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미안해.”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세레티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정중한 사과였다.
“베일을 벗기려는 건 아니었어. 네가 싫어하는 행동인 것도 알고 있고.”
“…….”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베일 속에 얼굴을 꽁꽁 숨기려는 세레티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게 보였다.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세레티의 손등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겹친 리시안셔스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스위트피를 달랬다.
“겁먹지 마.”
“…….”
“나는 절대 널 해치지 않아.”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부드럽고 다정했다. 순간적인 두려움에 격한 반응을 내보였던 게 창피할 정도로, 그는 세레티를 안심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몸의 긴장이 풀리고 떨림도 금세 멎었다.
세레티는 아직도 조금 굳어 있는 손으로 황급히 바닥을 더듬었다. 그녀가 무엇을 찾는지 눈치챈 리시안셔스가 직접 깃펜을 쥐여 주고 양피지를 펼쳐줬다. 세레티는 양피지에 차분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베일에는 절대 손대지 마세요. 실수로라도 벗겨지면 안 돼요.’
“흐음…….”
양피지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억지로 벗길 생각은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 할 생각 없으니까.”
“…….”
“그런데, 굳이 그 답답한 베일을 계속 쓰고 있어야 해? 신전의 규칙이라도 돼? 다른 사제들은 멀쩡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던데 왜 너만 답답하게 그러고 다녀?”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는 불만스럽기도 하고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죄송해요. 제 얼굴이 추하게 생겨서 그래요.’
제 얼굴이 못났다고 적는 손이 미약하게 떨려서 글씨가 삐뚤빼뚤했지만, 어차피 세레티는 앞이 보이지 않아 제 글씨를 볼 수도 없었다. 손을 떤 티는 많이 났지만 다행히 뜻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세레티는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얘기하면 리시안셔스가 이해해줄 거라 여겼다.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앞을 볼 줄 아는 존재라면 추한 것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세레티가 하고 싶은 말을 받아서 적으면 읽고 답을 해주던 리시안셔스에게서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세레티가 글을 적고 보여주는 소통 방식에 맞춰 찬찬히 글을 읽고 답을 고르느라 느릿한 대화를 나누는 편이긴 했지만, 침묵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감은 세레티의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들을 만들어냈다.
내 얼굴이 추하다는 사실에 실망했을까?
“누가 그렇게 말했어?”
한참 뒤에야 들려온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아 있어서 세레티는 더욱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 거 아니야.”
리시안셔스는 앞을 못 보는 세레티가 자신의 외모가 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누군가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세레티에게 못생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외적인 역할은 에리카가 수행하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신의 첫 번째 인간에게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저한테 나쁜 말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세레티는 떨리는 손으로 그렇게 썼지만 리시안셔스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네가 이유 없이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
“걱정 마.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니니까. 그냥, 너한테 추하다고 말한 인간의 얼굴이 얼마나 잘났는지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니 말해봐. 누가 네게 그렇게 말했어?”
리시안셔스는 해칠 생각은 없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말하라며 세레티를 채근했다. 하지만 세레티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제게 대놓고 추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누군지 말할 수 없었고,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말할 수 없었다.
리시안셔스도 자신이 잘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못난 사람이라는 걸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래도 밑바닥만큼은 숨기고 싶었다.
“어차피 너는 날 만날 때가 아니면 신전 밖으로 나올 일이 없어 보이던데.”
“…….”
“네가 말 안 하면 신전에 불이라도 지르지, 뭐.”
“그러…!”
평소 그답지 않은 과격한 발언에 놀란 세레티가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황급히 입을 꾹 다문 세레티는 허겁지겁 깃펜을 들었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순식간이니까, 내가 기침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세레티는 겨우 양피지에 ‘신전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까 그러지 말라’는 내용을 적어 리시안셔스에게 보여줬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읽던 리시안셔스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 없는 얘기를 꺼냈다.
“네 목소리도 누군가가 듣기 싫다고 했어?”
세레티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쪽을 가리키고는 X자 표시를 만들었다.
자신은 원래 말을 못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리시안셔스는 세레티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진작에 눈치챈 뒤였다.
“어떤 인간인지는 몰라도, 정말 화나네.”
화난다는 리시안셔스의 말에 세레티는 또 어깨가 굳었다.
이럴 때는 정말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불편했다. 표정을 살피면 그의 기분이 어떤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판단해야 하니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인간이 한 어리석은 발언 때문에 애꿎은 나만 피해를 입고 있잖아.”
“…….”
“네 얼굴이 보고 싶은데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은데 못 듣고.”
“…….”
“너는 타인의 말만 듣고 내게는 숨기려고만 하지.”
마지막 말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미의 기준은 누가 세운 건데? 어떤 존재는 피부가 까만 게 아름답다 말하고, 또 어떤 존재는 피부가 하얀 게 멋지다 말해.”
“…….”
“대다수의 존재들은 기피하는 벌레나 쥐를 귀여워하는 존재도 있지.”
지금 리시안셔스가 하려는 말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그 멍청이 눈에 네가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나도 널 똑같이 볼 거라 생각하지 마.”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인간들이 정한 미의 기준은 내게는 별 감흥도 없어.”
속상한 아이처럼 투덜거리는 말투에 세레티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끝내 리시안셔스가 원하는 대답은 해줄 수 없었다. 리시안셔스도 세레티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약속해요.’
리시안셔스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의 침묵이 어색했던 세레티가 양피지 위에 글자를 적어 리시안셔스에게 보여줬다.
“약속?”
리시안셔스가 되묻자 세레티는 또 빠르게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제 베일을 벗기지 않겠다는 약속이요.’
“아까 약속했잖아.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뿐인 약속은 누구나 어겨요.’
“그럼 인간들은 약속할 때 어떻게 하는데?”
세레티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리시안셔스는 엉겁결에 세레티를 따라 똑같은 손 모양을 만들었다. 반대편 손으로 리시안셔스의 손을 더듬거리며 확인한 세레티가 그의 새끼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게 인간들이 약속할 때 하는 행동이야?”
세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풀어내며 다시 양피지에 글을 썼다.
‘앞으로도 누군가와 약속할 일이 있을 땐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면 돼요.’
“어차피 너 말도 다른 인간과는 이런 짓을 할 일이 없을 걸.”
‘그럼 저랑 약속할 때만 해요.’
“…그래.”
세레티는 몰랐겠지만 리시안셔스는 그녀의 손가락과 걸었던 제 새끼손가락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다.
원래부터 피부가 부드러운 인간이라 손을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긴 했지만,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에 스치니까….
누군가가 귓속에 바람을 분 것마냥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 * *
공국을 지배하는 대공의 성은 영토에 비해 규모가 컸다. 그 덕에 성벽 내부의 건축물은 대부분 무너졌지만, 아직 남아 있는 건물이 있어 스위트피를 그곳에 눕힐 수 있었다.
다행히 다치거나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가끔 눈꺼풀을 떨며 미간을 좁히긴 했지만 고통에 차 있다기보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 의사는 피곤해서 쓰러진 것 같다고 진단했다.
‘아마 그 힘이 문제겠지.’
이제까지는 스스로를 방어하는 목적으로만 쓰던 힘을 무리해서 썼으니 몸에 무리가 갈 만도 했다. 스위트피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에게만 준다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 가장 사랑하는 인간에게만 주는 힘이지, 사실상 그 힘을 가진 존재는 딱 한 명을 의미했다.
바로 신이 만든 첫 번째 인간이자, 첫 번째 딸이라고도 불리는 존재.
세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