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90화 (90/120)

<90화>

“그 섬에 가고 싶어요.”

신비한 신화가 있던, 어쩌면 신화 속의 나라라고 불러도 될 법한 섬의 존재를 확신한 스위트피는 결심이 섰다. 저 섬에 직접 가야겠다고.

“가서 뭘 하려고?”

하지만 한 줄기 희망을 본 스위트피와 다르게 리시안셔스는 부정적이었다.

“뭐라도 알아내야죠. 드래곤이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는 친숙한 신화가 전해지는 나라라면 그만큼 드래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조렐이 이 땅에 대해서 설명을 안 해 줬나?”

“조엘이에요.”

“그래, 조에. 그 수컷 인간 말이다.”

“조에, 가 아니라 ‘엘’이에요. 조엘이라고요.”

“알아들었으면 그만이지.”

“틀려요. 누가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면 좋아요?”

“알았다. 조엘, 그 녀석이…….”

“조엘은 그 신화에 관해서만 알려줬어요. 아주 오래전에 다른 나라에서 전해진 신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나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어요. 이 복원도도 겨우 구해 온 거예요. 다행히 리시안의 반응을 보니, 이 복원도가 그 섬과 꽤 닮아 있나 보네요.”

“그래, 내 기억과 흡사하군.”

리시안셔스는 선선히 수긍했다.

“스윗, 미리 말하마. 나는 그 섬에 가기를 반대하는 입장이야.”

“어째요?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어요?”

“……좋은 기억도 안 좋은 기억도 모두 있지.”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가서 무언가를 알아 올 수도 있잖아요.”

“불가능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확언이었다.

“그 땅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과거에 공국과 교류할 정도면 사람들도 살았을 테고…….”

“아주 먼 고대의 일이었을 테지.”

“그야 그렇지만…….”

“그 땅은 화마에 사로잡혀 새까맣게 타들어 갔어. 고향을 기억하는 동족들 사이에서는 ‘암흑의 땅’이라 불리지.”

“‘고향’이라고요……?”

“그래. 그 땅은 우리 드래곤들의 고향이다.”

리시안셔스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스위트피는 조각 같은 그의 말을 서로 연결해 볼 수 있었다.

드래곤들의 고향에 화마가 덮쳐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고…….

스위트피는 디에고가 훔친 리시안셔스의 고린도를 통해서 봤던 풍경 중 하나를 떠올렸다.

디에고와 리시안셔스는 전투를 벌였다. 아니, 사실상 거의 리시안셔스의 패배였다. 늘 그가 자리를 지키던 아름다운 숲은 불에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복원도를 보면 ‘암흑의 땅’이라 불리는 이 섬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고 했다.

고린도를 통해서 봤던 세상의 풍경에서는 햇빛 아래로 녹음이 우거진 울창한 나무가 만든 숲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온 땅이 새까맣게 불타서 남아 있는 것도 없을 거야. 그러니 가 봤자 네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다고 봐야지.”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피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인데, 말문이 막힌 얼굴을 보니 정답이었나 보다.

스위트피도 리시안셔스의 악몽이나 다름없는 장소에 굳이 그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지나갈 일이 있더라도 그를 위해서 피해 갔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해요.”

그러나 지금은 그 땅에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리시안은 가 봤자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계속 다른 땅을 떠돌아 봤자 구할 정보가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그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드래곤과 이 전쟁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다고요. 하지만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없었어요.”

“…….”

“그렇다면 이제까지 해 왔던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기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해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암흑의 땅에, 리시안은 미처 몰랐던 정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리시안셔스의 표정은 여전히 스위트피의 말에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스위트피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도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리시안셔스도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제법 논리적이라 상당히 놀랐어.”

“갈 거죠?”

“별로 가고 싶진 않지만.”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결론은, 제 의견에 따라 주겠다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리시안. 가는 길은 알고 있죠?”

“그때의 일 이후로 안 간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짚으면 가는 길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거다.”

안 간 지 오래되었다니…….

리시안셔스가 말하는 ‘그때의 일’이란 언제 적을 얘기하는 것일까.

아마도 인간들의 기준으로 고대 시대를 말하는 거 같은데.

‘리시안의 기억력을 믿어도 되겠지.’

그가 그만큼 이 땅에 안 간 지 까마득하게 오래되었다고 생각하자, 슬그머니 불안함이 밀려오긴 했다.

‘아니야, 리시안을 믿어보자.’

스위트피는 괜한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다른 얘기를 하나 더 꺼내기로 했다.

“리시안. 제게 계획이 하나 더 있는데. 들어볼래요?”

“어쩐지 듣고 싶지 않은데…….”

“들어봐요. 리시안이 손해 볼 얘기는 아니에요,”

그가 손해를 볼 일인지 아닌지는 들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우선 스위트피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스위트피의 ‘계획’을 들은 리시안셔스의 표정은, 그리 썩 좋지 않았다.

***

보름달이 뜬 기묘한 밤이었다.

드래곤은 개인 성향이 심해 한 마리 이상이 함께 있는 걸 보기 힘든 종족이었다. 만약 드래곤 두 마리를 한 번에 보게 된다면, 그건 그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섯 마리의 드래곤이 모여 있었다.

『디에고, 네 의견은 알겠다. 하지만…….』

『우리가 너를 위해서 리시안셔스를 쫓을 이유는 없지.』

반려를 둔 그들이 서로를 보자마자 죽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디에고 때문이었다.

드래곤으로 태어났으나, 신에 의해 드래곤의 자리에서 쫓겨난 자.

드래곤인 동시에 드래곤이 아닌 자.

가엾고도 한심한 제 동족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자신들을 한자리에 모은 디에고의 얘기는 아주 형편없었다.

다섯 마리의 드래곤이 힘을 합쳐서 리시안셔스를 죽이자고? 무엇을 위해?

이 전쟁의 룰은 동족의 반려를 죽이라는 것일 뿐, 특정 드래곤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이 콕 집어 리시안셔스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

설사 죽인다고 하더라도 다섯 마리의 드래곤 중 누가 리시안셔스와 연결된 반려의 심장을 취할 거란 말인가. 거기다가 리시안셔스는 신이 될 욕심이 없는 데다 신이 연결해 준 인간 반려를 지킬 의지는 더욱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인해 엉망이 된 드래곤이 어리석어 두 눈이 멀지 않은 이상에야 또다시 인간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상대를 굳이 다섯 마리의 드래곤이 서로 협업하며 그를 쫓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일인 셈이다.

『네 녀석도 참 지독하군.』

가만히 상황을 방관하던 한 드래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리시안셔스에게 집착하지? 넌 이미 필요한 것을 그 녀석에게서 앗아가지 않았나.』

디에고가 리시안셔스의 고린도를 빼앗은 건 알 만한 드래곤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 일로 인해 그들이 소중한 고향을 잃었으니 말이다.

인간에게 눈이 멀고, 잘못된 친우를 곁에 둔 리시안셔스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던 드래곤의 추락을 비웃으며 즐기던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에게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를 떠나, 이것 하나만큼은 모든 드래곤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했다.

바로 디에고는 다른 드래곤의 고린도를 훔친 명예롭지 못한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고린도를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리시안셔스가 유일하다고 봐야 했다. 그는 첫 번째 드래곤이자, 신의 첫 번째 아들이었으니까.

가장 특별한 드래곤이었다.

반면, 디에고는 가장 형편없게 태어난 신의 실패작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디에고를 유일하게 동족으로 인정해 준 것이 리시안셔스였다.

『리시안셔스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굳이 그 녀석의 편을 들며 네놈에게 역정을 낼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너의 못난 감정에 우리들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러니 은혜를 갚긴커녕, 배신을 한 디에고에게 우호적인 드래곤은 드물었다.

디에고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이들을 불러 모은 건 첫 번째로는, 혼자의 힘으로는 리시안셔스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잃어버렸던 과거의 힘을 점점 되찾고 있었다. 거기다가 스위트피의 전투력도 생각보다 강해진 상태였다.

『나중에 가면 리시안셔스를 상대하기 더욱 힘들어질 거야. 그는 힘을 점점 되찾고 있으니까. 또한, 그가 이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하나뿐인 반려를 지켜야 하는 건 너희뿐만이 아니거든.』

『리시안셔스는 삶에 미련이 없는 녀석이야. 또다시 인간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반려가 죽어도 상관없을 테고. 그 녀석도 본인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지.』

『과연 그럴까?』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아마 리시안셔스는 신이 되려고 할 거야.』

다른 드래곤들이 듣기에 디에고의 말은 터무니가 없었다. 과거의 리시안셔스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가 그만한 힘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무기력한 드래곤이 ‘신’이 될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빙성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디에고는 확신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마음을 먹게 되겠지. 그게 유일하게 반려를 지킬 수 있는 길이니까.』

반려를 끝까지 지키려면 최후까지 살아남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다른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뽑아야 한다.

『리시안셔스는 제 반려를 몹시 아끼고 있거든.』

그들이 정말 운명이라면, 아마 서로를 사랑하게 되겠지.

『하나만 묻지, 디에고.』

『얼마든지.』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디에고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리시안셔스를 싫어하는 거지? 그래도 한때는 리시안셔스가 자네를 각별하게 챙겼는데.』

아마 저 질문의 뒤편에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배은망덕하다는 원색적인 비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에고는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질문을 한 상대가 당황할 만한 얘기를 꺼냈다.

『그놈이 내 것을 빼앗아 갔거든.』

『다 가졌던 리시안셔스가 디에고, 네 놈의 것을? 그래 봤자 자네가 빼앗은 고린도의 가치만 하겠나.』

『감히 가치를 매길 수 없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투로 디에고가 말했다.

『그 녀석이 먼저 내 반려를 빼앗아 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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