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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79화 (79/120)

<79화>

스위트피는 조엘과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힘을 썼다. 근처에 있던 개와 말이 튀어나와 작은 잔해를 물어다 옮기고, 식물의 줄기가 거대한 벽돌을 옮겼다. 다행히 예전보다 힘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덕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겨우 지하실 입구를 막고 있던 잔해들은 치워내는 것에 성공한 스위트피는 곧장 지하실 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조엘을 찾았다.

“조엘!”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아 있으면 대답해요, 조엘!”

몇 번을 불러봐도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텅 빈 공간에 울리는 메아리뿐이었다.

그렇구나. 결국 조엘은…….

“…조엘. 좋은 곳에 가길 빌게요.”

스위트피가 눈가에 서린 눈물을 닦아내며 부디 선하고 의로웠던 조엘이 신의 품에 안겼기를 기도할 때였다.

“산 사람을 죽은 사람 만들지 마시죠.”

병세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업은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는 조엘이 보였다.

“역시 살아 있었군요! 역시, 조엘이라면 살아 있었을 줄 알았어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지하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던 탓에 거동이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 보기로 했다. 성 안에 있던 소와 말에게 부탁해 사람들을 태워 성 밖으로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승마를 할 줄 모른다며 거절했지만, 스위트피의 부탁을 받은 동물들은 순순히 인간들에게 등을 내주었다.

조엘은 동물과 소통하고 식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스위트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건 왜 말씀 안 했습니까?”

“아무도 안 물어본데다가, 딱히 이 힘을 쓸 일이 없었잖아요.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도 성 밖으로 내보냈으니, 이제 조엘도 어서 도망쳐요.”

“아가씨는요? 함께 나가는 게 아닙니까?”

“제 드래곤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겠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꽤 멋있는 말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가 여기 있으면 반려라는 드래곤에게 방해만 될 겁니다.”

그러나 조엘은 퍽 냉정했다.

“물론 그 힘은 도움이 될 것 같지만요.”

“별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네요.”

“그 힘으로 디에고를 공격할 수는 없는 겁니까.”

“움직임을 잠깐 막는 건 할 수 있지만, 시간 끌기일 뿐이에요.”

“식물 줄기로 몸을 때리거나 찌르면…….”

“채찍도 칼도 아니고 ‘줄기’일 뿐이란 걸 알아주세요.”

지하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내보냈다. 열악한 감옥 속에서 몸이 약해진 사람들이라 동물을 태워 내보냈으니, 빠른 속도로 무사히 성 밖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조엘이었다.

“조엘도 어서 성 밖으로…….”

어서 성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쾅! 콰쾅!

그런데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기둥이 아예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도망칠 시기는 놓친 것 같은데요.”

“어차피 빠져나갈 생각도 없었습니다.”

“왜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저 드래곤을 죽일 기회는 없을 테니까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제 드래곤은…….”

“압니다. 제가 노리는 드래곤은 디에고 하나뿐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엘은 이 기회를 틈타 디에고를 처리하려는 것 같지만 한낱 인간인 그가 디에고를 해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긴장한 한편, 어딘가 자신감이 엿보였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

“하나 있긴 합니다만…….”

쾅!

얘기를 하던 도중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굉음에 스위트피가 어깨를 떨며 놀란 기색을 보이자, 조엘이 어깨를 당겨 그나마 드래곤들과 멀리 떨어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얘기해요! 방법이 뭔데요?”

이러다가는 대화를 나누다가 죽게 생겼다. 스위트피는 협박하듯이 조엘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빨리 방법이 뭔지 말하라며 독촉했다.

스위트피의 다급한 모습에 안 그래도 대답하려 했던 조엘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대포! 대포가 있습니다!”

“대포요? 한 번도 못 봤는데요?”

“그야 아가씨는 성벽 위에 한 번도 올라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죠.”

“성벽 위에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만, 아가씨는 안전한 곳에 숨어 계세요. 제가 가서 대포를 쏘겠습니다.”

“이 난장판 속에 혼자서 어떻게 가려고 그래요? 제가 엄호할게요.”

“아가씨가, 저를요……?”

조엘의 눈동자가 스위트피의 모습을 위아래로 순식간에 훑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그 작은 몸으로 네가 날 지킨다고 하는 거냐’라고 묻는 듯했다.

안 그래도 아담한 키가 싫었던 스위트피는 수치심을 느꼈으나 여기서 울컥하면 자신의 키가 작다는 걸 인정하는 격인 것 같아서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제가 키가 작은 건 사실이지만…….”

“키가 작다고는 안 했는데요.”

“…….”

“미안합니다. 계속 얘기하세요.”

스위트피는 지금 위급한 상황인 걸 상기하며 조엘에게 자신을 데려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조엘이 보기엔 제가 데려가봤자 도움은커녕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까도 봤다시피 전 식물과 동물을 다룰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로 디에고를 공격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몸을 묶거나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디에고에게 들키게 되더라도 조엘이 대포를 쏘는 동안 그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아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다행히 스위트피의 설득은 통했다. 조엘은 알겠다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갯짓을 하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으니 말이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전투를 벌이느라 성이 무너지고 여기저기 불이 붙은 난장판 속에서 조엘과 스위트피는 침착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중하게 움직인다 해도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원하는 목적지까지 도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게 내디뎠지만, 저 멀리서 날아오는 커다란 건물의 잔해가 날아오는 것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조엘!”

스위트피가 조엘의 이름을 불렀으나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바위만 한 건물의 파편이 바로 조엘의 머리로 날아왔다.

‘조엘……!’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스위트피는 최대한 힘에 집중하려 했다. 근처에 있던 나무의 줄기와 땅속에서 아직 씨앗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있던 꽃줄기가 순식간에 자라나 조엘의 코앞까지 날아간 잔해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한 후였다.

안 돼.

내가 조엘에게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조엘과 친밀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성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 정도쯤은 되었다. 스위트피는 자신과 가까워진 사람의 죽음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살리고 싶어, 지키고 싶어……!’

간절함은 스위트피가 가지고 있던 힘으로 스며 들어갔다. 줄기는 스위트피가 예상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눈을 미처 깜빡이지도 못하는 사이 잔해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대로 잔해를 뚫었다.

잔해는 아주 강한 창에 뚫린 것처럼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두꺼운 잔해를 뚫은 줄기는 정확하게 조엘의 동공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조엘! 괜찮아요?”

스위트피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그제야 줄기가 뱀처럼 스르륵, 움직이며 조엘에게서 멀어졌다.

“네, 괜찮긴 합니다. 하마터면 눈 하나를 잃을 뻔했지만요.”

“미, 미안해요. 힘 조절이 안 됐나 봐요…….”

“아까는 창처럼 찌르는 건 못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엘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적을 발휘한 거죠!”

조엘은 스위트피가 가진 신비한 힘에 한 번, 이 상황에서도 놀랍도록 능글맞고 뻔뻔한 태도에 또 한 번 놀랐다.

“간신히 재회한 당신의 반려 드래곤은 디에고와 전투 중인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군요.”

애써 순화해서 얘기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 조엘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너의 반려라는 드래곤이 죽을 수도 있는데, 조급함이 안 보인다는 걸 지적하고 싶은 걸 테다.

“괜찮지 않아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리시안셔스를 만지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또 재회의 순간을 망친 디에고에게서 리시안셔스를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디에고의 움직임을 조금 막아주는 정도였다. 그런 자신의 조잡한 능력보다는 조엘을 도와 대포로 디에고를 쏘는 게 리시안셔스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리시안셔스를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리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성벽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저기 있습니다.”

조엘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이미 드래곤들의 전투로 자잘하게 구멍이 뚫린 성벽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조엘은 성벽과 연결된 계단을 올랐다.

무사히 성벽까지 도착했고, 이제 잘 조준해서 대포를 쏘면 되지만…….

“조엘! 혹시라도 잘못 쏴서 리시안셔스를 맞추면 안 돼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전 당신의 드래곤을 해칠 생각도, 실수할 생각도 절대 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조엘은 그렇게 말했지만 왜인지 자꾸 불안했다.

중간에 건물 잔해가 날아와 조엘이 다칠 뻔하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지나칠 정도로 안전하게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대포로 디에고를 쏴서 맞추기까지 한다면 순탄하게 모든 위기를 끝내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이대로만 끝난다면 기뻐할 일이었지만, 스위트피의 경험상 위기가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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