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88화 (88/120)

<88화>

“그리고 네가 입는 옷과 신발도 내가 사 줬지.”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너의 교육을 도운 것은 누구지?”

학교를 다니지 못한 스위트피에게 서점에서 산 책들로 기본적인 교육을 해준 것은 리시안셔스였다.

어딘가에 기대어 앉아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기를 좋아하기만 하던 드래곤은 생각보다 똑똑했고, 인간들이 배우는 수학이라든지 과학의 원리를 생각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문학은 그의 감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지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가 스위트피에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기본적인 교육을 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물며 너의 머리카락을 매번 잘라 주는 것도 나의 일이었지.”

“하지만 저도 가끔 리시안셔스의 머리를 묶어 주고는 했는걸요!”

“그건 네가 원해서 한 일이잖니.”

“제 머리카락을 잘라 준 건 억지로 한 일이었다는 말이에요?”

“네가 원하는 것 같기에.”

리시안셔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한 투로 말했다.

그가 자신을 작정하고 약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스위트피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사실이니까!

“할 말이 없지?”

“…….”

“봐봐, 난 너에게 이렇게나 많은 것을 해 주었잖니.”

“…….”

“그러니, 스윗. 너는 은혜를 갚을 때까지 내 곁에 있을 의무가 있어.”

어차피 리시안셔스를 떠날 생각은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리시안셔스가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그와의 말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니까, 은혜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리시안을 떠나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스위트피를 보며 잔잔하게 웃던 리시안셔스의 입가가 굳었다.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리시안은 저를 귀찮아하잖아요.”

“…….”

“제가 다른 드래곤의 손에 죽을 뻔했을 때도 귀찮아서 내버려 두고.”

드래곤의 반려로서 문양이 나타났던 날, 적색 비늘을 가진 아케르트가 스위트피를 죽이려 했었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죽게 내버려 두려 했다. 반려라는 것을 가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스위트피의 간절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구해 주었지만.

“제가 마고 부인에 의해서 창고에 갇혀 있을 때도, 제 목소리 진작에 들었죠? 그런데도 귀찮아서 구하러 오지 않으려고 했잖아요.”

갇혀 있던 스위트피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계속 들렸으나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도 결국에는 외면하지 못하고 구하러 가긴 했지만.

“그리고 아무 섬마을에나 절 떨궈 내고 가려고 했잖아요.”

마을을 불태우고 스위트피를 데리고 떠난 리시안셔스는 그대로 아이를 내버려 두고 가려고 했다. 드래곤들의 전쟁에 끼어봤자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이 반려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 더욱 컸다. 있어 봤자 귀찮은 일에만 휘말릴 테니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아이를 매정하게 버리지 못한 채 이날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약속대로 리시안을 즐겁게 해 주지도 못하다니.”

스위트피는 과장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대로 리시안의 곁에 계속 있어도 저는 별로 은혜를 갚지 못할 거예요. 계속 리시안의 보호만 받고 귀찮게 굴기만 하겠죠.”

“…….”

“그럴 바에는 그냥 지금이라도 리시안을 위해서 제가 떠나는 게……!”

“미안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말을 하는 도중에 자르며 나온 말이라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방금 리시안이 내게 미안하다고 한 거 같은데…….’

내가 맞게 들은 건가?

스위트피가 굳은 얼굴로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들은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의 일…….”

“…….”

“네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

스위트피는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 봤다. 리시안셔스와의 말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아서 약 올리듯이 한 말인데…….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있어.”

“자, 잠깐만요. 뭘 후회하는 거예요? 그때의 저를 진작에 구해 주지 않은 거요? 아니면 절 귀찮아했던 거요?”

“둘 다.”

진지하게 미안해하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어두워지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분명 잘못한 쪽은 자신인데, 왜 리시안셔스가 굽히는 걸까.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귀찮게만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꼬마애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보호를 요청하는데 거절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구해 줬고 곁에 있어 줬다. 언제나.

하지만 스위트피의 생각이 어떻건 리시안셔스는 종종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는 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아찔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처음에는 이 꼬마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거두지 않았더라면.

그럼 어땠을까, 라는 가정부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인간들이 말하는 ‘아찔하다’는 표현이 이런 기분일 때 쓰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고는 했다.

스위트피가 제 인생에 없는 것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한없이 무료하고 고독한 시간을 감내했겠지. 살아도 죽어 있는 것처럼. 작은 꼬마에서 이제는 어엿한 숙녀로 자란 스위트피가 더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후회도 뒤따르고는 했다.

제게 소중한 존재가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구해 줄걸.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지 않게, 눈이 부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고통과 두려움에서 빨리 해방되게.

어차피 끝까지 하지도 못할 외면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 시각에 빨리 갔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지난 날이고, 걸어온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면 그는 이미 스위트피를 만나기 이전에 몇 번이고 대가를 치러서라도 시간을 되돌렸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가끔 네가 지나치게 말이 많다고 생각되는 때도 있긴 하지만…….”

“제가 수다스러운 건 사실이니까요. 이제 어른이니까 시끄러운 건 고쳐보도록 할게요.”

“아니, 고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하려던 말은…….”

“…….”

“네가 귀찮지 않다는 뜻이다.”

그가 한숨처럼 뱉어낸 진심이었다.

“속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은혜 갚으라던 말은 핑계였어.”

“…….”

“스윗, 너는…….”

그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조금 서글퍼 보이는 미소였다.

“내 인생 끝자락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단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꼭 마지막 인사 같잖아요!”

마치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인사라니. 황당한 오해구나. 그러니까, 앞으로도 엉뚱한 데로 새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는 소리였는데.”

“앞으로도 옆에 있을 거예요! 당연히 리시안의 옆에 있을 건데, 그렇게 아련하게 말하니까 마지막 작별 인사처럼 느껴진다고요!”

“걱정 마, 스윗. 네가 죽기 직전엔 안 죽을 테니까.”

“전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오래오래 살 거예요. 리시안과 같이!”

“그래, 그래. 나는 네가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널 지켜 주겠지.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으니까.”

이제야 진지해졌던 분위기가 겨우 풀렸다.

“그리고, 제가 아까 했던 말은 잊어요.”

“너를 귀찮아했던 나를 잔뜩 원망하는 듯하던 그 말?”

“원망하지 않았어요! 저는…….”

“…….”

“리시안이 저를 구해 준 것에 항상 감사해요. 아까 그 말은, 진담이 아니었어요.”

그건 물론 리시안셔스도 알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세 번의 외면보다 단 한 번의 손길을 더 크게 기억하는 아이니까.

“하여튼 말없이 먼저 돌아온 건 죄송해요. 어차피 침실에 있을 거고, 리시안셔스는 절 금방 찾아낼 거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요.”

“디에고와 사라진 널 찾는 데 꽤 시간이 필요하더군.”

“윽…….”

상당히 양심이 아팠던 스위트피는 입을 꾹 다물고 반성하는 척을 했다. 어차피 진지하게 스위트피를 나무랄 생각도 아니었던 리시안셔스는 작게 웃고는 대화의 주제를 넘겼다.

“그보다, 그 가방에는 뭐가 들어있길래 그리 소중하게 여기는 거지?”

“안 열어봤어요?”

“나는 주인의 허락 없이 가방을 열어보는 몰상식한 드래곤이 아니야.”

“드래곤은 인간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는데도, 예의를 지켜 주는 거예요?”

“너는 나의 반려니까.”

리시안셔스에게 보여 주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언제부터인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자신의 반려로 인정하는 말을 꽤 자연스럽게 하기 시작했다. ‘꼬마 반려님’처럼 장난스러운 호칭과는 주는 느낌이 달랐다. 괜히 가슴 속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속상하기도 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반려’라 부르지만, 그건 서로 묶여있는 관계를 뜻하는 것일 뿐, 그가 자의로 자신을 반려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까.

“또 꼬마 반려라고 놀리려고 그러는 거죠?”

스위트피가 일부러 새초롬한 표정을 쏘아붙이자, 리시안셔스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스위트피의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커가는 게 아쉬워서 조금만 덜 자라길 바라던 때도 있었지만.”

“…….”

“이제는 꼬마라고 부르기에는 다 크긴 했지.”

스위트피가 좋아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다 돌연 스위트피와 눈을 맞춘 리시안셔스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떼어 내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리시안?”

대체 왜 저러는 거람? 항상 자신에게는 어른이었던 리시안셔스였는데, 갑자기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놀란 듯한 모습을 보이는 리시안셔스는 어딘가 어수룩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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