 제 뒤에 있는 리시안셔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런 말 없이 스위트피를 위로하고 있었다.
“저는 그냥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스위트피는 자신의 작은 꿈을 꺼냈다.
“쫓기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한 곳에서…….”
남들이 누리는 평범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소박하지만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이제 이들이 할 일은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었다.
세 마리의 드래곤이 각자의 반려를 태운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둑해진 밤하늘을 나는 리시안셔스의 발등 위에 익숙하게 기대어 앉은 스위트피는 몰려오는 피곤함을 꾹꾹 억누르고 있었다.
졸다가 떨어져도 리시안셔스가 잡아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위험한 상황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으니 말이다.
하지만 졸린 걸 참을 수는 있어도 졸음을 아예 내쫓을 수는 없는 법이라,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건 막을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