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럼…….”
인간화한 동족의 몸을 발톱으로 낚아채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라?”
날아오르는 아케르트를 보며 디에고의 고개가 모로 기울여졌다.
“배신당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음울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생긋 웃은 그가 본체로 변해 아케르트의 뒤를 쫓으려 했다.
분명히, 그러려고 했었다.
“…….”
그러나 디에고가 할 수 있는 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온몸에 퍼지는 고통을 내색 않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제기랄.’
디에고는 이 고통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고린도의 부작용이라는 것을.
* * *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가방을 챙긴 스위트피는 공국의 사람들에게 씩씩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반려님, 감사했어요!”
“리시안셔스 님도 감사했습니다!”
“행복하세요!”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가는 연인을 대하듯이 작별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때문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스위트피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리시안셔스의 팔을 슬쩍, 쿡 찔렀다.
리시안셔스는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해 스위트피의 손길을 피했다.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반려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진짜 연인이든 아니든, 저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낭만적인 관계로 여겨질 것이다.
제 마음이 어떻건 스위트피가 신이 정한 자신의 반려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사람들의 오해는 정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꼬마…….
아니, 그냥 반려였다.
어릴 때부터 뻔뻔하다는 면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이렇게까지 능글맞을 수가 있나.
좋아한다는 말을 망설임 없이 하지 않나. 지금도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수줍어하기는커녕…….
‘미치겠군.’
슬쩍 옆에 있는 스위트피를 내려다본 디에고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윙크를 날리는 스위트피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 영악하고 능글맞고 뻔뻔한 꼬맹이가…….
이제는 마냥 귀엽지도 않아서 이런 행동을 할 때면 곤혹스럽고 난감했다.
‘그래, 다 컸으니까.’
귀엽다고 하기에는 이제 다 자란 숙녀니까.
그래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 거다.
다 큰 숙녀가 자꾸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고개를 들고 빤히 눈을 맞추고, 윙크를 하니까…….
다 자랐으면서. 드래곤들의 전쟁에 휘말리지만 않았으면 이제 자신의 보호 없이 자립할 나이가 되었으면서.
그런데도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움 없이 구니까, 그런 스위트피를 대신해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 테다.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고, 조금 어지러워지는 건 고작 그런 이유에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이제 성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리니까. 생각이 몸만큼 자라지 못해 자신을 남자로 보는 것뿐이다.
조금만 더 생각이 깊어지면 자신이 아닌 일생을 함께 할 다른 좋은 수컷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스위트피의 이런 행동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휘말린다고 해 봤자 아주 조금, 곤혹스러운 게 전부지만.
‘그러고 보니, 이런 감정…….’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살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감정의 폭이 넓지 않게 된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전에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인해 얼굴에 열기가 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몸의 현상과 어쩔 줄을 모르겠는 이 기분을 말이다.
‘……언제였지.’
애초에 드래곤과 인간을 다 합쳐도 스위트피만큼 리시안셔스에게 감정의 폭을 넓혀 주는 존재는 없었다.
삶의 즐거움도, 걱정도, 초조함도, 곤란함도, 모두 다 스위트피로 인해…….
“…….”
마을 사람들과 작별하는 스위트피를 보던 리시안셔스의 동공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설마.’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으나, 리시안셔스는 애써 그 인물을 지워 냈다. 스위트피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해도 자신이 저 아이를 대하는 마음은 그 여자와는 결이 다르다.
이 감정은 결코 그 여자를 향해 느끼던 것과는 다르다.
“조엘, 그동안 고마웠어요.”
“고마웠다는 말은 제가 해야죠. 감사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니까 제발 그만해요…….”
조엘과 인사를 나누던 스위트피가 자신에게 향하는 집요한 눈길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리시안셔스를 향해 눈매를 접고 입꼬리를 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리시안셔스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리시안이 왜 저러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보고도 다정하게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에 스위트피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까 장난친 것 때문에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스위트피는 조엘과 인사를 마무리했다.
“참, 복원도 전해 준 거 고마웠어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저희 공국을 꼭 다시 찾아 주십시오.”
“그럴게요, 잘 지내요.”
마지막으로 애나와도 짧은 인사를 나눈 스위트피가 다시 리시안셔스에게 다가오자 그는 언제 스위트피를 낯설게 봤냐는 듯, 익숙하게 본체로 돌아갔다. 스위트피가 발등에 앉자, 리시안셔스가 날갯짓을 했다.
사람들은 드래곤의 날갯짓에 흙먼지를 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가까이에서 그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날아오르는 드래곤과 그 반려를 향해 사람들이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발등에 앉아 배웅해주는 공국인들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같이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스위트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아직도 네 마음은 변함이 없는 것이겠지.』
“네.”
리시안셔스가 또 설득하려 들까 봐 스위트피는 0.1초 만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암흑의 땅은 리시안셔스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라 꺼려지는 듯했으나…….
그곳을 가지 않고 다른 나라를 떠돌아 봤자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다른 나라를 떠돌며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중요한 정보는 얻지 못했었다.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일을 계속 진행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고집스러운 스윗, 이제 첫 번째 계획을 말해 보렴.』
“제 첫 번째 계획은요…….”
스위트피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료를 만드는 거예요!”
『……스윗.』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이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설마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로 반려인 인간과 드래곤에게 동맹을 요청하자는 건가?』
“당연하죠.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순 없잖아요?”
『그래. 실현 가능성이 적은 계획이라 되물어 봤는데, 진심인 듯하구나.』
“리시안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요. 저도 같은 걱정을 하기는 했거든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리시안셔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진 알 수 있었다.
현재 살아있는 드래곤들은 둘로 나뉜다.
반려를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드래곤과 반려를 지키기 위해 다른 반려를 죽일 준비가 만만한 드래곤.
이미 반려를 잃은 드래곤은 굳이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동료를 찾는 거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중에서도 ‘반려를 잃은 드래곤’이라는 조건을 달고 찾기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가 반려를 잃었다면 그 드래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드래곤에게 위험을 감수하고서 동료가 되어 달라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반려가 있고, 자신들과 같은 상황이라 이 전쟁을 멈추고 싶어 하는 드래곤들에게 동료가 되자 해야 하는데…….
그들이 자신의 동맹 제안을 순수하게 여겨줄지가 의문이었다. 얘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다짜고짜 공격부터 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가 드래곤들은 반려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기적으로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14일 이내에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여 심장을 취할 것.
만약 겨우 발견해서 동맹을 제안하러 간 드래곤이 다른 반려의 심장을 구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 리시안셔스와 스위트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는 며칠의 시간이 남았어요?”
『무슨…….』
“다른 사람의 심장을 취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냐고요.”
리시안셔스는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스위트피가 원한 답을 들려줬다.
『우리에게는 7일의 시간이 남아 있어.』
“…….”
『그러니까 걱정 말렴.』
예상은 했지만, 자신이 떠난 뒤로도 죽지 않게 해 주려고 다른 사람을 해쳤구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행이라던가, 고맙다는 말은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잔인한 말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