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너는 끔찍하게 여기겠지만, 스윗, 나는…….』
“알아요.”
변명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리시안셔스가 드물게 스위트피에게 자기변호를 하려 들었다. 스위트피의 잠깐의 침묵이 불안했던 듯했다.
“이제 그런 걸로 리시안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혼란스러움만 가득했으나, 이제 스위트피는 모든 진실을 듣고도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위험하더라도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에요. 그래야 무언가가 바뀔 수 있어요.”
『…….』
“그러니까 리시안, 부탁이에요. 제 뜻대로 해 줘요. 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발등에 앉아 있어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으나, 그는 제 작은 반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스위트피의 말이 전부 맞았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나라를 떠돈다고 이 전쟁을 멈출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암흑의 땅에 간다고 해도 화마에 삼켜졌던 땅에 기록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그곳은 신이 처음으로 모든 것을 만든 장소였으니 말이다. 다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꺼려지는 것뿐.
『다른 드래곤들에게 동맹을 요청하는 게 가장 큰 걱정이구나.』
그 말이, 허락이라는 것을 눈치챈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비늘에 뺨을 비볐다.
하마터면, 리시안셔스는 놀라서 실수로 스위트피를 떨굴 뻔했다.
아직은 어린 스위트피의 투정에 놀란 자신을 한심해하며 리시안셔스는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좋아요. 그럼 리시안도 동의한 거니까 이제부터 다른 드래곤들을 어떻게 찾을지 생각해 보자고요!”
『그런 걸 굳이 왜 고민해야 하지? 아주 쉬운 방법을 놔두고.』
“무슨 좋은 수가 생각났어요?”
『스윗, 너는 정말…….』
신의 사랑을 받아 큰 힘을 가지고서도 아직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모습이, 새삼 아직 어리고 미숙한 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리시안셔스를 웃음 짓게 했다.
‘아니지. 디에고와의 전투를 도와줄 때 보면 힘을 상당히 능숙하게 다루긴 했었지.’
따로 훈련을 한 것도 아닌데 위급 상황 때 그 정도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잘 활용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반려는 신에게 그런 힘을 선물 받을 만한 거 같다.
‘거기다가 꽤 인정사정없었지.’
자신이 잠깐 곁을 지키지 못할 일이 생겨도, 자기 한 몸 보호하며 시간을 끌 순 있겠군.
똑똑하고 야무진 제 반려에 대한 뿌듯함을 억누른 리시안셔스가 그 방법을 일러줬다.
『네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니.』
“하지만 그 능력으로 뭘…….”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뿐.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말을 곧 이해했다.
“리시안은 천재예요!”
『너도 제법 똑똑하단다.』
“리시안을 보고 배운 게 있는데, 제가 똑똑한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똑똑한 머리는 보고 배운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영리한 머리를 준 부모님께 감사하렴.』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리시안에게도 감사할게요.”
드래곤과 반려는 하늘을 나는 내내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아케르트는 디에고에 의해 부상을 당한 자신의 동족을 이끌고 숲속으로 도망쳤다.
뒤에서 쫓아오진 않았지만 언제 마음을 바꿔 추격할지 모를 일이었다.
‘디에고, 그 자식.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말이지.’
그런 미친놈들은 언제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내 반려는…….”
“지금은 우리가 안 가는 게 서로의 반려에게 좋을걸?”
만약 디에고가 마음먹고 쫓아온다면 가장 위험해지는 건 자신들의 반려였다. 거기다가 제 몸에도 지금 다친 동족의 피가 묻었으니 추격당하기란 더욱 쉬울 것이다.
“왜 날 도와줬지?”
“네가 나 대신 속 시원하게 말해 줬거든. 그 미친놈한테.”
아케르트는 미친놈들이 내뿜는 특유의 위압감에 애써 하고 싶은 말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대신 원하는 말을 해 준 것이다.
“그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해.”
사실 속으로는 약간 후회 중이긴 했다.
‘그냥 이 자식은 버리고 나만 도망칠 걸 그랬나.’
피 냄새가 묻어 추적당할까 봐 제 반려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수컷이 되어 가지고 겁이 많은 녀석이라 밤에는 곁에 있어 줘야 하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인간은 숲의 들짐승들과 무기 없이는 맞서 싸우지 못하는 나약한 종족이라 이렇게 곁을 비우고 있는 게 불안했다. 아직은 낮이라 괜찮지만 밤이 된다면…….
“잠깐, 근데 설마 자가 치유가 안 되고 있는 거야?”
동족을 나무 맡에 내려둔 아케르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워낙 강했던 드래곤의 고린도로 행한 공격이라 치유가 조금 늦어질 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치유력 자체가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동족의 옷을 찢은 아케르트는 상처를 더욱 자세히 살폈다.
“이런 제기랄…….”
상처가 치유될 만하면 그의 두 배로 상처가 벌어졌다.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구하는 건데.’
차라리 살아남기라도 한다면, 오랜만에 좋은 일을 했다며 뿌듯함이라도 느낄 텐데.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괜한 짓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지켜야 할 제 반려를 뒤로한 채.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족에게는 미안하지만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때였다.
솨아아아 - .
멀리서부터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설마 벌써 쫓아온 건가.’
분명 도망칠 때만 해도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는데, 이렇게 빨리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고?
주변을 둘러봐도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 피 냄새를 묻히고 도망가 봤자 금방 잡힐 터였다. 이렇게 된 거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아케르트는 본체로 변할 준비를 했다.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고 이빨과 손톱이 뾰족하게 자라날 때였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것이 숲의 하늘을 가렸다. 태양 빛에 물들어 있던 지상을 그림자로 뒤덮은 존재는 천천히 숲으로 하강했다. 그것도 발등에는 아주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달고서.
그들의 존재는 우습게도 아케르트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당신…….”
스위트피가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오자 인간으로 돌아온 리시안셔스는 그대로 아케르트를 지나쳤다.
“어, 어딜 가는 거야?”
리시안셔스가 향한 곳은 남자가 누워 있는 나무 맡이었다.
“저 여자분의 반려일까요?”
“아니, 이 녀석도 드래곤이야.”
리시안셔스는 이미 아케르트가 찢은 옷을 들치며 환부를 살폈다.
자신의 고린도가 가진 힘으로 만들어 낸 상처를 원래의 주인이었던 리시안셔스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디에고에게 당했나 보군.”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지레 찔린 아케르트는 두서없는 변명을 내뱉었다.
“어쩌다가 엮인 거야! 정말로, 어쩌다가! 그 녀석이 공격당한 걸 보면 알겠지만 디에고와는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의 변명을 리시안셔스가 듣는 체도 하지 않는 거 같아 아케르트의 불안감은 점점 치솟아갔다. 잠에서 깨어난 리시안셔스와 다시 재회했을 때도 자신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디에고의 말대로 지금의 리시안셔스가 그때보다 더 강해진 상태라면…….
자신은 무조건 죽는다.
‘살아남아야 해.’
내 반려를 위해서라도.
아케르트는 자신이 살리기 위해 데려온 드래곤을 버리고 도망칠 준비를 하려 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손이 부상당한 동족의 상처를 쓸어내리는 것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손이 스치자 검은 연기가 리시안셔스의 손에 흡수되며, 상처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대단해요, 리시안!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도 갖고 있었어요!”
스위트피는 옆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리시안셔스를 치켜세웠다.
“치유와는 결이 달라. 내가 뿌린 것을 내가 거두는 것에 더 가깝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만들어 낸 상처는 거둬 갈 수 있다는 거다. 특히 고린도가 만든 상처는.”
“리시안이 만든 상처는 치유할 수 있다는 뜻이죠?”
“치유가 아니라니까.”
“그게 치유죠.”
“아니야.”
그들은 바로 곁에 아케르트를 두고도 마치 본인들의 세상에만 있는 것처럼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에 바빴다.
“아, 그럼 뭔데요? 좀 알기 쉽게 얘기해 주면 안 돼요?”
아케르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리시안셔스와 그 반려를 관찰했다.
‘저 꼬마, 기억나는군.’
많이 커서 성숙해지긴 했지만 어릴 때 얼굴 그대로라 알아보기 어렵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저 특유의 곱슬곱슬한 눈부신 금발은 잊히기 쉬운 것은 아니니까.
“고린도가 내는 상처는 진짜면서 진짜가 아니기도 해.”
“무슨 말이에요, 그게?”
“환각이거든.”
“그럼 진짜로 다친 건 아니네요?”
“그건 아니야.”
“쉽게 설명해 달라고 그랬잖아요.”
“미안하구나. 네가 이해력이 낮다는 걸 잠시 잊어서…….”
“아까는 똑똑하다면서요?”
“내가 그랬나?”
“네, 그랬어요.”
“이런, 기억이 안 나는데. 어쩌지?”
이제 리시안셔스는 대놓고 스위트피를 약 올리며 놀렸고, 스위트피는 그걸 알면서도 발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