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 아이 말고도 다른 존재가 이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건가.’
드래곤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너무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지나간 역사는 길었다.
어쩌면 자신은 모르지만 세레티와 스위트피 말고도 이런 힘을 가진 존재가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은 애써 생각하지 않았던 아주 만약의 가능성이 스위트피와 재회한 순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태초부터 시작된 역사 동안 이 힘을 가진 존재가 세레티와 스위트피, 둘 뿐이었다면?
세레티는 신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인간이니 애착을 가질만 했다지만, 스위트피는 무엇이 특별하지?
물론 리시안셔스의 눈에 스위트피는 특별한 인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악했고 당돌했으며, 지금도 자신을 이렇게 쥐고 흔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의 시점에서 보면 스위트피는 수많은 인간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 애가 가지고 있던 힘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신께서는 똑같은 힘을 가진 너를 나와 반려로 묶었을까.
오랜 시간을 살아왔어도 스위트피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아마 스위트피도 본인이 왜 이런 힘을 가지고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니까.
* * *
리시안셔스가 발등에 태워준 덕에 세레티는 높은 산에 있는 신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세레티는 그와의 만남을 비밀로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리시안셔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둠 속에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혼자 남겨진 세레티는 긴 시간을 살아 익숙해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손으로 앞을 더듬거리고 기둥을 매만지며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니?”
모두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자매가 잠들지 않은 채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요 앞에 산책 다녀왔어….”
“거짓말하지 마. 널 찾으러 갔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어. 점심때부터 이제까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산책을 멀리 다녀와서 그래.”
“멀리, 어디로 갔었는데?”
“…왜 화를 내는 거야?”
“화를 안 내게 생겼어? 아무런 말도 없이 늦은 시간에 외출해서 오랫동안 돌아오지를 않는데.”
자신을 추궁하는 듯한 에리카의 말투에 잠시 울컥하기는 했지만, 듣고 보니 에리카의 말이 맞기는 했다. 자신이어도 에리카가 이 밤중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멀리 나갔다 오면 걱정되는 마음에 화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세레티의 행동반경은 신전을 중심으로 좁은 편이었다. 신전은 높은 산에 바다와 가까운 절벽 부근에 위치해 있었고, 절벽 반대편에는 산을 깎아 만든 길고 가파른 계단뿐이었다.
그러니 이제껏 세레티에게 있어 산책이라고 해봤자 바로 신전 코앞에 나가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랬던 세레티가 신전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모습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 에리카의 입장에서는 추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멀리 나갔을 것 같지는 않고.”
“…….”
“누구와 나갔다 온 거야?”
대상이 누구인지 못 맞힌 것만 빼면 에리카의 추측은 완벽했다. 어차피 들킨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세레티는 자신이 드래곤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드래곤과 가까워졌다는 걸 들키면…….
그를 빼앗기게 될 것만 같았다.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추악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레티는 자꾸 리시안셔스를 향한 욕심이 들었다.
“끝까지 얘기 안 할 거야?”
“…미안.”
“세레티, 너 정말…….”
세레티가 가까이 지낼만한 사람은 그나마 신전의 사제들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가깝게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신전의 사제와 가까워진 거라면 자신에게 이렇게 숨길 이유도 없었다.
아무래도 신전 밖의 다른 누군가인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먼저 걱정을 끼쳐놓고서는 시무룩해진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평소 제게는 뭐든 솔직하던 세레티였는데. 처음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알았어. 우선 늦었으니 들어가서 쉬어.”
“으응…….”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마.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까 대화는 내일로 미루자는 거야.”
내일 누구와 어디에 있었는지 추궁할 거라는 예고였다. 에리카는 세레티의 뺨을 쓰다듬고는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등을 밀어줬다.
“다들 너 찾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아…….”
“최고 사제님께는 네가 돌아왔다고 내가 말씀드릴게. 넌 그분을 불편해하잖아.”
“…고마워.”
자매에게 소심한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건넨 세레티는 침실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걸음을 내딛는 두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설마하니, 많은 사제들이 자신을 찾느라 이 시각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안 그래도 다들 날 싫어하는데, 오늘로써 더 싫어하게 되겠네…….
하지만 그들에게도 미안하게도 지금 세레티에게 가장 걱정되는 건 리시안셔스와의 다음 만남이었다.
외출해서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가 들켰으니, 다음에는 몰래 리시안셔스를 만나기가 더욱 힘들 것이다.
리시안셔스의 정체를 드러내면 자신이 그를 따라 나가는 걸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절대로 드래곤과 가까운 사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불완전한 존재라고 자신을 내심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완벽한 존재인 드래곤과 붙어 다니는 걸 좋게 보진 않을 것 같았다.
「네 얼굴이 보고 싶은데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은데 못 듣고.」
하지만 우울한 생각과 고민은 오늘 리시안셔스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조금씩 나아졌다.
「그 멍청이 눈에 네가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나도 널 똑같이 볼 거라 생각하지 마.」
정말로 그럴까.
리시안셔스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리시안셔스는 다를지도 몰라.’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추한 얼굴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주더라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도 있다.
세레티는 리시안셔스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익숙한 신전 안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어둡고 적막한 밤의 신전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세레티의 걸음 소리뿐이었다. 덕분에 생각에 잠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리시안셔스가 원하잖아.’
내 얼굴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말해 줬어.
미의 기준은 인간들이 정한 거니 본인과는 상관없다고 했어.
아주 어쩌면, 리시안셔스는 있는 그대로의 나도 지금처럼 어여쁘게 여겨줄 수도 있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에리카만큼은 나를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리시안셔스도 다른 이들과는 다를지도 몰라.
한 번쯤은 용기를 내봐도 되지 않을까.
세레티의 안에 저 자신도 있는지 몰랐던 용기가 샘솟을 때였다. 저 멀리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자신을 찾느라 이제까지 잠들지 못했던 사제들인 것 같았다. 세레티는 그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정말 이 늦은 시각에 웬 소란인지 모르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그들은 아직 세레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에리카 님이 계속 세레티 님을 찾던데…….”
“이 늦은 시각에 대체 어디로 가신 거람.”
그러나 사제들이 자신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세레티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앞도 안 보이시는 분이 대체 어디로 갔다는 거야.”
“설마…, 절벽 밑으로 떨어지거나 계단 밑으로 구르신 거 아니야?”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신전에 보낸 분인데 그런 실수를 할 리가.”
“그래도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솔직히 나는, 그분이 차라리 그런 사고라도 당했으면 좋겠어…….”
원체 발소리가 조용한 편이던 세레티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신께서 첫 번째로 만든 인간이라고 하지만, 우리와는 다르잖아.”
“맞아. 이 세상에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세레티 님뿐인걸?”
인간이 탄생한 지는 고작 천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 신은 세레티 말고도 무수히 많은 인간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서로를 사랑해 자손을 낳아 인구를 늘려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세레티와 똑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완전한 인간은 없었다.
“나는 에리카 님이 진짜 신께서 만든 첫 번째 인간 같아.”
“맞아, 그분이야말로 진짜 ‘세레티’지.”
‘세레티’라는 이름은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어떤 한 존재를 뜻하는 명칭이기도 했다. 신의 첫 번째 딸이자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짜’ 세레티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