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스위트피!』
인형들 더미에 쌓인 스위트피를 들어 올린 리시안셔스가 그대로 하늘을 올라 인형이 없는 성벽 위로 스위트피를 내려놨다.
“리시안, 저와 함께 있던 사람은요? 조엘은…….”
“지금 다른 인간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리시안셔스가 힘없이 바닥에 누워 있는 스위트피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저 멀쩡해요.”
“그건 내가 판단해.”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스위트피가 먼저 괜찮다는 것을 알려줬지만 리시안셔스의 냉정한 반응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리시안셔스와 나누고 있는 대화와 분위기가 이 상황과 퍽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그냥요.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요.”
“그래. 웃는 걸 보니 멀쩡한 것 같구나.”
“그걸 얘기한 건 아닌데…….”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눈앞에서 디에고를 따라갔다. 리시안셔스의 입장에서는 분명 배신감을 느낄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어쩌면 자신 따윈 리시안셔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 그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제게 와 주고 또 한 번 목숨을 걸고 구해 주는 걸 보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때의 제 선택은 분명 리시안셔스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점을.
그런데도 리시안셔스는 다시 재회한 스위트피에게 화를 내거나 원망을 뱉어내는 대신,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켜주고, 평소와 똑같이 대해줬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말랬지.”
“그럼, 고마워요.”
그런 리시안셔스가 미안하고 고맙기도 했다.
에리카를 닮은 인형에게 언니에게 하지 못할 말을 대신하면서도, 어떠한 위안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그 인형은 에리카의 껍데기를 쓴 가짜일 뿐, 진짜 제 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스위트피가 느낀 건 늦어서 후회하게 되기 전에 고마운 건 고맙다고, 미안한 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도 너의 괘씸함에 대해서는 벌을 줄 거야.”
“달게 받을게요. 제가 잘못한 거니까 억울해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무슨 벌을 줄 줄 알고? 버릇없는 건 여전하구나, 꼬…….”
이미 습관으로 붙어버린 ‘꼬마’라는 단어를 쓸 뻔한 리시안셔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이윽고 씩, 웃으며 스위트피를 ‘꼬마’가 아닌 다른 단어로 불렀다.
“스윗.”
스위트피는 갑자기 또 다른 의문이 솟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이유로 심장이 떨린다면 그건 제 심장이 주책인 걸까, 아니면 리시안셔스가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애칭을 부른 탓인 걸까.
이렇게 계속 누워서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가까이 보면 심장이 계속 주책을 떨 것 같았다. 스위트피가 어지러워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하자, 리시안셔스가 손을 잡아 일으켜줬다.
스위트피는 절반이 무너져 내린 성의 잔해들을 내려다봤다.
공국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디에고가 완전히 죽는 편이 좋았겠지만, 결국 디에고는 살아남아 도망쳤다.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디에고가 통치하던 때보다 더 최악일 수도 있다. 드래곤이 언제 돌아와 보복할지 모르니 말이다.
‘사람들이 원망하면 어쩌지…….’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괜히 리시안셔스가 다른 이들에게 원망을 듣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데…….
괜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던 스위트피의 시야에 하나둘씩, 폐허가 되다시피 한 성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보였다.
디에고가 떠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성으로 들어오더니 성벽 위에 있는 디에고와 스위트피를 올려다봤다.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이 가지 않아 마른침을 꼴깍, 넘겼다.
“…리시안.”
리시안셔스에게 이대로 이 나라를 떠나자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앞에서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스위트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기존에 나라를 지배하던 드래곤을 무찔러준 또 다른 드래곤을 경배하고 있었다. 더붙어 신비한 힘을 쓰는 드래곤의 반려도.
디에고와 처음 만났던 수도에서도 똑같았다. 그때도 사람들은 디에고와 스위트피를 향해 경외심을 내비치며 감사함을 보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스위트피는 당혹스러움에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린 사람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리시안, 저…….”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이곳을 떠날지, 아니면 저들에게 다가갈 건지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삐-
어디선가 시끄러운 이명이 들려오기도 했다.
“스윗?”
리시안셔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제 다 끝난 거지…….’
비록 디에고는 도망쳤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안전하다. 그러자 뒤늦게 안심이 되며 몸이 편해졌다. 긴장이 풀리며 몸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저, 좀 잘게요…….”
간신히 그 말을 남긴 스위트피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앞으로 넘어가는 몸을 다치지 않도록 잡아 주는 것은 물론 리시안셔스의 역할이었다.
* * *
한 번, 두 번, 세 번.
눈을 깜빡이던 스위트피는 흐릿하던 시야가 바로 잡히며 풍경이 보이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바로 꿈속이며, 고린도를 통해서 봤던 환각 속 세계와 똑같은 곳이었다.
이번에는 고린도의 힘으로 온 것도 아닌데 왜 꿈을 통해 이곳에 온 걸까. 고린도를 직접 만졌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스위트피는 익숙하게 아름다운 숲길을 걸었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길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태양이 황금빛으로 물든 숲속에서, 나무 그늘 아래에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둘 다 스위트피가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한 명은 리시안셔스였고, 또 다른 한 명은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세레티’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바로 곁에 있는데도 스위트피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둘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세레티의 손을 말없이 만지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을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만지고, 손등을 쓰다듬고 주물렀다.
신기해하면서도 가장 귀한 것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너는 정말 손이 작구나.”
“…….”
“이 작은 손으로 이런 건 어떻게 들고 왔어?”
리시안셔스가 가리킨 것은 깃펜과 잉크와 양피지였다. 리시안셔스의 앞에서는 추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싫어했던 세레티가 준비해 온 물건이었다.
아무리 손이 작고 손가락이 얇아도, 저 정도도 못 들고 오는 사람은 없는데…….
지나친 걱정이었다.
“암컷인 드래곤이나 다른 인간들을 봐도 너처럼 작은 것 같진 않던데. 넌 너무 작아. 손도 작고 발도 작고 키도 작…….”
“…….”
“지는 않아.”
세레티가 키가 작다는 말을 싫어하는지, 리시안셔스는 말을 하다 말고 세레티의 눈치를 살폈다. 저런 리시안셔스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게 느껴졌다.
스위트피에게 있어서 리시안셔스는 ‘어른’이었다.
그가 살아온 기간이 자신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길기도 했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린아이였던 자신과 다르게 리시안셔스는 성인 남자의 모습이었기 때문도 있었다.
그리고 리시안셔스는 실제로도 늘 장난스러운 스위트피와는 다르게 진중한 편이었고, 차분했고, 배려심이 깊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알고 있던 그와는 달랐다. 감정을 못 숨기는 표정과 말투는 풋풋한 첫사랑에 빠진 어리숙한 소년 같았다.
세레티는 목소리를 숨기는 대신 리시안셔스가 들고 오기 힘들지 않냐고 했던 깃펜으로 양피지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종이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째서인지 스위트피는 양피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저는 그렇게 작지 않아요.’
앞이 보이지 않아 평균적인 다른 사람들의 손 크기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작다고 말하는 게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세레티가 편하게 손이나 얼굴을 만질 수 있는 대상은 에리카뿐이었는데, 제 자매와 자신의 손 크기는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리시안셔스가 지나치게 큰 거예요.’
일일이 글씨로 쓰고, 그걸 상대가 읽는 과정은 한 마디를 주고받는 것뿐인데도 꽤 시간이 많이 걸렸으나 리시안셔스는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세레티가 하고 싶은 말을 적을 수 있게 기다려줬다.
“내가 편해졌나 보네. 이젠 제법 까불기도 하고.”
짓궂은 표정을 지은 리시안셔스가 세레티가 쓰고 있던 베일을 붙잡았다. 정확히는 베일 안에 있는 세레티의 뺨을 꼬집으려 한 것이었지만, 당사자는 다르게 느꼈던 모양이다. 베일을 벗길 거라 생각했는지, 리시안셔스의 손을 쳐내며 황급히 몸을 뒤로 빼냈다.
“…….”
의도한 몸짓보다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저지른 행동이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어떡하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 거야. 아무리 친절한 드래곤이어도 이번엔 화를 낼 게 분명해.
스위트피는 세레티가 느끼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리시안셔스에게 토라진 티도 내던 세레티는 지금은 겁을 먹고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