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사이, 다쳤던 동족은 자신의 상처가 있던 자리를 매만졌다. 굳어서 달라붙은 핏자국은 그대로였지만, 상처는 고통과 함께 말끔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드래곤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단번에 리시안셔스를 알아봤다.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그가 본체일 때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는 되었어.”
리시안셔스는 이제 막 몸을 일으킨 동족이 입을 떼기도 전에 인사를 차단했다.
“그보다, 내 반려가 너희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데.”
“…….”
“내 도움을 받았으니 귀를 열고 들을 준비는 되어 있을 거라 믿어.”
순화해서 말하고는 있으나 결론은 도움을 받았으니 얌전히 얘기를 듣고 가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리시안셔스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도 이 두 마리의 드래곤들은 이미 그들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대답 대신 스위트피를 바라봤다. 그들이 대화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낀 스위트피가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
“그래서 결론은…….”
“우리보고 동맹을 맺자는 거군.”
다행히 이 두 마리의 드래곤은 이야기를 단번에 이해했다.
‘싫다고 하면 어쩌지…….’
자신의 얘기를 들은 그들에게서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스위트피는 자신감이 떨어졌다. 어쩌면 저들이 공격적으로 변해 리시안셔스가 전투를 벌여야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저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그러나, 애써 희망을 다지기로 했다.
이 제안은 지금 저 두 드래곤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좋아, 난 결정했어.”
먼저 결정을 내린 것은 아케르트였다.
“어차피 바로 어제 다른 반려를 죽여서 새로운 심장을 구하기까지 꽤 시간이 남았거든. 너희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하니, 잠깐 정도는 서로를 신뢰해도 나쁘지 않겠지.”
아케르트의 수락을 기쁘게 받아들인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도움을 받았던 드래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쪽은요?”
“나는…….”
그가 대답을 하기까지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성격이 신중한 편인 것 같았다.
“……수락하겠다.”
그러나 결과는 스위트피가 예상한 대로였다. 처음 만나 제안을 하자마자 이렇게 계획대로 동맹이 맺어지다니. 그나마 시간을 절약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통성명을 할까요. 저는 스위트피 로렌이라고 해요! 리시안, 리시안도 인사해야죠!”
“어차피 저들은 이미 날 알고 있어.”
리시안셔스가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케르트는 저 말을 인정하는 의미로 어깨를 대충 으쓱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난, 아케르트. 우리 전에 본 적 있지?”
“네, 기억나요.”
“근데 용케 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단 아케르트가 스위트피를 겁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너, 그때 나한테 죽을 뻔…….”
어차피 인간 여자에게 닿을 생각도 없었던 손이 허공에서 붙잡혔다.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손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에 아케르트가 소리를 질렀다.
“리시안!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그 고통은 저 인간 여자의 말 한마디로 금방 아케르트를 떠났다.
“흐…….”
아직도 고통의 여운이 남은 손목을 호, 불며 아케르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봤다.
“오호라. 과거에 그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이제 새 사랑을 찾았다, 이건가?”
“닥쳐, 아케르트.”
“너무 살벌하게 굴지 마. 당신의 반려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우린 이제부터 동맹 사이잖아?”
그때 옆에 있던 다른 드래곤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이봐, 어째서 리시안셔스는 ‘당신’이라 부르면서 나는 ‘야’라고 부르지?”
“어른 공경이랄까? 리시안셔스는 드래곤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잖아. 아주 오래전 여기에 계신 드래곤들의 아버지가 사랑 놀음을 할 때 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드래곤이었…….”
별생각 없이 과거를 회상하며 떠들어 대던 아케르트는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리시안의…… 과거…… 사랑…… 놀음…….”
“꼬, 꼬마야. 그게…….”
리시안셔스에게 현재의 반려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현재의 사랑 앞에서는 과거의 사랑을 언급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케르트가 미처 알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 동맹을 깨고 싶어지는군.”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하는 스위트피의 곁에 선 리시안셔스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운데에 낀 아케르트만 본인이 친 사고 때문에 눈치를 보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스위트피의 창백해진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리시안셔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지은 거 같은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어떤 결말을 맞이했든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부끄러워할 이유는 물론이고 숨겨야 하는 이유도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지.
‘아케르트에게는 입을 닥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어.’
임시 동맹을 맺는 기간 동안 또 주둥이를 털면 곤란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스위트피에게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저 우울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일단 무슨 말이든 해야겠지. 계획을 세우려면 이 어색한 분위기부터 풀 필요가 있을 테니.
“스…….”
리시안셔스가 우울함에 빠진 스위트피를 현실로 끌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러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 그대로 고꾸라질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스위트피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다, 다른 여자가 있을 수도 있죠! 과거는 상관없어요!”
……이 상황은 뭐지.
스위트피의 돌발 행동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리시안셔스였지만, 기가 죽었다가 갑자기 씩씩해진 스위트피를 보며 내심 당황했다.
“정말 상관없어?”
“그럼요!”
“리시안셔스의 과거를 듣고도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을까?”
안 되겠다. 평화로운 동맹은 그른 거 같았다. 저 입이 가벼운 붉은 드래곤에게 말이 아니라 물리적인 경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상관없어요! 리시안이 과거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호오-. 질투심이 없는 편인가 보네?”
“그런 게 아니라, 리시안은…….”
아케르트의 얄미운 주둥이를 향한 인내심이 점점 밑바닥을 보였으나, 끝내 그녀를 응징하지 못한 건.
“나이가 많잖아요!”
스위트피의 충격적인 발언 때문이었다.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
“리시안에게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없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 거 같아서요.”
드래곤은 거의 창세기 때 탄생 되었으며 수명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인간과 비교하면 거의 불멸이나 다름없으니 나이는 무의미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저 말로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스위트피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게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한참 어린 스위트피를 대상으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없으니, 이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왠지 양심이 찔렸다.
동시에 내심 속으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고 있었을 스위트피가 괘씸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마음을 표현한 건 다름 아닌 스위트피 로렌, 저 영악하고 쓸데없이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래놓고 뒤에서는 제 나이가 본인의 조상보다 얼마나 많을지 계산해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케르트는 스위트피의 얘기가 재밌는지, 바닥을 뒹굴며 웃었으나 리시안셔스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웃어 대는 아케르트와 그 옆에서 손가락으로 세월을 세고 있는 또 다른 드래곤을 보면서 진심으로 이 동맹을 깨고 싶어졌다.
“아, 그렇지. 내 이름은 칼루스다. 그럴 때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계속 내 소개가 늦어지는 거 같아 말이다.”
다행히 칼루스가 자신의 소개를 하며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분위기를 전환시켜 주었다.
아케르트와 클루스. 두 드래곤은 각각 자신의 반려를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흩어졌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리시안셔스와 스위트피는 둘이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스위트피는 별다른 말 없이 숲속에 있는 소동물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무 맡에 기대어 선 리시안셔스는 그런 스위트피를 가만히 지켜봤다.
어색한데. 어색한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인가.
정작 작은 동물들과 어울리는 스위트피는 평소와 같아 보이는데, 리시안셔스는 평소와 다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와 함께 있으면서 어색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작은 인간 꼬마와 막 함께하기 시작했을 때도, 눈치 보는 건 스위트피의 몫이었지, 리시안셔스의 역할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역할이 뒤바뀌었다.
리시안셔스가 떠나갈까 봐 두려워하고, 당돌하게 굴면서도 은근히 눈치를 살피던 스위트피는 이제 리시안셔스의 눈치 따위는 살피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한 성인이 되었다. 여전히 아이같이 해맑고 천진한 구석이 있었지만, 리시안셔스에게 마냥 매달리지도 않았다.
상대가 떠나갈까 봐 무서워진 쪽은 리시안셔스였다. 이런 마음을 웬만하면 아직 스위트피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 내 보호가 필요한 아이니까.’
내가 지켜 주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니까. 하필이면 스위트피가 따라간 대상이 위험하고 난폭한 디에고였으니까. 정이 들어 버렸으니까. 스위트피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는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