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나름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행동이니 고맙기는 하지만…….
드래곤들의 전투에서 무리하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져 이제야 막 일어난 참인데, 지나치게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저 종알대는 목소리가 없어 그동안 허전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하루쯤은 조용히 휴식을 취해도 되련만.
자신의 꼬마 반려는 어떤 일을 겪었건, 조용히 입을 다무는 법이 없었다.
‘말을 많이 못 하던 시절이라도 있었던 건가.’
학대받고 자라던 아이였던지라 가능성이 크긴 했다. 어릴 적에 하고 싶은 말을 많이 못 해 지금 이렇게 수다스럽게 자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만큼은 스위트피가 몸을 생각해서라도 가만히 휴식을 취해 주길 바랐다.
“저도 보수 공사를 도울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괘씸한 꼬마는 제게 걱정을 잔뜩 끼쳐놓고서 휴식은커녕, 또 돌아다닐 궁리를 하고 있었다. 스위트피가 옛날부터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던 아이라는 것을 떠올린 리시안셔스는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안 돼.”
당연히 반대의 말이 떨어지자 스위트피가 대놓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정말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넌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 막 일어났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성의 보수 공사를 돕겠다고?”
“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괜찮은지 아닌지는 상태를 계속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겠지.”
“그럼 계속 침대 위에만 있어야 하는 거예요?”
“스윗-.”
스위트피는 잠시 잊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부탁하면 대체로 뭐든 다 들어주는 다정한 드래곤이지만, 자신의 안전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하고 영악하게 굴 줄 알던 내 꼬마는 어디로 갔지?”
여기서 조금만 말을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훈계가 돌아올 것을 예상한 스위트피는 조잘대던 아까와는 다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가씨가 쓰러진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데, 공사를 도와준다고 하셔도 저희가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조엘도 리시안셔스의 편인 듯했다.
“알았어요…….”
스위트피도 선선히 수긍했다. 정말로 자신의 몸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물어본 것일 뿐, 모두가 반대하는데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특히나 조엘의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이 나서는 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몸 상태를 떠나서 드래곤의 반려인 자신이 직접적인 노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워할 테고, 또 제 다리도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괜히 불편한 왼쪽 무릎을 쓰다듬는 스위트피의 행동에 리시안셔스가 바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프냐고 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웃으며 답한 스위트피는 오늘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그때, 조엘이 조심스럽게 스위트피에게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공사를 돕는 건 저도 반대긴 하지만, 가볍게 바람도 쐴 겸 나가 사람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떻습니까?”
“바쁘게 일하는데 제가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스위트피가 성안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이라고는 거의 조엘이 유일했다. 그나마 말을 가끔 섞는 사람도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던 시녀, 애나가 전부였다.
공사를 돕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인사를 나누러 나가기엔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조엘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사람들이……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합니다.”
“저를요? 왜…….”
“드래곤의 반려께서 보여 주신 기적 때문이죠.”
‘기적’이라는 말에 스위트피는 그대로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기적?
그 단어를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적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지.”
“…….”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에게 주는 힘이니 기적이 맞다고도 할 수 있고.”
리시안셔스와 함께 사람들을 구하고 디에고를 무찌른 힘이니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적’이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으며 그들의 눈에는 마녀의 요술로도, 기적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민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까까지는 밖으로 나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냥 방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애초에 스위트피는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아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향할 사람들의 시선이 벌써부터 부담스러웠다.
“나가서 얼굴만 보여 주십시오. 모두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엘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위트피는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리시안셔스를 바라봤다.
“잘 되었군.”
“리시안…….”
“그리 나가고 싶어 했으니, 저 수컷 인간이 말한 대로 사람들에게 얼굴이나 보여 주러 나가도록 하지.”
“…….”
“기적을 행한 이 얼굴을 보여 주러 말이야.”
그러나 리시안셔스도 스위트피를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가볍게 뺨을 콕 찌른 리시안셔스의 얄미운 얼굴을 노려보았으나, 자신이 판 무덤에 스스로 빠진 꼴이었다. 처음부터 나가고 싶다고 한 것은 스위트피였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결국 스위트피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앞에는 조엘, 뒤에는 리시안셔스의 사이에 낀 채 밖으로 나섰다.
성의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말이 좋아 보수 공사지, 수많은 성의 잔해를 치우는 일이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듯했다.
스위트피는 뒤를 지키고 있는 리시안셔스 탓에 도망치지도 못한 채 최대한 조엘의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한 걸음 옮기면 옮길수록 사람들과 하나둘씩 눈이 마주쳤고, 스위트피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그대로 하던 일을 멈춘 채 제 자리에 멈춰 섰다.
하던 일을 멈춘 사람들이 어느 한 곳을 응시하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옮기던 짐을 내려놓은 채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조엘은 조심스럽게 옆으로 비켜서며, 뒤에 숨어 있던 스위트피가 드러났다.
그때, 제일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스위트피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사 중이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자, 스위트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전에 그들이 무릎을 꿇었을 때는, 자신보다는 리시안셔스를 향한 것인데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터라 지금처럼 부끄럽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데, 뒤에 서 있던 리시안셔스에 의해 막혀 더는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
“스윗, 네가 저들을 구한 것은 사실이니.”
리시안셔스는 마치 격려라도 하듯이 스위트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그 말은 맞는 말인 듯했다. 인간인 스위트피가 자신을 우러러보고 칭송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몇 시간 만에 익숙해졌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민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있는 건 미안하고 민망한 일이었다. 스위트피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일을 도와주려 했지만 리시안셔스가 말리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만류하는 탓에 스위트피는 그늘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대신 그들을 신경 쓰는 스위트피를 대신해서 리시안셔스가 인간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드래곤의 몸으로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벽돌을 쌓는 일을 도왔다. 그는 귀찮은 티를 내며 대놓고 싫다 했지만, 스위트피가 부탁해서 인간들을 돕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못해 하는 것치고는 성실했다.
“반려님.”
그늘 밑에서 턱을 괴고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인간들과 어울리고 있는 제 드래곤을 지켜보고 있던 스위트피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 제게 가까이 다가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자신을 부른 이는 다름 아닌 이제까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던 시녀였다.
“디에고는 아니더라도, 리시안셔스 님의 반려는 맞으니 ‘반려 님’이라 불러도 되죠?”
스위트피가 디에고의 ‘반려’로 불리는 걸 싫어하던 것을 의식하고서 묻는 말이었다. 스위트피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디에고를 쫓아낸 이후로…….”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애나였다.
“아가씨가 깨어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감사하다는 말이면 사양할게요. 이미 많이 들었거든요.”
“당연히 감사의 인사도 전하려고 했는데……. 정 그러시다면 그 말은 생략해야겠네요.”
스위트피가 장난 반 진담 반을 섞어 얘기하자, 애나도 장난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동안 사무적으로만 대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이게 진짜 애나의 성격이었겠지.’
언제 드래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데, 그 드래곤이 애지중지하는 반려와 친밀한 관계를 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무적으로만 대한다면 딱 그 정도 선에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쓸데없이 친밀한 사이가 된다면 언제 선을 넘어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감사하다는 말은 생략하더라도, 죄송하다는 말씀은 전해도 되겠죠.”
“…….”
“그때의 일은 죄송했습니다.”
“애나가 제게 왜…….”
애나가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이유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윽고 일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