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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77화 (77/120)

<77화>

“반려는 신이 정한 운명이야.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신이 정해준 대로 리시안셔스와 묶인 걸지 몰라도, 과거에는?”

“…뭐?”

“그때는 이런 전쟁도, 신이 정한 운명도 없었는데. 그때는 어째서 그 자식을 좋아했는데?”

디에고는 세레티와 자신을 완전히 겹쳐보고 있었다. 그제야 스위트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이 고린도를 통해서 본 모습은 누군가의 상상 속이나 완전히 거짓된 풍경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과거였다는 걸.

그리고 디에고는 신이 다시 그를 품도록 세레티라 여겨지는 자신에게 본인을 반려로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꼭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드래곤들의 전쟁도, 신이 묶은 운명의 반려도 없던 시절. 디에고는 그 시절에 리시안셔스를 선택한 세레티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세레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디에고가 자신에게 내보이는 무거운 감정의 깊이가 이해되었다.

“디에고.”

일단 흥분한 디에고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위트피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아….”

갑자기 머릿속이 찌르르, 울렸다. 고린도를 통해서 보고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마치 세레티가 된 것처럼 그 순간이 그립고 서글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리시안셔스를 봐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를 만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당장 그를 만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또 한 번의 생을 선택한 이유는…….

“세레티.”

정신을 차렸을 때, 스위트피는 어느새 디에고에게서 벗어나 달리고 있었다.

* * *

여자는 평범한 성의 시녀였다.

공국은 빈말로도 평화롭다고 할 수 없었던 나라였다. 나라가 육지와는 먼 섬에 위치한 데다가 지리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위치라 해적들의 침략도 많았다. 특히나 공국을 통치하던 대공은 술과 여자들만 취하며 침략이 있을 때는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자신과 식솔들의 몸만 보존하고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았던 무능한 군주였다.

그래서 드래곤에 의해 대공이 죽었을 때, 어리고 영특한 공자에게는 미안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강력한 드래곤의 힘으로 해적들은 섬에 도착하기도 전에 불이 붙은 배에서 죽거나 드래곤의 먹이로 전락했다. 공국의 백성들은 이제야 나라가 안전해졌다 여기며 드래곤을 찬양했다. 드래곤의 난폭함 정도는 신적인 존재이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짧았던 공국의 평화는 금세 깨졌다.

드래곤이 공국을 비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더 이상의 침략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인간을 먹던 드래곤의 허기는 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심기에 거슬리는 인간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 수가 세 자리를 넘어가자,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을 그에게 바쳤고, 그도 모자라게 되어 가난하여 세금을 내지 못한 자들을 먹이로 바쳤다.

드래곤의 허기만 채워준다면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기는 했으나, 과연 이제 진짜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애나.”

디에고와 스위트피를 두고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오던 시녀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공자님.”

한때 차기 공국의 군주였던 조엘은 이제 정원사 따위의 일을 하고 있었다. 디에고는 군주를 죽이고 난 뒤, 조엘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덕에 살아서 성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디에고는 조엘이 그가 죽인 대공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모를 수 있다. 더 심한 경우,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그렇게 부르지 마.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미안해요, 조엘.”

대공이 죽고 조엘이 성의 사용인 중 한 명이 된 지 오래인데도 습관처럼 그를 ‘공자님’이라 부르던 애나는 다시 그를 정정해서 불렀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이에요?”

“너를 만나려고 왔어.”

“반려님에 관한 얘기라면 듣지 않겠어요.”

“우리의 일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권한은 우리에게 없어.”

“그래서 그 여자가 떠나게 두자고요? 거기다가 당신은 그 일을 돕고 있고요?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겠어요? 가벼운 호의로 도와줄 일이 아니라고요!”

한때 자신이 곁에서 주인으로 모셨던 조엘의 덤덤한 태도에 애나는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울컥, 치솟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여자의 도망을 도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그 드래곤이 공자님부터 찢어 죽일 거예요. 어쩌면 화풀이 삼아 공국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을지도 모르고요. 저 여자가 온 뒤로, 드래곤의 발작 횟수나 기간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덕분에 아직 감옥 안에 새로운 사람들을 잡아넣을 필요가 없었죠.”

“…….”

“그런데도 그 여자를 도와야겠어요? 그래도 한때 이 공국의 차기 군주였는데 왜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으세요?”

애나가 애원하다시피 조엘의 손을 붙잡았다.

“애나. 나는 가벼운 호의로 그 여자를 도우려는 게 아니야.”

그러나 애나에게 붙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낸 조엘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내친 그녀의 손을 다시 부드럽게 잡았다.

“모든 건 공국을 위해서지.”

“그 여자를 돕는 게 어떻게 공국을 위한 일이죠?”

“디에고에게 아무런 제재도 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잖아.”

“…….”

“디에고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그리고 도와주는 대신에 우리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무슨 도움이요?”

“진짜 반려인 드래곤이 따로 있다고 했어. 디에고를 없애는 일에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야.”

“…진심이세요?”

조엘의 말을 듣던 애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뿌리쳤다.

“지금 디에고를 없애자는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맞아. 그 여자를 보내주고, 진짜 반려라는 드래곤을 데리고 와 우리를 도와달라고 해보자.”

“너무 위험해요. 그 여자가 약속을 지킬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요? 저 같으면 도망친 순간부터 이곳은 뒤도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 자신의 반려를 저희 때문에 다른 드래곤과 전투를 치르게 할 이유도 없잖아요.”

“내가 확신할 수 있어. 반드시 약속을 지킬 사람이야.”

“공자님의 확신 때문에 공국의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을 순 없어요. 그리고…, 이미 다 끝났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애나는 바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디에고가 알게 되었어요.”

“알게 되다니, 뭘…….”

조엘은 애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를 챘으면서도 물어봤다. 아마도 희망을 갖고 싶은 듯했으나, 애나는 그 희망을 깨는 얘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반려님이 도망칠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요.”

“디에고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다는 거야?”

“제가 전했으니까요.”

스위트피와 대화하던 내용을 디에고가 엿들었던 것이니, 의도치 않게 일어난 사고였으나 애나는 일부러 자신이 디에고에게 직접 얘기를 전했다고 얘기했다. 그래야 조엘이 자신이 그 계획에 동의하고 도와줄 거라는 희망을 버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디에고가 끌고 온 그 여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단 말이야?”

“원망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공자님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공자님보다 제 목숨과 공국의 안전이 중요해요.”

“공국의 백성들을 희생시키면서 나라의 안전을 생각한다고? 넌 그게 앞뒤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이 방법이 그나마 최선인데!”

“그렇지 않아, 애나.”

애나는 실망한 조엘이 화를 내고 욕을 뱉으며 돌아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엘은 분명 애나를 향한 실망감을 보이긴 했으나, 설득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애나. 우린 아직 드래곤과 싸워보지도 않았잖아.”

“인간이 어떻게 드래곤을 이기겠어요!”

“해보지도 않고 질 거라 단정하지 마.”

“불가능한 일은 시작조차 안 하는 게 나아요.”

“나는, 죽을 게 두려워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방관하고 동조하는 것보다 싸워보기라도 하고 싶어.”

그냥 더 들을 필요 없이 돌아서면 되는 일인데….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내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죄책감이기도 했기에.

애나는 제 안의 희망이 조엘의 설득으로 점점 고개를 들어 올려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이 있다면 신도 존재하겠지.”

조엘이 자신의 손을 뿌리쳤던 애나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신께선 우리의 손을 들어주실 거야.”

아직 애나의 마음 안에 있는 희망과 두려움의 크기가 서로 엇비슷할 때였다.

달빛이 가려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구름이 달빛을 가린 거라 생각해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갑자기 희미한 빛조차 사라진 어둠에 기묘한 기운을 느낀 조엘과 애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달을 가린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의 눈이 커질 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성과 성을 연결하는 다리가 부러지며 누군가가 추락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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