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스위트피는 한참을 달렸다. 달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생생하게 과거가 떠올랐다. 자신의 과거인지, 자신과 닮은 타인의 과거인지 모를 기억이었다.
세레티는 매일 밤 리시안셔스를 기다렸다. 오늘은 그가 자신을 보러 올지, 보러 오지 않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을 품고서.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
세레티가 리시안셔스를 기다리며 그의 이름을 불러본 것처럼, 스위트피도 마음속으로 리시안셔스를 불렀다.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지만 제 목소리를 듣기에 거슬리다 느낄까 봐 혼자 있을 때만 불러보던 것처럼, 스위트피도 혼잣말처럼 리시안셔스를 불렀다.
디에고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리시안셔스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을 때였다.
“어딜 도망가!”
이제 막 야외의 바람을 맞으며 다리로 나왔을 때, 디에고에 의해 몸이 거칠게 돌아갔다.
“내 눈앞에서, 감히 도망치려고? 내가 놓칠 거 같아!”
“윽……!”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멱살을 쥔 채 들어 올렸다. 옷이 조여들며 목이 졸렸다. 스위트피는 벌게진 얼굴로 숨을 들이키려 해봤지만,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숨통을 트여주지 않았다. 허공에 뜬 발을 헤엄치듯 동동 구르며 디에고의 몸통을 밀쳤지만, 스위트피의 가냘픈 힘에 밀려날 디에고가 아니었다.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리시안셔스……!’
스위트피는 본능적으로 리시안셔스를 찾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습관처럼 찾게 되는 이름이었다.
“리, 시…….”
숨이 막혀서 죽기 직전인 순간에도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르는 스위트피를 본 디에고의 얼굴이 이제까지 봐왔던 것 중 가장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때 식물의 줄기가 성의 벽을 타고 올라왔다. 스위트피의 생존 욕구가 본능적으로 힘을 사용한 것이다. 디에고는 줄기에 붙잡힌 와중에도 억센 손으로 스위트피의 목을 졸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목이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디에고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줄기는 디에고와 스위트피를 풀어주는 대신, 다리 전체를 감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리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디에고와 스위트피가 있는 곳까지 다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다리 전체를 감싼 식물의 줄기가 엄청난 힘으로 다리를 붕괴시킨 것이다.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세로로 찢어진 드래곤의 눈으로 살기를 띠던 디에고의 이성이 차츰 돌아왔다.
다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목을 놓아줬다.
“케헥! 커흐, 허억!”
스위트피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일어나, 죽고 싶지 않으면.”
스위트피를 죽일 뻔했던 디에고는 무너지는 다리에서 스위트피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스위트피는 디에고를 피해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이리 와!”
디에고의 외침에도 스위트피는 절대로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스위트피가 이제 막 다리 중앙을 지날 때였다.
“어……?”
몸이 기울어지더니, 이내 갈라진 다리 사이로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무너뜨린 줄기가 빠르게 내려와 스위트피를 붙잡으려 했으나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대로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황금빛을 발견했다. 그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세레티가 마주쳤던 것처럼 드래곤이 황금 같은 노란 눈을 빛내며 스위트피에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찰나, 스위트피는 자신이 세레티가 되어 자살하려 바다로 뛰어내렸던 순간을 매 초 단위로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날 느꼈던 그 기분이 지금 이 순간 재현되고 있었다. 손등에 드래곤의 반려라는 것을 나타내는 나비 모양의 문양이 푸른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지금 누가 나타난 것인지.
“리시……!”
미처 이름을 외치기도 전, 몸이 붙잡혔다.
순식간에 날아온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낚아채고는 위에서 쏟아지는 잔해들을 막으며 땅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와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금안을 가진 드래곤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했다.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난 것이기에 감히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는데…….
“…리시안.”
스위트피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애틋한 재회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탓이었다.
다리가 무너지는 큰 소리에 밤이 되어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자신의 처소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들을 지배해왔던 드래곤이 아닌 또 다른 드래곤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들의 눈에는 드래곤을 향한 경외심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인사를 나눌 시간은 없는 것 같구나.』
리시안셔스가 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막 다시 재회한 순간에 하기에는 차갑게 느껴지는 첫마디였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다리와 연결되어 있던 건물에 디에고가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여유롭게 재회를 만끽할 시간이 없어 보이긴 했다.
“리시안, 저어…….”
리시안셔스를 어떻게 떠났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와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최악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두려웠다.
“잘못…….”
그에게 사과하려던 순간이었다.
『사과하지 말렴.』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차가운 일갈에 스위트피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리시안셔스라고 해도 제게 실망했을 거란 건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과할 기회도 주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난 네 사과를 받아 줄 생각이 없거든.』
이토록 냉정한 그의 반응은 처음이라 스위트피는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너의 괘씸죄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정하도록 하지.』
그러나 스위트피는 이내 리시안셔스가 제게 장난을 친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리시안셔스는 본체인 드래곤의 모습으로 그 커다란 머리를 개처럼 스위트피의 정수리 위에 가볍게 묻었다가 떼어냈다.
자신이 큰 잘못을 하고 일방적으로 떠났어도, 제 드래곤은 끝까지 자신에게 다정했다.
『안전한 곳으로 숨어 있어. 혼자서 숨어 있을 수 있지?』
“그럼요, 제 특기잖아요.”
그동안 리시안셔스가 다른 드래곤과 전투를 치를 동안 혼자서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건 지겨울 정도로 많이 해 봤다.
스위트피가 안심하라는 듯 웃자, 리시안셔스는 거대한 날개를 움직이며 다시 날아올랐다. 성의 높은 곳에 서 있던 디에고도 금세 본체의 모습으로 날아오르는 리시안셔스를 향해 하강했다.
두 드래곤이 맞붙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 드래곤이 전투를 치를 동안 스위트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도망치세요!”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
도망치라는 스위트피의 외침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스위트피의 손을 붙잡았다.
“조엘!”
조엘이 하마터면 사람들에게 깔릴 뻔했던 스위트피를 데리고 인파가 적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인이 메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스위트피에게 직접 메어 주었다.
“아가씨, 도서관에서 미처 드리지 못했던 겁니다.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이 아니면 전하지 못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지금 아가씨를 붙잡고 드릴 수밖에 없는 점, 이해해 주십시오.”
급한 상황이니만큼 예의는 적당히 차려도 될 텐데, 그 와중에 정중한 태도나 양해를 구하는 말까지, 모든 게 조엘다웠다.
“이 가방 안에 든 게 뭔데요?”
“드래곤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낸 그 신화를 기억하죠?”
“그럼요, 물론이죠.”
“출처였다던 나라에 대해 누군가가 그린 지도입니다. 설명만 듣고 그린 거라 실제와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아가씨가 가지고 계십시오.”
말을 끝낸 조엘은 갈 곳이 있는지 급하게 등을 돌렸다.
“조엘! 어디로 가려고요?”
“지하실에 제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구해야 해요!”
그러고 보니 지하실에는 아직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전투를 벌이는 탓에 도망가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이 그들을 구하러 갈 리 없었다.
조엘은 지금 자신의 백성을 구하러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위험해도 가야만 합니다.”
스위트피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를 만류했지만, 조엘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지하 감옥으로 달려가는 조엘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엘이 이제 막 지하실 입구를 내려갔을 때였다. 드래곤들의 전투로 성이 무너지고, 건물 잔해가 지하실 입구로 떨어졌다.
쾅!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위나 다름없는 잔해가 입구를 틀어막았다.
“안 돼!”
저대로면 조엘이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다들 숨이 막혀 질식사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