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조엘! 대포는 아직 멀었어요?”
찢겨나가 더는 제 언니의 행세를 할 수 없는 인형을 무심히 지나친 스위트피가 계단을 오르며 조엘을 불렀다. 하지만 한 발이라도 내딛을라치면 인형들이 달려와 스위트피를 저지했다.
‘이대로는 끝도 없겠어.’
좀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인형을 모두 다 뿌리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면….
‘인형을 조종하는 주체를 막아야 해.’
하지만 리시안셔스와 전투하면서도 인형을 조종하는 디에고를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확실한 치명타를 입힌다면 모를까.’
하지만 리시안셔스와 디에고의 힘은 서로 비등비등해서 리시안셔스가 일방적으로 디에고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 힘으로 디에고를 공격할 수는 없는 겁니까.」
고민하던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조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식물 줄기로 몸을 때리거나 찌르면…….」
그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조엘이 위험에 처했을 때 두꺼운 돌로 이뤄진 건물의 잔해를 줄기가 뚫기도 했으니, 적어도 한 번 시도해 볼 만은 했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내 줄기가 닿지 않을 거야.’
저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야만 했다.
“조엘!”
스위트피는 그 전에 계단을 오르며 조엘을 찾았다. 욱신거리는 무릎의 통증을 참은 채 계단을 오르자 인형들에게 둘러싸여 죽기 직전인 조엘이 보였다.
“얘들아, 도와줘!”
하늘을 올려다보자 새들이 쏜살같이 날아와 인형들을 쪼아대며 조엘에게 도망칠 틈을 주었다. 단검으로 혼자서 맞서고 있던 조엘은 구사일생으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엘, 대포는요?”
“저 망할 놈들 때문에 성벽 밖으로 떨어졌어요.”
“…욕도 할 줄 알았어요?”
“지금 이 상황은 욕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잖습니까.”
평소 욕을 안 하던 사람도 욕이 나올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조엘, 계획을 수정해야겠어요!”
몰려오는 인형들을 공격하고 밀어내는 것에 집중하며, 스위트피가 조엘에게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다.
“아가씨가 세운 계획이 뭡니까?”
“조엘의 말대로, 제가 직접 디에고를 공격해 보려고요!”
“하지만 줄기로 공격은 못 한다고 했잖아요!”
“한번 시도해 봐야죠!”
스위트피는 멀리 있는 동물을 불러오고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집중했다. 탈 수 있는 동물들은 아까 지하실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태워 보내느라 성에 남아 있지 않아 시간이 걸렸다.
‘제발, 빨리 와 줘…….’
몰려오는 인형들을 처리하며 스위트피는 간절하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말에게 제 목소리가 닿기를 바랐다.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일까.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일정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여긴 너무 멀어서 제 줄기가 디에고에게 가까이 닿을 수 없어요. 지금 말을 타고 디에고에게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는데, 조엘도 같이 가요. 중간에 내려줄게요.”
지금 여기에 남나, 드래곤에게 가까이 접근하나, 죽을 위험이 큰 건 매한가지였다.
“저 드래곤이 죽는 걸 보기 직전까지는 성에서 빠져나갈 생각 없습니다.”
“같이 가겠다고요?”
이번에는 스위트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조엘을 위아래로 훑었다.
덩치는 스위트피가 훨씬 작지만 정작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한 건 조엘이었다. 그 사실을 본인도 아는지 조엘은 순순히 사과부터 했다.
“미안했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알겠어요. 일단 빨리 말 위로 올라타요!”
잠깐 줄어들었던 인형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성이 넓은데가 인간들은 디에고를 두려워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성 안의 깊숙한 곳에 인형을 많이 숨겨뒀던 모양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여유도 없었다.
저 멀리 달려오던 말이 근처까지 다가오자 스위트피는 망설임 없이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식물의 줄기가 스위트피의 몸을 순식간에 감싸 그대로 추락하지 않고 말의 안장 위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었다. 머뭇거리며 뛰어내리지 못하던 조엘도 스위트피 덕분에 무사히 말 위에 올라탔다.
“아가씨를 걱정했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제가 썩 도움이 안 되는군요.”
“그래도 같이 있어 주니 든든하긴 하네요. 자, 가자.”
상황이 급한 탓에 조엘에게 대충 위로의 말을 던진 스위트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에게 속삭였다.
스위트피의 말을 알아들은 말은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승마를 해 본 경험이 없는 탓에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몇 번이고 떨어질 뻔했지만 조엘이 뒤에서 기울어지는 스위트피의 몸을 잡아 준 덕분에 낙마하는 일은 없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말 위에서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와 한 몸처럼 엉켜 건물 잔해 위로 떨어져 뒹구는 디에고를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디에고는 떨어진 충격에서 제일 먼저 벗어나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를 리시안셔스가 바짝 추격했다.
성 안의 곳곳에 있던 식물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스위트피의 뒤를 따랐다. 두 팔을 벌린 스위트피가 디에고를 향해 손짓하자 줄기가 일제히 디에고를 쫓아 하늘로 솟구쳤다.
‘제발 성공하기를……!’
실패할 것이 두려워 눈을 감았다.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정수리 위에 흥분에 차서 외치는 조엘의 목소리에 스위트피는 다시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로 하나였던 것처럼 얽히고설켜 나무의 몸통만 해진 줄기가 디에고의 몸통을 뚫었다.
“공격이 통했어요!”
그 누구보다도 디에고의 죽음을 바라왔던 조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엄청난 양의 피가 회색 비늘을 적시며 지상에 떨어졌다. 줄기에 꽂힌 디에고의 몸은, 줄기가 빠져나오자 그대로 추락하며 땅에 엄청난 진동이 울리게 했다.
이제 끝난 건가……?
마음을 놓아도 괜찮은 걸까.
그러나 끝나길 바란 건 스위트피의 희망일 뿐이었다.
디에고는 몸이 뚫린 상태에서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핏발 선 눈이 스위트피에게 향했다.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원망 어린 눈빛이었다.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디에고의 머리에서 이윽고 뿔이 비늘을 뚫고 기괴하게 솟아올랐다. 그런데 전에 봤던 것과 모양이 달랐다. 가시나무처럼 여기저기 뾰족하게 솟은 고린도의 모양은 상당히 괴괴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린도가 소환되며 기껏 성공했던 치명적인 상처가 치유되고 있었다.
피는 그대로 묻어 있었지만, 상처는 이윽고 깔끔하게 사라졌다.
고린도는 상대를 환각 상태에 빠트리는 힘을 갖고 있었다. 원래 리시안셔스가 갖고 있었을 능력이지만, 고린도를 빼앗은 디에고는 그것을 제 힘마냥 쓰고 있었다.
마냥 고린도의 힘에 걸린다면, 리시안셔스는 환각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속에는 리시안이 사랑했던 여자가 있을 테니까.’
그 여자가 에리카인지, 자신과 닮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껏 봐왔던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아직까지는 자신의 언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우울한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질투나 속상함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런데, 디에고는 왜 진작에 고린도를 꺼내지 않았지?’
이전처럼 리시안셔스와의 힘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무리해야 가면서까지 긴 시간 전투를 끌어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
작은 의심이 들던 찰나, 상처까지 치유되어 더욱 강해진 듯 보이던 드래곤이 갑자기 포효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고린도에서는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얕은 진동과 함께 웅웅, 울리고 있었다.
‘지하실에서도 디에고는 고린도 때문에 괴로워했어.’
그 말은 고린도가 디에고에게 있어서 완벽한 무기이자 방패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고린도가 약점일 가능성을 떠올리긴 했었지만, 이렇게 뜻밖의 상황에서 그 약점이 발동될 줄은 몰랐다.
남의 것을 제 안에 심은 대가였다. 지금 고린도는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리시안, 고린도를……!”
디에고의 가장 큰 약점이 된 고린도를 공격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디에고가 거칠게 날갯짓을 하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도망가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리시안셔스도 곱게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스위트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디에고도 리시안셔스가 추적해 올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는지 얕은 수를 썼다.
“아가씨, 뒤에서 아까 그것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어요!”
뒤를 돌아보자 인형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고린도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리시안셔스를 따돌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고 있는 것이었다.
인형들이 말을 공격하자, 말이 울음소리와 함께 앞발을 들어 올렸다. 방심하고 있던 스위트피는 그대로 조엘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인형들이 달려들었다.
리시안셔스가 추적을 포기하고 스위트피에게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디에고의 수대로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위기에 곧장 반응하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디에고가 멀어지자 인형들은 차츰 고장 난 것처럼 몸을 떨더니, 그대로 굳어 바닥에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