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김키|
“굼벵이야?”
“…….”
“아니면 거북이?”
“…….”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더럽게 느리네. 꼭 모시러 오라는 것처럼.”
스위트피는 이를 갈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걸음을 옮겨 디에고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도 아기자기한 티세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네가 늦게 와서 다 식었잖아.”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건 당신이야. 당신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방에 있기만 할 순 없어.”
“그 말은 내가 언제 찾아올지 알면 기다리겠다는 뜻처럼 들리는데?”
전혀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얘기긴 했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혀를 콱 깨물고 싶어졌다.
“왜 찾아온 거야?”
“자, 봐.”
디에고가 두 팔을 벌리며 스위트피에게 본인을 볼 것을 요구했다.
‘대체 뭘 보라는 거지…….’
어떤 반응을 원하는 건지 몰라 상당히 난감하기만 했다.
“날 걱정했다면서 반응이 영 별로네.”
“…뭐?”
“아직까지 걱정하고 있을까 봐 괜찮아진 모습을 보여 주러 왔는데 말이야.”
“아…….”
그제야 스위트피는 디에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지하실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디에고에게 걱정했다는 말을 했는데, 그는 지금 그때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네.”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데 자꾸 거짓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디에고의 날카로운 지적에 스위트피는 다시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대로 디에고에게 휘말리기만 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당신이 낫든 말든 상관없어.”
“언제는 날 걱정했다며?”
“내 눈앞에서 아프지만 않으면 돼. 눈앞에서 누군가가 아프면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아하.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가 서로를 걱정할 사이가 아닌 건 알아. 이제 와서 당신과 사이좋게 지낼 생각도 없어. 난 여전히 당신을 싫어하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드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거야. 당신같이 생명을 우습게 아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모를 테지만.」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 식은 찻물을 들이켰다.
“확실히 난 인간이 아니라서 네가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긴 힘들어. 그래도 지금 네 태도가 나쁘진 않아.”
“내 태도가 어떤데?”
“체념 섞인 순응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손아귀와 비례해 아이 장난감처럼 느껴지는 찻잔을 내려놓은 디에고가 예고 없이 스위트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위트피는 몸을 흠칫 떨기는 했지만 애써 피하지는 않았다. 스위트피의 광대를 스치듯이 어루만진 디에고가 제법 천진하게 웃었다.
“바로 그 태도야.”
“…….”
“어차피 넌 리시안셔스에게 못 돌아가. 그 녀석을 버린 건 다름 아닌 너니까.”
“…….”
“체념이어도 상관없으니까, 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봐. 네가 날 반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나도 약속은 지킬 테니까.”
스위트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무릎 위에 올려진 양손으로 주먹을 꾹 쥔 채 화가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디에고는 반박하지 않는 스위트피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씩,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일 또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디에고는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스위트피의 방을 나갔다.
스위트피는 혼자 남겨지고서야 이를 갈며 디에고의 손길이 닿았던 뺨을 손등으로 세게 문질렀다.
그러나 흰 피부만 붉어질 뿐, 디에고의 손길이 닿았던 기분 나쁜 감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약속했던 대로 디에고는 그다음 날에도 스위트피를 찾아왔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계속.
그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은 스위트피의 방 안에서 차만 마시다가, 또 어느 날은 난데없이 상인들을 불러 모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보라 시키기도 했다. 만약 리시안셔스가 금화를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갖고 싶은 걸 골라 보라고 했다면 스위트피는 망설이지 않고 품 안에 다 안지도 못할 만큼 마음껏 물건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에고가 주는 것 중에 갖고 싶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디에고를 방심시켜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상인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스위트피는 작은 물건 하나도 집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아침이야.”
역시나, 오늘도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방을 노크도 없이 쳐들어왔다.
마치 자신의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침없고 자연스러웠다.
‘대체 조엘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조엘은 스승을 찾아가 드래곤과 인간 반려에 관한 신화의 출처를 알아보겠다고 한 이후로 여태 소식이 없었다. 물론 조엘이 알아 온다고 하더라도 디에고가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이상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스위트피는 하루라도 빨리 정보를 얻고 디에고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온 디에고를 보던 스위트피는 한숨을 삼킨 채 고개를 돌렸다. 디에고는 귀찮게 말을 거는 대신 그런 스위트피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안 웃지.”
기껏 한다는 말이 저런 황당한 말이라니…….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걸까?
“인간이 좋아할 만한 건 다 해준 거 같은데, 매번 반응이 없네.”
자신의 가족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뻔히 알면서. 제게 좀 잘해준다고 과거를 잊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리시안셔스한테는 실실 웃었을 거 아냐. 좀 웃어봐.”
언제는 체념이라도 좋다더니, 참 많은 것을 요구한다.
디에고는 공감 능력이라는 게 없어 보였다.
‘내가 어떻게 본인의 얼굴을 보면서 웃기를 바라지.’
스위트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아, 그래. 너도 성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겠지?”
“…….”
“나가자.”
디에고는 스위트피를 위해서인 양 말했지만, 밖으로 끌려 나가는 것에 당사자인 스위트피의 의견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탑으로 향한 그는 스위트피를 둘러업더니 그대로 본체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동안 본체로 변한 리시안셔스의 발등을 타고 하늘을 난 적은 있어도, 드래곤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위트피는 무엇을 잡고 몸을 지탱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디에고의 회색 비늘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간지럽잖아.』
스위트피가 왜 손톱으로 비늘을 긁는지도 모르는 디에고가 짜증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발등에 앉을 때는 그나마 붙잡을 게 있고, 천장처럼 바로 머리 위에 드리운 드래곤의 몸통이 안정감을 주었는데, 지금은 잡을 것도 없고 광활한 하늘과 그대로 마주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부, 붙잡을 게 필요해……! 이러다가는 떨어지고 말 거야!”
추락할 거 같은 아찔함에 굴복한 스위트피가 디에고에게 애원하듯이 부탁했다. 디에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디에고의 머리에서 검은 뿔이 솟아났다.
『그거라도 잡든가.』
“…….”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디에고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셈이었다. 스위트피가 고린도에 손을 댄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하실에서 고린도의 힘으로 환각을 본 것도 스위트피의 뜻이 아니었다. 아마도 디에고가 힘이 약해져 고린도의 힘을 감당 못 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디에고의 고린도가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자신이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 스위트피는 디에고의 목에서 기다시피 올라가 머리에 자란 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확실히 손에 뭐라도 쥐고 있자 조금은 안정되는 기분이기는 했다.
“하아…….”
스위트피는 겨우 마음의 안정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래곤을 타면서 처음으로 보는 뻥 뚫린 하늘이었다.
리시안셔스와 하늘을 날 때는, 보통 발등에 자리를 잡고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시야에 막힘없이 하늘이 훤히 보인 날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푸른색을 띤 하늘은 맑았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가까이 닿은 하늘 풍경에 아름다움을 느끼기는커녕, 여전히 두려움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 이만, 내려줘……!”
『왜? 재미있잖아!』
“재미없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려 달라고!”
겁에 질린 사람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스위트피가 내리고 싶어 하는 이유가 납득이 안 되는 건지,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부탁에도 지상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위트피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어지러웠고, 눈물이 터져 나올 거 같았다. 고린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무, 무서워……!”
두려움을 느낄 때면 언제나 본능처럼 찾게 되는 이름을 금방이라도 부르게 될 것만 같았다.
“리, 리시…….”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