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87화 (87/120)

<87화>

그때 애나는 디에고에게서 도망치려는 자신의 계획을 알고는 도망가지 못하게 설득하려고 했다. 디에고의 분노가 공국에 미치지 않도록.

그건 나라를 위한 일이자 본인의 안위를 위해 스위트피에게 희생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위트피는 애나에게 디에고와 싸울 생각도 안 하면서 타인을 희생시키려 한다며 비난했지만, 사실은 애나의 입장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어요. 그때 우리가 말다툼을 하기는 했지만 애나의 입장은 이해하고 있고…….”

“하필이면 디에고 님…….”

“…….”

“아니지. 디에고가 나타날 줄은 몰랐어. 제가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어요. 애나가 의도적으로 디에고를 부른 게 아니라는 건.”

“오해하실까 봐 이 부분은 계속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저 때문에 위험해지신 것에도 사죄드리고 싶었고…….”

딱히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때의 일은 정말로 애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이 애나와 언성을 높이며 도망칠 계획을 언급하고 있을 때, 하필이면 디에고가 그 얘기를 엿듣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로 인해 자신은 성에서 추락해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긴 했으나, 그건 다 재수가 없었던 탓이지, 애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리고 뭣보다…….

“결과적으로는 잘 됐잖아요.”

추락하여 죽을 뻔했으나, 죽지 않았다.

스위트피가 도망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디에고의 분노가 공국인들에게 향할 뻔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때마침 리시안셔스가 나타났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과론적인 분인 줄은 몰랐네요.”

“전 그냥 제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요. 과정은 나빴어도 결과가 좋으면 결과를 중시하고, 결과가 나빠도 동기가 좋았으면 그 과정을 더 중요시하죠. 그편이 내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고 편해지는 길이잖아요.”

“…….”

“그러니까, 애나. 적어도 제 일에 관해서는 마음 불편해하지 말아요.”

전 괜찮으니까.

스위트피의 마지막 말에 애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디에고가 다른 인간들을 잡아먹게 도운 일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건 그들 내부에서 해결할 일이지, 스위트피가 따질 일은 아니었다.

애나와 대화를 끝마친 스위트피는 그 뒤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계속 여기 있어봤자, 사람들만 불편해할 것 같은데.’

스위트피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날갯짓하며 날아오르는 제 드래곤을 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반려님, 어디로 가십니까.”

벽돌을 다시 쌓고 있던 한 남자가 스위트피가 불편한 다리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는 여기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이만 올라가 보려고요.”

사람들도 제게 전하고 싶어 했다는 감사 인사는 다 전한 것 같고, 계속 이곳에 있어 봤자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만 살필 것 같았다.

남자는 스위트피의 다리를 힐끔대다가 모셔다드리겠다고 했지만 스위트피는 극구 사양하며 홀로 누워있다 눈을 떴던 방으로 향했다. 리시안도 바빠 보이니,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온 스위트피는 막 눈을 떴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저쪽 벽이 뜯겨져 있었구나.’

드래곤 전투의 영향을 덜 받아 그나마 멀쩡한 건물이지만 침실 구석의 벽 한쪽이 살짝 뜯겨져 있었다. 이게 그나마 멀쩡한 방이었다는 말이지. 보수 공사가 아니라 거의 새로 건축하는 격이었다.

스위트피는 부디 마을 사람들이 공사를 무사히 끝내고 평온했던 일상을 되찾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을 굳이 신께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성을 재건축하고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앞으로도 나라를 지키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결정하고 행동할지에 달려 있었다.

즉,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린 문제였다.

비록 이 나라가 무너지게 된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에 의해서였지만 그 거대한 존재를 받아들이고 굴종한 것 또한 인간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일어나는 것도 인간들의 몫이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의 의지에 변해 가는 것이 옳은 일일 테니 말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의 공사도 곧 끝나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꼭 중요한 무언가를 빠뜨린 것처럼…….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위트피는 묘하게 하나를 빠뜨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어차피 자신은 공사를 돕지도 않았으니 그 과정에서 실수한 것도 없고, 마땅히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물건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물건?’

스위트피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까먹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맞다, 조엘이 준 게 있었지!’

디에고와 리시안셔스가 전투를 벌일 때 조엘이 다급하게 줬던 것이 있었다. 무엇인지는 펼쳐보지도 않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과 반려를 맺은 드래곤의 신화가 전해지는 나라에 대한 흔적이었다. 중요한 자료인데 쓰러져 있다가 이제 막 일어난 탓에 잊고 있었다.

‘내 가방이 어디 있더라…….’

다행히 쓰러지기 직전까지 메고 있던 가방은 스위트피가 누워 있던 침실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가방을 연 스위트피가 그 안에 들어 있던 조엘이 준 두루마리 종이를 꺼낼 때였다.

『스윗!』

본체의 모습으로 인간들의 일을 도와주던 리시안셔스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윗……. 스위트피! 스위트피 로렌!』

그것도 아주 다급하게…….

침실의 창문을 연 스위트피는 마음으로 리시안셔스에게 응답했다.

‘저 여기에 있어요, 리시안.’

광룡처럼 성 주변을 배회하며 스위트피만 부르던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목소리를 듣고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스위트피와 눈이 마주친 리시안셔스는 하던 일을 모두 뒤로 미룬 채 날아와 벽 하나를 다 차지한 창문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방에 들어왔다.

“다른 데로 가면 간다고 말을……!”

“…….”

“……했어야지.”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려던 리시안셔스가 다시 목소리를 줄였다.

“화를 낸 게 아니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리시안셔스는 화를 낸 게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상 화를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스위트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리시안셔스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네가 사라져서…….”

스위트피는 어째서 리시안셔스의 사과가 이상하다 느껴지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화를 낼 만했으니까.’

다시 재회했을 때, 리시안셔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대해 주었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리시안셔스에게 상처를 줬지만, 리시안셔스가 감싸준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았던 일을 덮어 둔다고 해서 그 상처와 충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은 인간들의 일을 돕는 리시안셔스를 배려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리시안셔스의 기준에서는 자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에 떠났을 때는 그의 눈앞에서 디에고와 함께 떠났다면, 이번에는 그가 없는 새에 사라진 걸까 봐……. 그러니까 굳이 사과를 해야 하는 상대를 정하자면 그에게 이런 불안함을 심어 준 자신이었다.

“리시안. 저는 다시는 리시안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정말 반성 많이 했어요.”

“나를 떠났다고 네가 반성할 이유는 없지만, 디에고를 따라나선 건 반성할 일이었지. 하필 따라나서도 그 미친 자식을 따라가다니.”

“그럼……, 디에고만 아니면 리시안을 떠나도 돼요?”

“안 돼.”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어본 거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살벌해졌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위험한 선택을 해서 화가 난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그냥 그를 떠난 것 자체에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 살려 달라고 매달린 것은 너였어. 인간의 기준으로는 오래된 일이라 까먹은 거 같지만.”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도 기억하겠지. 살고 싶게 해줄 테니 지켜 달라고 부탁한 것도 너라는 걸.”

“그것도 물론 기억해요.”

“우리는 약속을 한 거야. 약속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깨트려서는 안 되는 것이고. 나는 널 보호해 줬지만 아직 인생이 재미없으니, 내가 좀 더 살고 싶어지도록 노력해야지.”

“나는 리시안이 나름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살기 싫어요?”

이상하다. 이제 리시안이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리시안셔스는 생각보다 웃는 날이 많았다. 스위트피에게 먼저 장난을 칠 때도 있었고, 여전히 귀찮은 것은 싫어하지만 그래도 활기찬 스위트피를 따라나서는 일을 전보다는 덜 성가셔 했다.

“……비단 약속의 문제뿐만이 아니지. 넌 내게 빚을 졌잖아?”

“빚이라니요……?”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물음에 답을 하기는커녕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것도 평소 그답지 않게 다소 치사한 얘기였다.

“스윗. 너의 취미 중 하나가 각 지역에 있는 최고급 숙소에 머무는 일이었지, 아마?”

“그건……!”

사치 부리는 여자처럼 몰아가는 발언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양심이 있어 그럴 수는 없었다. 다른 드래곤들의 추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던 지라 스위트피는 마땅한 취미 생활을 가질 수 없었다.

물건을 수집한다든가, 그림을 그리는 등의 취미는 많은 재료를 필요로 했고, 정착하지 못하는 삶에 많은 물건을 지고 다니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스위트피가 그런 생활 중에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머물게 된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든가, 그 지역의 가장 비싼 최고급 숙소에서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것뿐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쥐나 벌레가 나오는 숙소도 개의치 않아 하니, 가장 최고가를 자랑하는 숙소에서 머무는 건 모두 스위트피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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