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고린도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지하실에서 겪었던 일이 또 한 번 반복되려는 것이다. 지금은 디에고와 하늘을 나는 중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또 환각을 보게 되는 것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디에고가 억지로 끌고 나온 것처럼, 이번에도 스위트피의 뜻과는 무관하게 고린도는 스위트피를 집어삼켰다.
환각인지, 남의 기억인지, 혹은 자신의 전생인지 알 수 없는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 * *
세레티는 리시안셔스를 만났던 절벽 쪽으로 향했다.
‘오려나? 오겠지?’
마음속에는 기묘한 설렘이 가득 찼다.
「‘내일도 저를 만나러 와주시면 안 되나요?’」
꽃잎으로 그렇게 글자를 썼을 때, 리시안셔스는 이렇게 답했었다.
「네가 보고 싶어지면, 그때 올게.」
확신 없는 희망만 안겨주던 발언이었다.
세레티는 어리석은 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양피지 두루마리와 깃펜을 챙긴 채 절벽에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한 번의 만남으로 세레티가 이렇게까지 설렐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의 세상이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세레티는 기억이 시작된 때부터 신전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협소한 인간관계였으며 그마저도 가까운 이는 자신의 자매뿐이었다.
매일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일상을 보내던 세레티가 세상을 포기하려던 순간에 만난 새로운 존재는 무려 말로만 전해 듣던 드래곤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세상이 넓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앞이 안 보이는 세레티는 리시안셔스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빛을 마주했다.
그 빛을 또 한번 보고 싶었다.
“…….”
하지만 희망은 밤하늘 아래에서 천천히 무너져 내려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리시안셔스는 오지 않았다. 세레티는 추위에 몸을 잘게 떨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내가 재미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날 만나러 올 거야.
…만나러 올 수도 있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조금만 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리시안셔스는 오지 않았다.
그제야 세레티는 깨달았다.
‘리시안셔스는 날 보러 오지 않을 거야.’
내가 재미있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말이었을 거야.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건 금방 까먹었을 거야.
보고 싶어지면 오겠다는 말은 희망을 주는 발언이 아닌, 헛된 기대는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거다. 그걸 마음대로 해석한 자기 자신이 창피해졌다.
별로 울 만한 일이 아닌데도 괜히 서러워져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고 할 때였다.
“어……?”
세레티의 어둠 속에 두 개의 금빛이 스며들었다.
“왜…….”
놀라서 하마터면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뻔한 세레티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깃펜으로 서둘러서 글씨를 썼다.
‘왜 오셨어요?’
그러자 웃음기 서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보고 싶어지면 온다고 했잖아.』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어제는 오늘이 되면 널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인간화한 건지, 드래곤의 모습일 때보다 더 선명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생각이 나서.”
“…….”
“그래서 왔어.”
세레티는 차가워진 손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 * *
“으아아악!”
고린도가 보여 주는 환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하늘을 날던 디에고가 불안정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스위트피는 하마터면 손이 미끄러져 고린도를 놓칠 뻔했다. 특히나 디에고는 고린도에 계속 손을 대려고 했다. 불안정하던 날갯짓이 마침내 완전히 멎고, 디에고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아아아아!”
스위트피의 비명도 물론 함께였다. 손이 서서히 고린도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아직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억울함을 품은 채 스위트피는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쿠웅!
거대한 마찰음이 들렸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설마, 벌써 죽어서 고통도 못 느끼는 걸까?’
슬며시 눈을 뜬 스위트피는 땅과 부딪히며 날리는 흙먼지 탓에 기침을 하며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이유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디에고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변한 디에고가 고린도를 놓쳐 아래로 추락하던 스위트피를 끌어안고 땅과 대신 부딪히며 충격을 모두 흡수해 줬다.
덕분에 스위트피는 조금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드래곤인 디에고도 고작 이런 일로 다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살아 있다고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너…….”
상체를 일으킨 디에고의 눈빛이 형형했다. 스위트피는 갑자기 추락하게 되어서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반사적으로 그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디에고의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 억지로 그의 품에 끌려갔다.
“잡을 게 없어서 떨어질 것 같다던 말도 내 고린도에 손을 대기 위한 수작질이었어?”
“아, 아니야!”
“내 고린도에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디에고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는 비늘과 함께 날카로운 드래곤의 발톱이 자라 있었다. 자신을 해칠 것이라 확신한 스위트피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비굴하게 굴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모를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죽일 거면 빨리 죽여!”
스위트피는 외려 그렇게 센 척을 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스위트피의 목에 날카로운 발톱을 박을 것 같던 디에고는 들어 올린 팔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윽고 스위트피의 몸을 내던지듯이 놓아줬다.
“내가 어리석었어.”
그는 그 말만 남기고는 돌아서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의 정원에 추락한 탓에 수많은 사용인들이 달려 나왔으나 그들 중 디에고에게 쉽사리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놀라서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던 스위트피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기다리던 얼굴을 발견했다.
두꺼운 가방을 멘 조엘이 무뚝뚝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놀라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스위트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엘!”
스위트피는 늦은 밤을 틈타 도서관에서 조엘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누가 듣겠습니다.”
“목소리 낮춘 거예요. 반가워서 소리 지르고 싶은 걸 반을 낮추고, 또 거기서 반을 더 낮춰서 불렀잖아요.”
“반갑다고 소리 지른다는 생각부터가 이상합니다.”
“그만큼 기다렸다는 얘기에요.”
조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말이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뻔뻔하다고요? 괜찮아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어림짐작해서 내뱉은 말이 맞았는지 조엘은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리시안셔스가 자신에게 뻔뻔하다고 할 때마다 반쯤은 장난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조엘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니 자신이 뻔뻔한 면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해서 상처받을 스위트피가 아니다.
“어떻게 되었어요? 신화의 출처에 대해 알아보고 오겠다고 했잖아요.”
안부 아닌 안부 인사는 이걸로 되었다. 스위트피가 먼저 본론을 꺼내자, 조엘도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어느 나라인지 알아 왔어요? 저번에 말했던 환생이 있다는 나라의 신화래요?”
“아니요.”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던 조엘의 행동이 그대로 멈췄다.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느 나라인지 알아 왔냐는 말에 아니라는 거예요, 환생을 믿는다던 나라의 신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전자의 경우가 아니라는 겁니다.”
“…….”
“…….”
조엘의 말을 이해하는 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스위트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탓이었다.
“그럼…….”
황당함에 굳어버린 스위트피가 아주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대체 뭘 알아 온 거예요……?”
“…일단 그 눈길부터 어떻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제 눈이 어떻길래요?”
“엄청 무능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에이, 조엘이 착각한 거겠죠.”
굳어 있던 몸을 푼 스위트피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조엘은 뻔뻔한 스위트피의 모습에 황당해하면서도 할 말을 마저 꺼냈다.
“먼저 제 스승님께서는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에서 교수까지 하셨을 정도로 역사와 신화에 관련되어서는 아주 저명한 분입니다…….”
“그 저명한 분이 뭐라고 그러셨는데요?”
“이 분야에 있어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학자라는 말이죠.”
“그 세 손가락 안에 드시는 분이 뭐라고 했는지 빨리 말해 봐요.”
오랜만에 존경하던 스승을 만나 평소답지 않게 들떠 있던 조엘은 살살 웃으면서도 약 올리는 듯한 말투로 본론을 얘기라 채근하는 스위트피의 모습에 다시 차가운 현실로 돌아왔다.
“출처를 알 수 없다 하셨습니다.”
“이런 대답을 들려줄 거였으면 스승님 자랑은 왜 그렇게 길게 했어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조엘이 하도 제 스승의 자랑을 길게 늘어놓은 탓에 뭐라도 알아 온 게 있을 거라 기대했던 스위트피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조엘의 얘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