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고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배를 타고 여기까지 무역을 하러 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배를 타고 오는 이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문명이 아주 발달한 곳이라 했습니다.”
조엘이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자 실망은 금세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나라에도 아가씨께 들려줬던 신화와 비슷한 내용의 신화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이 땅의 신화처럼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근데 그 나라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갑자기 온 대지가 불에 잠겨 사람들이 동상처럼 굳어 버리고,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변했다고만 전해집니다. 그래서 ‘암흑의 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생명이 발을 내디딜 수도 없는 땅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아예 지도에서도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암흑의 땅’이라고 불리게 된 거 말고는 위치도, 국호도 알 수 없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소득이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없다고 봐야 하는 걸까.
‘괜찮아, 아예 아무것도 모르던 때가 얼마 전이잖아. 짧은 사이에 이 정도면 많은 걸 알아낸 셈이야.’
그러니 작은 단서 하나라도 소중한 스위트피에게는 오늘 들은 얘기도 아주 감사한 정보였다.
‘잠깐만. 그런데, 내가 여기서 지낸 지 며칠째지?’
일부러 날짜는 세지 않아 이곳에 온 지 며칠째인지 알 수 없었다.
“조엘. 혹시 제가 여기에 온 지 며칠째인지 기억나요?”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걸 어떻게 정확하게 기억해요?”
“아가씨가 온 날이 정확하게 제 아버지의 기일이었거든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언급하는 조엘의 눈빛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엘의 상처를 헤집은 격이라 스위트피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라,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실수를 한 것 같아 막 사과를 하려 할 때였다.
“오늘로 정확하게 14일째입니다.”
“네……?”
“아가씨가 온 지 14일째라는 말입니다.”
그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정각을 알리는 성의 종소리였다.
“아, 이제 15일째군요.”
“…….”
“…왜 그러십니까?”
스위트피가 일부러 날짜를 계산하지 않은 것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싫으면서도, 그가 심장을 구하지 않아 자신이 죽게 될 상황도 두려웠다.
못난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나 리시안셔스가 더 이상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자신을 잊었다는 말일 테니까.
그래서 다른 의미로 더욱 무섭고 서럽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그런데 스위트피는 14일을 넘겨서 15일째가 된 오늘까지도 살아 있었다. 리시안셔스가 아직도 그녀를 위해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했다는 뜻이었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고,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그가 자신 때문에 또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살게 된 대신 다른 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 상황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죽는 것뿐인데, 이기적이더라도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데다가 자신이 죽으면 리시안셔스도 죽게 된다. 비록 리시안셔스는 삶에 미련이 없다 했지만, 스위트피는 그래도 그가 살아주었으면 했다.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이 좀 들어서요…….”
드래곤들이 신이 되기 위해 서로의 반려를 죽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아도 정확한 규칙은 모르는 조엘은 스위트피의 반응을 의아해하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아가씨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조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막 물건을 꺼내려던 그의 행동은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던 도서관 안에 찬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들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리 없이 열린 문을 통해 복도에서부터 찬바람이 들어온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작은 추위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 계셨군요.”
평소 스위트피를 돌봐주던 시녀가 침의를 입은 채로 서 있었다. 표정은 냉랭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가씨, 이만 침실로 돌아가시죠.”
그녀가 다가와 스위트피의 손목을 붙잡았다.
“공자님은 못 본 걸로 할 테니 조용히 돌아가세요. 아가씨는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자신을 옛날처럼 공자라 부르는 시녀를 보던 조엘의 시선이 스위트피에게 향했다. 스위트피도 시녀의 말대로 하자는 뜻으로 조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엘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 하녀의 모습과 스위트피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면서도 마지못해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먼저 나섰다.
“제가 사라진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우선 침실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시녀는 지금 어떤 얘기를 해도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위트피는 반쯤 끌려가다시피 복도를 지나 침실로 향했다.
스위트피를 침실 깊숙한 곳까지 들여보낸 시녀는 문을 닫고 나서야 큰 위기를 넘긴 것처럼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절 감시한 거예요?”
“감시한 건 아닙니다. 아가씨가 밤마다 침실을 벗어나신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아침에 깨우러 가면 바깥 공기 냄새가 나고는 했으니까요. 또, 정원의 꽃에 관해 물어본다는 핑계로 조엘과 대화를 나누신 뒤로 유독 조엘과 주고받는 눈길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시녀가 불안에 찬 눈길로 스위트피를 똑바로 응시했다.
“조엘과 마음이라도 통하신 겁니까?”
“절대 아니에요!”
“그럼 밤마다 둘이서만 만난 이유가 무엇인가요?”
밤마다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소한 걸 해명하는 건 지금 상황에선 별로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닌 거 같았다.
“설마…….”
“…….”
“디에고 님을 없애고 공자님께서 제 자리를 찾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으신 건 아니겠죠? 아가씨는 도망칠 생각으로 공자님을 돕는 건가요?”
시녀는 조엘을 이름과 옛날 호칭으로 번갈아 가며 썼다. 아마 목소리는 낮추고 있지만 심적으로 흥분한 상태라 그런 것 같았다.
조엘은 디에고를 물리칠 생각은 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대공의 자리를 찾아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버지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잃어버린 권력에는 욕심을 놓은 듯했다.
다만 그래도 한때 자신의 백성이기도 했는데 드래곤에게 고통받는 모습은 볼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자신의 의무이자, 아버지가 행하지 못했던 책임을 지려는 것이라고도 했었다.
“안 됩니다, 반려님.”
시녀는 스위트피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냥 이대로 있어 주세요.”
“…….”
“저 드래곤……. 디에고 님을 더 자극하지 말아 주세요.”
지금 그녀는 스위트피에게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디에고 님이 반려님을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아시잖아요. 반려님이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면 피를 보는 건 저희들 뿐입니다.”
“…….”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부탁드릴게요.”
보통 때라면 이 부탁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 정말로 자신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될 것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들기는 했다.
“제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계속 죽어가던데요.”
그러나 이미 목격한 것이 있었다.
“지하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가 봐요.”
자신과 상관없이, 디에고는 지하실에서 사람을 먹으며 기력을 보충했다.
“본인은 살고 싶어서 그들을 드래곤의 먹이로 주면서, 저한테도 그쪽을 편하게 살 수 있게 얌전히 있어 달라고요?”
드래곤이 편하게 인간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을 감금하고 유골을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닌 같은 인간들이었다.
“뭘 안다고…….”
제대로 치부를 들킨 것인지, 선을 지키며 일관된 태도를 보이던 시녀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우리가 살기 위한 방식이었어요! 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게 저희들이라고 마음 편했는 줄 아나요? 처음에는 중죄를 지은 죄수들로 막아보려 했지만, 점점 발작을 일으키는 횟수가 많아졌고 그만큼 많은 제물을 원하기 시작했어요.”
스위트피에게 뭘 아냐며 따지려 들던 시녀는 이윽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는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위트피의 눈에는 면죄부를 얻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드래곤에게 피해를 크게 입지 않으려면 저희 선에서 바칠 제물을 정하는 게 나았어요.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었고, 모두를 위한 일이었죠. 반려님은 저희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지 못할 거예요.”
“저는 그쪽을 나무랄 생각이 없어요.”
저들은 잘못을 저질렀고, 타인에게 잔인한 사람들로 보이기 싫어 내뱉는 말 또한 변명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에게 옳고 그름을 설교할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