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스위트피가 아는 리시안셔스는 언제나 침착한 편이었고,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었으며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받는 상황이 생겨도 항상 준비해 왔던 것처럼 곧바로 대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뒤로 물러서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은 스위트피에게는 무척 낯설다는 뜻이었다.
“이번 일도 미안하구나.”
심지어 미안하다니?
“뭐가 미안한데요?”
아까의 일을 되짚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리시안셔스가 제게 실수한 것은 없었다. 과거의 일을 포함해서 리시안셔스는 단 한 번도 스위트피에게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화를 냈을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어린애로만 대하는 게 섭섭해서 울컥했던 것뿐이지,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에게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진짜로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리시안셔스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지금만큼 그가 이해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무엇이 미안하냐는 질문에도 마치 자신이 그를 놀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길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놀린다고 저렇게까지 당황할 리시안이 아닌데…….’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한 번 더 물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알아야죠.”
결국 리시안셔스가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다.
물론 스위트피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잘못이었지만.
“……너를 만진 것.”
“리시안이 절 언제 만졌어요?”
“…….”
“설마 제가 잘 때 몰래 만졌어요?”
“날 대체 어떻게 보는 거니. 아무렴 내가 직접 키운 너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까…….”
이미 ‘만졌다’는 표현에서부터 파렴치한의 냄새가 나는데…….
어쨌거나 잘 때 몰래 만진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앞으로는 자신의 정신이 멀쩡히 깨어 있을 때 만지라고 소리칠 뻔했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이의 손길을 싫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와의 접촉이 좋았다. 가끔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누른다거나, 오래 걷게 되면 안아 준다거나, 혹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하는 사소한…….
‘잠깐만.’
리시안셔스가 어떠한 흑심도 없이 제게 뻗는 담백하고 사소한 손길을 떠올리던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추측이 스쳐 지나갔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만진 것에 대한 사과가 혹시…….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거 가지고 사과한 거예요? 고작 머리카락인데 대체 뭘 만졌다는 거예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만진 것은 만진 것이지. 신사는 숙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는 법이니까.”
“드래곤의 세계에도 신사와 숙녀가 나뉘어 있나요?”
“성별은 나뉘어 있지만, 인간처럼 수컷이 암컷을 배려해 줘야 한다는 개념은 없지.”
인간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물리적으로 더 강하게 태어나지만 드래곤의 세계는 성별에 따라 물리적인 힘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나름대로 인간들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노력하려고 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거 같았다.
“리시안은 인간이 아니니까 신사 흉내를 내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너는 인간이니, 너의 기준에 내가 맞춰야지.”
“아이참, 괜찮다니까요. 그런 이상한 걱정 하지 말고 혹시라도 절 만지고 싶어질 때는 언제든지 다가와요. 예를 들면 포옹이라든가, 혹은……!”
리시안셔스는 나름 드래곤의 세계에서는 인간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키운 이 아이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게 없었지만…….
‘저 표정은 뭐지.’
영악한 면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순수한 편인 자신의 꼬마 반려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뭐랄까…….
“불순하게 느껴진다면 내 착각이겠지, 스윗?”
“불순하다니요!”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는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될 위험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설마.’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한 생각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어 작게 웃고 말았다. 아무렴 이 아이가 자신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
“잊고 있는 거 같은데, 저는 리시안을 좋아해요.”
……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리시안이 절 만진다고 해도 저는 절대 기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
“대체 내 꼬마 반려가 언제 이렇게 음흉해졌지?”
“말이 참 심하네요. 좋아하는 사람과 닿고 싶어 하는 게 왜 음흉하다는 거예요? 아, 물론 리시안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스위트피의 주장은 타당했다. 문제는 이 꼬마가 좋아하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이 문제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할까.’
좋게 타일러서는 말을 들을 거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뻔뻔한 척 자신을 올려다보는 맑은 녹안을 보자니, 도저히 스위트피를 상처 입힐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고, 네가 날 좋아한다 해도 마찬가지야.”
은근슬쩍 마음을 표현해오는 스위트피에게 어떠한 대꾸를 해 주는 대신, 리시안셔스는 하던 얘기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다 큰 숙녀의 몸에는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
“하지만 리시안의 눈에 저는 여전히 꼬마로 보일 거 아니에요.”
“넌 영원히 내 귀여운 꼬마 반려일 테지만, 어쨌든 몸은 다 자랐으니 자제해야지.”
“리시안이 보기에도 제가 많이 자랐어요?”
“물론. 너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니까.”
“제가 성숙한 여자처럼 느껴져요?”
“조금 그런 것…….”
‘조금 그런 것 같구나’라는 말은 차마 완성하지 못했다. 리시안셔스는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스위트피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고 말았다.
“흐음……. 그렇구나. 영원한 꼬마 반려일 거라더니. 사실 리시안이 절 그렇게 볼 줄은 몰랐네요.”
잠시 잊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꽤 영악하고 은근히 잔꾀를 부릴 줄 안다는 것을.
“그래서 드래곤이면서도 신사를 운운하면서 내 몸에 손대지 않겠다고 했구나. 내가 성숙한 여자로 느껴져서. 으음, 그렇구나…….”
“제발 그 입을 다물어 주겠니?”
조잘대는 스위트피의 수다가 그립기는 했으나, 지금은 마음 같아선 저 얄미운 입을 막고 싶었다.
스위트피는 엄청난 선물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저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양심상 그런 거짓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내가 파렴치한이 맞긴 하군.’
아무리 외형은 다 자란 성인이라지만, 그래도 제가 키운 아이였다. 거기다가 얼마만큼 살아있는 건지 정확한 햇수조차 세기 어려운 자신과 스위트피의 나이 차이는 어떻고 말인가.
굳이 스위트피가 아니더라도 리시안셔스는 그 누구에게도 이성적인 감정을 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길 바란다고 하더라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설렘이나 욕구는 오래전에 한 여자가 죄다 앗아갔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자신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스위트피가 성숙한 여자로 자라난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저 마냥 작을 줄 알았던 아이가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 와닿은 거뿐인데, 그게 굳이 접촉을 피할 이유가 되나? 자신의 눈에 스위트피는 영원한 어린아이일 테고, 끌어안아도 아무 생각도 안 들 텐데.
……그래야만 하고.
“걱정 말아요, 리시안. 부끄럽지 않게 그 마음은 제가 모르는 척해 줄게요.”
“스윗, 나는…….”
행여 자신을 좋아한다는 스위트피가 큰 상처를 받게 되기 전에 오해를 풀어야 할 거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하려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다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보다, 이 가방 안에 제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스위트피는 뒤늦게야 조엘이 준 낡은 두루마리 양피지를 꺼냈다. 리본을 풀고 양피지를 펼치자 그 안에 그려진 둥근 섬의 지도가 보였다. 양피지의 제일 끝에는 ‘드래곤과 인간이 어울려 살았던 신화 속 섬의 복원도’라고 적혀 있었다.
복원도를 본 순간, 리시안셔스와 스위트피의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둘 다 말없이 복원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 모양의 섬이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소규모의 도시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실제 지도도 아니고, 들은 대로 그려 본 복원도일 뿐이라 실제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나라가 진짜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복원도를 들여다보는 스위트피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생겨났다. 이 엉성한 복원도를 보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손에서 양피지를 가져갔다.
“스윗.”
“네.”
“이건 어디서 구한 거니?”
“조엘이 줬어요.”
“조엘이 누구지?”
“……오늘 아침에 절 찾아온 남자요.”
“아아, 내가 디에고와 전투를 벌이던 중 네가 붙어 있던 그 수컷 말이구나.”
리시안셔스가 무심한 면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바로 오늘 낮에 본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을 못 하다니.
스위트피는 괜히 리시안셔스를 대신해서 조엘에게 미안해졌다.
“그런데, 그자가 이걸 너에게 왜 줬을까.”
“제가 부탁했어요.”
“부탁?”
“조엘에게 우연히 어떤 신화에 대해 들었어요. 드래곤에 관한 신화였는데, 지금 우리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아서 그 신화가 전해진 나라가 어딘지 알고 싶다고 했거든요.”
“네가 들은 신화가 무엇이었는데?”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를 사랑해서 반려가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리시안셔스의 눈길이 천천히 스위트피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신에 의해서 억지로 반려가 된 건 아니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운명의 반려로 선택한 건데, 하여튼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드래곤과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는 신화는 흔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네……?”
“그래서 이다음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고 있는 거야.”
아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내가 말실수를 했나.’
리시안셔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거의 연인이 생각났을지도 모르지.’
그 연인이 세레티인지, 에리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리시안셔스의 과거 연인에 대한 추측이나 생각을 뒤로 밀어 놓을 때였다. 스위트피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차갑게 가라앉은 듯한 리시안셔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섬에 직접 가 보려고 해요.”
“실존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섬을 어떻게 갈 생각이지?”
“그 섬은 실제로 존재할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지 묻고 싶구나.”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땅이라면, 리시안셔스가 이렇게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는 것은 직접 정보를 내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동요를 드러냈고, 스위트피는 그 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