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91화 (91/120)

<91화>

그들 중 여름의 태양빛을 닮은 붉은 비늘을 가진 아케르트는 하품을 하던 중 멈칫했다.

하도 황당한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그러나 디에고의 형형한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거 미친놈이잖아.’

그 당시, 한 인간 여자와 얽혀 있던 리시안셔스는 축하의 대상보다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드래곤들 중 첫 번째로 태어나 필요할 시에 종족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리시안셔스의 앞에서 몇몇 놈들이 겁도 없이 비아냥대기도 했었다.

그 당시, 드래곤들은 인간과 어울려 살았지만 ‘신의 대리자’ 역할로 함께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동등하게 보지는 않았었다.

인간들이 보호하는 동물들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면 끔찍해 하듯이, 그들 또한 리시안셔스를 그렇게 여겼었다.

물론 지금은 모든 드래곤들이 신께서 강제로 생명을 연결해 이어 준 인간 반려와 사랑에 빠졌지만.

신이 연결해 준 운명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 당시 리시안셔스는 제 스스로 인간을 선택했었다. 화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리시안셔스는 지금도 반려가 있잖아?’

본인이 스스로 선택했던 반려와 신이 연결 지은 반려가 있는데, 지금 디에고가 말하는 반려는 어떤 반려를 말하는 것일까.

‘궁금하긴 한데.’

한 번 물어보기나 할까.

아케르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 새끼, 눈이 맛이 가 있잖아.’

자고로 자신보다 약하든 강하든, 미친놈은 건드리는 법이 아니었다. 눈이 돈 상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에게 버림받은 드래곤이, 그것도 여러 가지 사건으로 동족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 인사인 디에고가 갑자기 찾아와서 동맹을 맺자는 말에 호기심을 갖고 응했던 게 실수였다.

‘후회가 밀려오는군.’

단순히 호기심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을 제 반려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거긴 하지만, 참고 들어주기 힘들 정도로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긴 했다.

『리시안셔스는 너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야. 고린도를 잃고 무력하고 기운 없는 리시안셔스를 기억하나 본데, 그 녀석이 자신과 제 반려를 살리겠다고 죽인 다른 반려의 수가 몇 명인지 세기 힘들 정도라고.』

반려가 죽으면 드래곤도 죽는다. 여기에 있는 모든 드래곤들은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든 지금까지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과 살아남은 드래곤들의 숫자를 합쳐도 아마 스무 명 안팎일 것이다.

그들 모두 적어도 리시안셔스가 죽인 수만큼 다른 반려를 죽였기 때문에 반려를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리시안셔스가 몇 명을 죽였든, 그건 그들이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리시안셔스’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다른 동족들이 첫 번째 드래곤이자 드래곤의 아버지라 불리기까지 한 리시안셔스를 경계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볼품없고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수치를 모르고 인간을 사랑했으나, 그 대가로 연인과 가장 강한 드래곤을 뜻하던 고린도를 잃은 리시안셔스.

그는 반려를 향한 모욕은 참지 않아도 본인을 향한 조롱은 무시로 일관했다. 대응할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다른 드래곤들이 리시안셔스를 견제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다른 인간에게 미쳤었던 놈이 신이 강제로 짝지은 여자에게 운명적으로 이끌릴까, 하는 의구심.

전쟁에 참전한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영광에 비해 초라해진 힘의 크기.

그를 집중적으로 경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과거의 영광 때문에 아직도 두려워 피하려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그런 리시안셔스가 이제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의 힘이 보기보다 약하지 않다는 걸 뜻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여전히 강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고.

생각해 보면 반려를 잃은 리시안셔스가 제대로 전투를 치르는 걸 보지 못했지 않은가.

듣기로는 반려를 조롱한 어느 드래곤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점점 강해지고 있어.』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조용해진 동족들을 향해 디에고가 힘주어 말했다.

『어쩌면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건 모든 드래곤들이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신께서는 아마 수많은 자식들 중에 유독 첫 번째 자녀에게 더욱 특별한 애정을 지니신 것 같으니.』

사실, 아케르트도 이제 막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나 반려가 생겨나던 시기에 리시안셔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과거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신기하기도 하고 건드려 보고 싶은 마음에 내려갔던 아케르트는 그 자리에서 리시안셔스에게 새로 생긴 반려를 발견했다.

리시안셔스의 허락하에 그 반려의 심장을 취하려고도 했었다. 결국은 리시안셔스가 저지했지만.

‘나도 리시안셔스의 힘을 너무 쉽게 봤었지.’

그러나 결국 도망쳐야 했던 쪽은 다름 아닌 아케르트였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동족들이 몇 안 남은 지금부터는 머리싸움일 거야.』

디에고가 묘한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갔다.

『일시적으로 힘을 합쳐 가장 위험한 적부터 제거하는 게 어때?』

‘근데 생각할수록 웃긴단 말이지.’

신에게 버림받아 드래곤으로 태어났으나 드래곤도 아닌 주제에.

반려도 없어서 이 전쟁과 상관없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자신들을 소집해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그 전략 나쁘지 않군.』

모두 망설이는 사이, 한 드래곤이 먼저 운을 뗐다.

『그 전략을 생각해 보긴 하겠다.』

『부디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

『단,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가 알아서 할 생각이다.』

『‘우리’?』

『미안한 말이지만 디에고 넌, 이 전쟁과 상관없지 않나.』

오예!

아케르트는 속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다니!

『드래곤의 자격을 박탈당한데다가, 반려도 없지.』

『…….』

『너는 리시안셔스에게 반려를 빼앗겼다 주장하지만 신이 주신 반려를 어떻게 빼앗는다는 건지도 이해가 안 가는군.』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날 것 그대로 표현하자면 ‘네가 제정신인지 의심된다’는 얘기였다.

아케르트만 그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아닌 듯했다.

『너의 오랜 집착도 여기서 끝내길 바란다.』

유일하게 디에고에게 일침을 가한 드래곤이 돌아설 때였다.

『잊었나 본데…….』

언제나 최악의 순간은 모두가 방심한 때에 찾아오곤 하는 법이었다.

디에고의 머리에서 회색 비늘과는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검은 뿔이 솟았다. 본능적인 불길함에 돌아섰던 드래곤이 다시 고개를 돌릴 때였다.

푹!

땅에서 고린도와 닮은 거대하고 검은 가시가 솟구쳐 드래곤의 몸통을 찔렀다.

『드래곤의 자격을 박탈당한 내게는.』

『크……, 헉……!』

『가장 강한 드래곤에게 있던 고린도가 있어.』

가장 강하다고 소문났던 드래곤을 이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동족들 사이에서 디에고는 야비한 도둑놈이자, 추방당한 가엾은 놈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탓에 방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에게는 다른 드래곤들도 쉽게 이길 수 없는 가장 최고의 무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좋아.』

관대한 척 굴고 있으나 협박이었다.

과거의 리시안셔스를 떠올리게 하는 고린도의 힘에 다른 드래곤들은 당연히 반발하지 못했다.

동족들의 침묵이 마음에 드는지, 디에고는 느른하게 웃었다.

그러나 아케르트는 오히려 저런 디에고의 모습을 보자 결심이 섰다.

‘원래 미친놈하고는 엮이면 안 되는 법이지.’

다행인지 고린도의 힘에 다친 드래곤은 아직 숨어 붙어 있는 듯했다.

『야.』

아케르트는 다른 동족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쓰러진 드래곤에게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인간화할 수 있지?』

『인간화는 왜…….』

『지금 그런 거 따질 때는 아니잖아! 말할 시간에 빨리 변해!』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디에고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거대한 드래곤들 앞에 섰다.

인간화인 채라 거대한 괴물들에게 작은 인간이 둘러싸인 거 같은 모양새였으나, 정작 두려움을 느끼는 건 디에고가 아니라 거대한 본체의 모습을 한 이들이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없는 거 같군. 정말 다행이야. 동족을 죽이지 않게 돼서.”

『…….』

“다들 나와 힘을 합친 것으로 여겨도 되겠지?”

그가 어설프게 찌른 드래곤이 아직 살아있는 것도 모르고 디에고는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진짜 돌아 버린 것인지, 어딘가 황당하고 두서없는 얘기였다.

그사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몸으로 땅이 온통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린 남자는 인간화하자 거의 피 웅덩이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아케르트는 디에고가 미친놈처럼 제 얘기를 늘어놓는 틈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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