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냥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자기가 살자고 남을 희생시킬 자격은 없다는 거예요. 그쪽은 이미 살자고 남을 희생시키고 있긴 하지만…….”
어떻게 얘기해도 좋게 대화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시녀는 목숨이 달려있으니 강요하려 들 테지만 저쪽이 원하는 대로 이곳에 남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딱히 비난할 생각은 없었건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시녀의 표정은 무너져 내렸다. 밑바닥을 들켜버렸다는 수치심 때문일까.
‘사실 내 밑바닥이 더 더럽지만.’
저들은 살고 싶었다는 핑계라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
크리스와 마고 부인뿐만 아니라 리시안셔스에게 부탁해 마을 전체를 불태운 일은 디에고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한순간의 이기심으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 건지.
생명은 소중하다는 뻔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괴롭힌 마고 부인과 크리스를 해치운 일은 여전히 후회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른 일은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남아 있다.
“그래서 끝내 디에고 님에게서 도망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무래도 시녀는 대화를 여기에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위트피는 망설였다. 어떻게 얘기를 하든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은 결국 하나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더욱 물고 늘어지려 할 테고.
어차피 거짓말은 누구나 하며, 거짓말을 한다고 나중에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상대방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일 수 있었다.
“전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려는 것뿐이에요.”
문제는 스위트피가 거짓말을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당당하고 떳떳한데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디에고 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잘 생각하세요. 반려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다칠 수도 있어요. 특히나 반려 님의 도망을 도우려고 하는 자는 더욱 잔인하게 죽게 되겠죠.”
시녀는 스위트피의 탈출을 막기 위해 조엘을 언급하며 협박이나 다름없는 설득을 했다. 시녀는 조엘을 언급했다.
“그러지 말고, 못 본 척해 주세요.”
“제가 못 본 척하면, 반려님은 기어코 도망칠 방법을 찾으실 테죠. 그럼 성 안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될 테고요.”
“…….”
“반려님께서 저희를 위해 이곳에 남아 희생할 마음이 없듯이, 저희도 반려님의 도망을 못 본 척하며 도울 생각은 없습니다.”
어쩌면 저 시녀는 방을 나서자마자 디에고에게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확고해 보였다.
‘어쩌지…….’
그래도 이 성의 주인이자 공국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던 조엘에게는 마음이 약해지는 거 같던데.
조엘이 위험해지니까 디에고에게는 조용히 해달라고 말해 볼까.
“조…….”
스위트피는 조엘의 이름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온몸을 덮쳐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적인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조엘의 이름을 말하면 안 돼.
다가오고 있는 포식자를 뒤늦게 눈치챈 사람처럼, 스위트피의 동공이 천천히 시녀의 등 뒤로 향했다.
짝, 짝, 짝-
문가에 여유롭게 기대어 선 남자가 느린 박자로 박수를 쳤다. 시녀도 그가 온 줄은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둘이 사이좋아 보인다.”
디에고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웃었다.
낮에 자신과 안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오늘은 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보러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지금 완전히 빗겨나갔지만.
“얼마나 친하면 나 몰래 비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어?”
스위트피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거야?
“그래서, 찾았어?”
“…….”
“나한테서 도망칠 방법.”
…그래. 언제부터 들었건, 결국 스위트피가 도망칠 생각이었다는 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시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스위트피가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는 얘기였으니까.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낸 디에고가 여유롭게 한 걸음씩 옮기며 스위트피와 시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두려움에 잠긴 건 스위트피뿐만이 아니었다. 시녀는 스위트피보다 더한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동안은 디에고와 마주쳐도 의연하게 구는 편에 속했으나 그녀도 지금 이 상황이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디에고는 아무 말 없이 시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 말이야.”
“…네, 네.”
“꽤 기특하던걸?”
“…….”
“그래, 그래야지. 저 녀석을 도망치게 두면 안 되지.”
다행히도 디에고가 시녀에게 벌을 주거나, 그녀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스위트피가 떠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디에고 입장에선 도망치지 못하게 막겠다는 시녀의 말이 퍽 기특했던지, 그녀를 내려다보는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원하는 건 나중에 들어주지. 이만 나가 봐.”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는 그 말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시녀가 사라지자 적막이 찾아온 방 안에서 스위트피와 디에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디에고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삐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긴 했으나, 항상 짓고 있던 표정이라 얼마만큼 화가 난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녀가 사라지고 나서, 마침내 디에고가 움직였다. 스위트피는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겁먹었어?”
의외로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손대지 않은 채 가까운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누가 보면 내가 널 때린 적이라도 있는 줄 알겠어.”
“때린 적…….”
엄밀히 따지면 때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두 팔을 아프게 잡아당기거나 등이 아리도록 벽에 밀어붙이거나, 억지로 등에 태워 공포를 느끼게 하거나, 무섭게 소리 지른 적은 있지만 말이다.
“얘기해 봐.”
“뭐를?”
“내게서 도망치려 했다며.”
“그런 시도한 적 없어.”
“‘아직’은 안 한 거겠지. 언젠가 시도하려고 방법을 찾는 중이었을 거야. 그렇지?”
예상외로 디에고는 차분했다. 언젠가 도망치겠다는 속마음을 들키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건만, 외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너를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야?”
그러나 스위트피는 이내 깨달았다.
아, 저건 연기다.
질문을 던진 디에고의 눈빛을 확인한 스위트피는 자신을 떠보려는 수작인 것을 알아채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디에고는 스위트피가 도망치게 놔두지 않았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디에고는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스위트피의 손목을 붙잡았다.
“윽……!”
하지만 가는 손목을 붙잡은 손아귀의 악력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억셌다.
“너 같은 거짓말쟁이의 말은 조금도 믿어주면 안 되는 건데.”
“이거 놔!”
“내게 마음을 좀 연 거 같다고.”
“제발, 좀!”
“나를 걱정했다는 말에.”
“아파……!”
“멍청하게 방심하고 있었어.”
그는 마치 배신당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애초에 서로 배신하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었는데.
“어디로 가려는 거야!”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손목을 붙든 채 복도로 나왔다. 어둡고 넓은 복도에는 스위트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밖으로 나와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거나, 혹은 들었으면서 디에고가 있는 것을 알고 내다보지도 않던가. 둘 중 하나거나, 혹은 둘 다 정답일 것이다.
“날 데리고 어디로 가려는 거야! 이것 좀 놓고 말해!”
이쯤 되자, 스위트피도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성 안에는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디에고는 사람을 잡아먹는 드래곤이었다. 그동안은 자신이 필요해 해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수틀린 상태에서는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너에게 지나치게 잘해준 것 같아.”
“무슨….”
“나는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괴롭히는 쪽에 더 재미를 느끼는 편이었는데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건데!”
기어코 스위트피를 끝까지 끌고 간 디에고는 거대한 문 앞까지 도달했다. 거대한 문을 한 손으로 가볍게 연 디에고가 스위트피를 먼저 그 안에 밀어 넣었다.
거의 던져지다시피 밀린 탓에 바닥에 엎어진 스위트피는 절뚝거리는 무릎에 유독 통증을 느끼며 찌푸린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건…….”
그리고 끔찍한 풍경을 봐버렸다. 수십, 수백 개의 인형이 일렬로 선 상태로 정리되어 있었다. 리시안셔스와 헤어지기 직전, 공방에서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살아있는 사람처럼 실감 나게 생긴 인형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