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에리카 님은 아름다우시고 잘 웃어주시고, 말씀도 너무 잘하시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꽃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모습 봤어?”
“그분은 완벽하시지.”
“반면에 세레티 님은 늘 베일을 써서 얼굴도 가리시고…….”
“내가 들었는데, 베일 속에 있는 얼굴이 그렇게 흉측하게 생겼대.”
“그런데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아름답지도 않은 분이 어떻게 신의 첫 번째라고 할 수가 있어? 신께서 첫 번째 인간을 그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누는 대화야말로 저들의 진짜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레티에게는 더욱 큰 상처였다.
저들이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언어는 세레티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에리카 님이 진짜 첫 번째인데, 세레티 님이 거짓말하는 거라는 얘기도 있어.”
차라리 진짜 그런 거면 좋을 텐데. 두 번째로 태어났던 에리카가 사실 진짜 ‘세레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레티는 오늘 리시안셔스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두 번째로 떠올리는 지금은, 그가 했었던 말이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 멍청이 눈에 네가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나도 널 똑같이 볼 거라 생각하지 마.」
틀렸어요, 리시안셔스.
나는 그 누가 봐도 아름답지 않을 거예요. 인간들의 미의 기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당신이 봐도 난 추할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세상 모두와도 다른 불완전한 존재니까.
비록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위해 다른 인간들을 해쳤고, 그들에게 리시안셔스는 괴물이었겠지만…….
자신에게 리시안셔스는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존재였다.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눈가가 점점 붉어지자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말에 스위트피가 상처를 받아 눈물을 흘리는 거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본인의 말대로,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에게 크게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다정한 점이 스위트피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앞으로 다시는 리시안을 떠나지 않을게요.”
스위트피는 커다란 녹안에 맺혀 있다 흘러내리는 눈물 두어 방울을 옷깃으로 닦아 낸 후에 맹세하듯이 먼저 약속했다.
“그리고 뭐든 리시안과 상의할게요.”
리시안셔스의 커다란 손을 붙잡은 스위트피가 벌게진 눈으로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봤다.
‘이 꼬마를 벌주려고 했었는데…….’
괘씸했고, 이해할 수 없었고, 걱정되기도 하면서 화도 났었다. 어차피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아직 제 눈에는 작고 어린 인간 아이라 건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항상 당돌한 아이지만 자신이 조금만 위압감을 풍겨도 감당하기 힘들어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막상 만나면 이 작고 연약한 존재에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겁을 주게 될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만난 순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였다. 걱정되고 화났던 마음이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스위트피를 본 순간, 그리고 기껏 구해 놨더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는커녕 다른 인간들을 구하던 순간에도,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고 지상으로 내려와 맑은 녹안과 마주한 순간까지.
스위트피는 자신의 분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 작은 꼬마가 뭐라고.’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꼬마가…….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손을 대면 쉽게 으스러질 것 같은 스위트피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꼬마가 언제 이렇게 커졌지?
분명 제게는 항상 작고 조그마한 아이일 뿐이었는데.
그사이 더 자란 것일까.
이 아이가 몇 살이건 상관없이 그동안 늘 리시안셔스의 눈에는 마냥 어린아이로 보였었다. 처음 만났던 시절의 어린아이였을 때도. 자라나서 점점 전에 입던 옷이 안 맞아 한참 버리던 시절에도. 그리고 성년이 된 날에도.
자신의 눈에는 항상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그런데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다시 재회한 순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길렀던 꼬마가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리시안……?”
그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순간, 리시안셔스는 당혹스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게는 익숙하던 스위트피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고,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조엘.”
조엘이 옷에 흙먼지가 묻은 채로 들어오더니, 반가워하는 스위트피는 뒤로하고 리시안셔스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리시안셔스가 디에고를 물리쳐 줬지만, 오랫동안 드래곤에게 억압당하며 살아온 탓일까. 그는 리시안셔스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나 말고 리시안셔스에게 볼 일이 있는 거였어요?”
드래곤의 앞이라 약간 긴장한 듯이 보이는 조엘을 본 스위트피가 분위기를 풀어 주려고 일부러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아가씨를 보러 온 게 맞습니다. 깨어났다니,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다행인 거 맞죠? 늘 느끼는 거지만 조엘은 표정이 없는 편이라 진심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제가 표정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감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조엘이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물론 알고 있어요. 조엘은 공국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도 가지고 있잖아요, 또, 이렇게 제가 걱정되어서 찾아와 주기도 했고요. 아, 맞다. 그리고 드래곤을 무서워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죠?”
놀리는 듯한 스위트피의 표정과 말투는 꽤나 얄밉기까지 했다. 하지만 덕분에 조엘은 리시안셔스의 앞이라 바짝 굳어 있던 태도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해요?”
“정말 운이 좋게도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드래곤들이 치고받고 싸우느라 건물이 붕괴되고, 거대한 성벽을 지탱하던 사람 몸통만 한 벽돌이 작은 돌멩이처럼 날아다녔다. 그런 난리 통에 사망자는 없었다니, 감히 기적이라 불러도 될 만한 일이었다.
“크게 다친 사람은요?”
“지하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사람들의 건강이 안 좋긴 하지만, 그날 다친 건 아닙니다. 경미한 부상은 있어도 큰 부상을 입은 자 또한 없습니다.”
아마 이런 걸 두고 ‘신이 도왔다’라고 표현하는 걸 테다. 죽거나 큰 무상을 입은 자가 없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스위트피는 배시시 웃으며 리시안셔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들었죠? 리시안이 많은 사람들을 구한 거예요.”
“나는 저들을 구하려고 한 게…….”
“저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구한 거죠. 무려 공국의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거라고요. 역시 리시안은 대단해요!”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인간인 조엘에게 자신을 띄어주려 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아마 겸사겸사 인간들에게 드래곤에 대한 인식을 좋게 만들려 하는 것 같았다. 인간들이 드래곤을 점점 흉악한 괴물로만 여기는 것을 내심 신경 쓰던 아이이니 말이다.
특히나 공국이 리시안셔스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니, 그들을 통해 인간들에게 선한 드래곤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것이라는 계산도 포함된 것 같았다.
디에고가 한 나라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 인간들을 착취하고 잡아먹었다는 사실은 리시안셔스도 디에고를 물리친 다음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당연히 디에고의 만행에 그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상관없는 인간들을 위해 디에고를 상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위트피 때문이라도 목숨을 아끼고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데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이 공국의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필 이 나라에 스위트피가 있었고, 스위트피가 위험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
스위트피를 구하는 겸 다른 인간들을 구원하게 된 셈이었지만 리시안셔스로서는 스위트피가 무사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들을 구한 대가로 인간들에게 바라는 것 또한 없었다.
스위트피가 짧은 기간 동안 이 나라에 제법 정을 붙인 모양이니, 디에고에게서 벗어난 저들이 다시 일어서길 바랐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가벼운 안타까움만 느끼는 게 전부일 것이다.
“부상자들은 치료받고 있고, 다친 게 없는 사람들은 성의 보수 공사를 돕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성이었는데,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전과 똑같이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일 테고요. 가장 중요한 건…….”
조엘이 조심스럽게 리시안셔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디에고에게서 저희 공국이 자유로워졌다는 점이겠죠.”
짧게 감사의 표시를 한 조엘을 본 스위트피는 괜한 뿌듯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리시안이 죽을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맹렬하게! 그리고 아주 용감하게! 디에고와 싸운 덕이죠. 리시안이 이렇게 우리 같은 인간들을 생각하는 선량한 드래곤이라고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리시안이 이렇게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꼭 퍼뜨려 줘요, 조엘.”
“이미 공국의 모든 사람들이 리시안셔스 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자신을 대신해 인간에게 착한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위트피의 모습은 유난스러운 구석도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