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스윗-.”
“…언니.”
에리카의 얼굴을 한 인형도 있었다. 스위트피는 다정한 언니의 얼굴로 다가오는 인형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디에고는 스위트피가 소리를 지르거나, 울면서 제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서 끌고 온 장소였다. 그러나 스위트피의 반응은 디에고의 예상과는 달랐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스위트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가짜 에리카의 품에 안겨서도 어떤 분노도 드러내긴커녕, 서두르지 않는 몸짓으로 인형을 떼어냈다.
“날 이렇게 괴롭힐 이유가 없잖아.”
뒤에 서 있는 디에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되묻기까지 했다.
“난 지금 네 영역에 있는 신세고, 도망칠 방법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계획을 너에게 들킨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
“그리고, 내게 바라는 게 있잖아.”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그를 반려로 선택해 달라고 했다.
반려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인지, 반려를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위트피에게 그를 반려로 선택해달라고 했다.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요구이기도 했다.
만약 스위트피의 마음에 따라 반려가 바뀔 수도 있는 거라면, 디에고는 더욱 자신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좋아하게 만들어야지, 계속 싫어할 이유만 주고 있는 셈 아닌가.
물론 디에고가 무슨 수를 쑤든 스위트피가 그를 좋아하게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디에고의 입장에선 봤을 때 자신에게 상처를 줘서 그가 얻는 이득은 없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디에고의 행동은 뭐랄까…….
그냥 화풀이에 가까웠다.
자신이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이 응징하려 들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인가?
‘내가 괘씸해서?’
자신을 향한 디에고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꼭, 미숙한 소년이 제 감정도 자각하지 못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스위트피의 사고가 일순간 정지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람.’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디에고가 나를?
그동안 성 안의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디에고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반려로 여기고 있다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들…….
‘미쳤어, 절대 아니야. 내 착각일 거야.’
부정하고 싶었다. 디에고 같은 괴물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이해가 되지 않았던 디에고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난 네게 바라는 바가 있지.”
“…….”
“네가 날 반려로 선택하면 신이 다시 나를 자식으로 받아들여 줄 거라 생각하니까.”
스위트피에게 찾아온 혼란이 미처 가시기도 전, 디에고가 뒤늦은 대답을 꺼냈다.
“그런데 넌 내게서 도망칠 꿍꿍이를 갖고 있었어. 내가 바라는 걸 들어주면 네가 바라는 걸 들어주겠다고 했는데도!”
지금 디에고가 하는 말의 내용만 보면 자신을 괘씸해하는 것이 전부인 듯했다.
하지만 괘씸함만이 전부라고 하기에는…….
“나는 네게 잘해 주려 했어. 잘해 주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감정의 깊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깊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나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가까이 다가온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어깨를 아프게 쥐고 흔들었다.
“날 걱정했다고? 웃기지 마. 넌 날 조금도 생각하지 않잖아. 네가 진심으로 날 바라볼 때는 내가 리시안셔스와 전투를 치르고 있거나, 지금처럼 이렇게…!”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어깨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에리카를 닮은 인형을 끌어당겨 스위트피의 눈앞에 들이댔다.
“날 향한 증오심을 끌어올릴 때뿐이야.”
스위트피는 머릿속으로 디에고가 자신에게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내비치는 것에 대해, 자신을 좋아하는 것 말고 다른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정답을 찾은 스위트피의 머릿속은 자꾸 한가지 방향으로만 생각이 치우쳤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려 해도 지금 디에고의 모습은 꼭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 여자에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너…….”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스위트피는 토해내듯이 묻고 말았다.
“날 좋아해?”
스위트피를 쥐고 흔들던 디에고의 몸짓이 멈췄다.
충동적으로 질문을 던지자마자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스위트피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으나,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대답을 받아내는 편이 나았다.
“날 좋아하냐고.”
“…….”
“그러니까, 내 애정을 받고 싶어?”
다시 확실하게 물었으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고장 난 듯 굳은 얼굴과는 다르게, 스위트피의 얼굴을 담은 눈동자만큼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 무슨…….”
한참 뒤에야 디에고의 입술이 열렸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야? 미쳤나 보군.”
디에고는 길길이 날뛰며 부정했다.
“내가 너 같은 걸 좋아해? 내가 네 애정을 받고 싶어 한다고?”
“…….”
“헛된 망상에 빠졌나 본데, 꿈 깨. 난 리시안셔스와는 달라. 인간의 사랑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고. 알아들어?”
차라리 말을 더듬지나 말지.
흥분하지 말고 차갑게 비웃기나 하지.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부정하는 모습은 디에고의 말이 거짓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디에고는 날 좋아하는 거야.’
당사자인 디에고는 자각하지 못했거나,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듯 보였지만. 스위트피도 굳이 그에게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디에고가 끝까지 부정하며 깨닫지 못하기를 바랐다.
‘이해가 안 돼.’
디에고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자, 황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서로 감정적인 교류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자신과 만날 때마다 디에고는 늘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처음 자신의 마을을 불태울 때는, 언니의 심장을 취하느라 자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쳐도…….
그 뒤로 수도에서부터 시작해서 디에고는 자신과 리시안셔스를 끈질기게 쫓았고, 그렇게 마주칠 때마다 리시안셔스를 공격하고 스위트피를 위기에 빠트렸다. 그런 과정 속에서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는 건지….
스위트피는 턱을 떨며 고함치듯이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디에고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난 네가 싫어.”
그 한 마디로 디에고의 입술은 다시 굳게 다물렸다.
설령 디에고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디에고를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지도 못할 것이며, 그를 용서하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디에고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끔찍하게 싫었다.
“날 좋아하지 마.”
그것이 스위트피가 디에고에게 해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아량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그 마음을 버리라고. 그러나 스위트피의 말이 의도치 않게 디에고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착각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 같은 하찮은 인간 따위가 뭐라고.”
“착각이라면 미안하지만….”
“하지만 넌 날 좋아해야 해.”
스위트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던 디에고가 돌연, 스위트피에게는 그를 좋아해야 한다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넌 날 반려로 선택해야 해야 하니까, 날 진심으로 좋아해야만 해.”
“왜 그렇게 반려에 집착하는 거야? 인간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네가 날 반려로 받아들이면 신께서도 날 다시 자식으로 받아줄지도 모르니까!”
“내가 널 반려로 선택하는 게 신의 결정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
“드래곤은 아이를 가질 일이 없어 모르지만, 부모에게 첫 아이는 다른 자식들보다 더 특별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넌 신에게 있어 첫 번째 자식과 다름없어.”
평소라면 의아하기만 했을 내용이었지만, 고린도를 통해서 많은 것을 본 지금은 다르다. 스위트피는 일전에 고린도를 통해 본 내용과 디에고의 말이 일치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환각 속에서도 자신은 ‘세레티’라 불리며 신이 만든 첫 번째 인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 날 사랑하게 된다면…….”
“…….”
“신께서도 마음을 바꾸시겠지.”
신에게 버림받은 드래곤…….
신에게 버림받으면 안 좋은 불이익이라도 당하는 걸까.
자신이 보기에는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서 달리 더 안 좋은 일을 겪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왜 이렇게까지 절박한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려를 바꿀 수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디에고와의 이 대화에서 어쩌면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스위트피는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