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80화 (80/120)

<80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해…….’

왜지?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조엘의 실수로 리시안셔스가 대포를 맞을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걱정도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본능적인 불길함이었다. 스위트피는 천천히 디에고와 리시안셔스가 전투 중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엘, 서둘러요!”

디에고가 성벽을 오르는 조엘을 발견했다. 아마 대포를 쏘려는 것도 눈치챘을 것이다. 디에고는 포효하며 성벽 쪽을 향해 불을 내뿜으려 했지만 리시안셔스가 그의 목을 물어뜯으며 저지했다.

그렇다고 디에고가 마냥 당하고만 있을 인물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꽤 많은 인원수의 발소리였다.

‘다들 도망쳤을 텐데 누구지?’

의아함은 곧 해소되었다.

엄청난 인원수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사람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디에고의 인형들’이었다.

리시안셔스에게 묶여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디에고가 그의 인형들을 쓰려는 것이었다.

“조엘!”

“정신 없으니까 그만 부……. 잠깐.”

스위트피가 계속 서두르라고 하자 감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던 그도 조급함이 밀려왔는지,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하려 할 때였다. 스위트피와 똑같이 여러 사람들을 발견한 조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성에서 평생을 살았던 조엘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들인데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저 사람들은 뭡니까?”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멀쩡한 사람들 보고, 사람이 아니라니요?”

“디에고가 만든 인형이에요. 사람과 똑같이 생겼지만 우리와 같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서둘러요!”

조엘은 서둘러서 긴 계단을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미처 알지 못했다. 디에고가 만든 인형은 사람이 아닌 만큼 신체 능력도 사람과는 달랐다.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사람의 속도보다 세배 정도는 빠른 속도였다.

“조엘!”

뛰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조엘을 계속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엘의 속도만 독촉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스위트피는 두려움 속에서도 최대한 힘에 집중하려 했다. 줄기는 달려오던 이들의 허리와 발목을 붙잡았고, 근방에 있던 개들이 달려와 인형을 공격했다.

디에고가 만든 인형의 숫자는 스위트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대체 저런 끔찍한 인형은 몇 개나 만든 거야!’

스위트피는 이를 악물며 그동안 썼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힘을 썼다. 땅 곳곳에서 줄기가 솟아 인형을 저지했으며 하늘을 날던 새와 지상의 개들이 합동해서 인형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조엘에게 다가가는 인형들을 저지하느라, 정작 스위트피는 제게 다가오는 인형은 발견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뒤에서 두 팔과 함께 허리가 옭아매졌다.

“아아악!”

너무 놀란 탓에 반사적으로 비명이 튀어 나갔다.

당연히 이 비명은 리시안셔스의 귀에 닿았다.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디에고가 그에게 불을 뿜었다.

다행히 간발의 차로 리시안셔스가 불길을 피하긴 했지만 그는 무리해서까지 스위트피에게 오려 하고 있었다.

‘오지 말아요, 리시안!’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마음으로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손등의 나비 문양이 빛을 내며 서로 반려의 소통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렸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리시안은 디에고를 막아요.’

쏜살같이 달려온 개가 스위트피를 옭아매고 있던 인형의 손을 물었다. 그 모습을 본 리시안셔스도 스위트피를 믿고 다시 디에고와 전투에 집중했다.

스위트피도 디에고와의 전투에서 밀리지 않는 리시안셔스를 보고 안심하며 다시 조엘의 엄호에 집중하려고 했다.

“으윽!”

“조엘,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아예 벽을 타고 성벽을 올라가는 수백 개의 인형들을 스위트피가 전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위트피는 조엘에게 달라붙은 서너 개의 인형을 향해 새들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조엘에게 집중하면 자신에게, 자신에게서 간신히 떼어내면 조엘에게 달려가는 인형들은 끝도 없었다.

“스윗-.”

더 최악인 것은,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점이다. 고개를 돌리자 연한 금발의 에리카가 스위트피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언…….”

에리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언니’라고 부를 뻔한 스위트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동안 디에고의 곁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던 분노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자신의 언니를 죽여놓고, 이렇게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고인을 모욕했다. 또한 자신이 에리카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제 눈앞에 언니와 닮은 인형을 들이밀어 정신적으로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리시안셔스와의 전투에서 이기고,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인간들의 세상을 계속 소유하고, 자신을 계속 쥐고 흔들려고.

“스윗, 소중한 내 동생.”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에리카가 스위트피를 끌어안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사람과 똑같은 촉각을 가진 손길로 스위트피의 얼굴을 감쌌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동생을 살피는 애틋한 표정이었으나, 이는 한 톨의 감정도 없는 거짓되고 만들어진 얼굴이었다.

스위트피가 더욱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디에고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어리석은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단순히 싫어하거나 장난감처럼 여기는 거였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거였다면 그건 피차 마찬가지고, 스위트피 또한 할 수만 있다면 디에고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고 싶었으니까.

자신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으로서는 분하고 화가 나지만 신적인 존재의 시선에서 인간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용서가 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끔찍한 악몽을 줄 수 있지?

‘디에고가 차라리 날 싫어하는 거였다면, 내 기분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까.’

스위트피는 가짜 에리카를 바라보다 이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실은…, 어떠한 이유로든 디에고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언니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어릴 적의 스위트피에게 언니란 존재는 친구이자 때로는 엄마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스위트피가 잘못을 저질러 엄마에게 혼이 나면 언니가 감싸주고 잘못을 덮어주기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언니라고 답할 정도였다.

그래서 눈앞에서 본 언니의 죽음은 더 충격적이었다. 제 눈앞에서 괴물에 의해 심장이 뽑혀 나가는 언니의 모습을 몇 년 동안이나 매일 악몽으로 꾸며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시간을 되돌려 가족들을 살릴 순 없어도,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언니도 나가서 놀고 싶었을 텐데, 매일 놀아달라고 졸라서 미안해.”

“…….”

“내가 접시 깨트렸을 때, 언니가 날 감싸준다고 대신 깨트렸다고 말해주고 엄마한테 혼나는데 아무 말 안 하고 숨어 있기만 해서 미안하고….”

“…….”

“새 물건이 생길 때마다 달라고 떼쓴 것도 미안해.”

어릴 때는 마냥 다정하고 상냥한 언니의 존재가 당연하다 여겼다. 사랑을 주는 부모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족들을 잃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달은 건, 이유 없이 사랑을 주는 존재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 않았지만 당연한 줄 알았던 존재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항상 고마웠어.”

스위트피는 에리카를 끌어안았다. 에리카도 제 품에 안기는 스위트피를 등을 서서히 감쌌다.

“그럼 나와 함께 가자, 스윗.”

“어디로?”

“아주 좋은 곳으로.”

에리카의 긴 팔이 스위트피의 등을 완전히 감쌀 때였다.

“디에고가 있는 곳으로?”

줄기가 에리카의 목과 허리를 감싼 채 잡아당겨, 스위트피에게서 떼어냈다. 동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에리카에게 달려들었다.

스위트피는 공격당하면서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가짜 에리카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넌 내 언니가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제 언니가 살아 돌아온 거라고 믿고 싶기도 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소용없지만, 그럼에도 만약, 스위트피가 마고 부인에게 학대당할 때 디에고를 먼저 만났더라면, 그리고 그가 가짜 에리카를 자신의 눈앞에 들이밀었다면.

살아있는 현실이 괴로우니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스위트피에게는 이미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게 해 준 존재가 있었다.

‘진작에 내 손으로 이 인형을 없애야 했는데…….’

언니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차마 닮은 인형을 없앨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는 것이 전부였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그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가짜 인형에게 그 말을 전한다고 죽은 가족들에게까지 이 마음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한결같이 그리운 존재이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에 매몰되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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