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실제 신화 속 내용도 이래요?”
“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드래곤은 신적인 존재라 이렇게까지 인간과 친숙한 존재로 나오지는 않는다. 신적인 존재가 아니면, 무시무시한 괴수에 가깝게 묘사가 되고는 했다. 특히나 드래곤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나라와 지역이 많아진 지금은 괴수 쪽으로 이미지가 굳혀 있었다. 그런데 드래곤이 인간과 사랑하여 결혼을 하는 신화가 있다니.
실제로 드래곤이 인간과 반려로 묶이긴 하지만 그건 신에 의해서지, 자의에 의해서는 아니었다.
“저희 공국의 신화는 아닙니다. 저희 공국이 무역으로 활발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다른 나라에서 온 상인이 자기네 나라의 신화를 퍼뜨린 것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나라가 어딘데요.”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그냥 추측하길 그렇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 신화를 제외한 공국의 다른 신화를 보면 드래곤은 너무 먼 존재거든요. 때문에 결이 다른 이 신화만 출처가 다른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도는 것이죠.”
“이 신화는 별로 도움이 되진 않는 거 같아요. 드래곤이 인간과 결혼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드래곤의 반려이지 않습니까.”
“신이 그렇게 정한 거지, 내 드래곤이 날 반려로 선택해 준 건 아니에요.”
스위트피는 숨길 생각도 없이 시무룩함을 표정에 드러냈다.
“내 드래곤은 날 어린애로만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이 신화가 더욱 신빙성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뜻이에요.”
“정작 신이 정한 반려도 아닌 드래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잖습니까.”
설마, 지금 조엘이 말하는 드래곤이 ‘디에고’를 뜻하는 건가?
스위트피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디에고가 절 사랑한다니!”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그 비슷한 감정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농담이라도 끔찍하니까.”
“농담은 아니었습니다만, 일단 알겠습니다.”
조엘은 단 한 마디도 스위트피에게 져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히 얄미워서 그를 흘겨보긴 했지만, 내심 스위트피도 조엘의 추측을 인정하는 바였다.
정말 싫지만…….
‘디에고가 내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아.’
사랑이라고 단정 짓기는 싫고, 또 객관적으로 봐도 아직 그렇게까지 정의 내리는 건 섣부르기는 하지만, 결코 평범한 감정의 깊이는 아니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엘이 앞에 있는 책장을 지나쳐 세 번째에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그 책장에는 동양의 신화나 역사에 관한 책들이 한가득이었다.
“‘전생’이나 ‘환생’의 개념을 아는지요?”
“그게 뭐예요?”
“머리카락이 까만 사람들만 살고 있는 땅이 있는데, 그곳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상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들은 인간은 끝없이 윤회한다고 믿고 있는데…….”
“윤회가 뭐예요?”
“…….”
아예 개념 자체를 모르는 스위트피를 보고 조엘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누군가에게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동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말이 많은 스위트피도 이번에는 조엘의 침묵을 얌전히 기다려줬다.
“쉽게 얘기하면 그들은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신께서 천국으로 우리의 영혼을 거두시잖아요.”
“사후 세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죽으면 그 영혼을 가지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 것을 ‘환생’, 현재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을 ‘전생’이라고 부르죠.”
아직 스위트피에게는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지금 조엘이 하려는 말도.
“고린도를 통해서 봤던 모습이 제 전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확신은 가질 수 없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져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말도 안 돼요. 죽으면 끝이지, 환생이나 전생 같은 게 있을 리가요.”
“신화 속의 존재일 뿐인 줄 알았던 드래곤이 부활한 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조엘의 말은 너무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 드래곤을 목격했으니 당연히 그들의 존재를 믿었지만, 만약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드래곤이 실존한다 알려 줘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고린도에서 봤던 게 제 환생이라고요…….”
“아니요, ‘전생’입니다.”
조엘이 아직 환생과 전생의 개념을 헷갈려 하는 스위트피의 말을 단호하게 정정해주었다.
‘만약 그게 내 환, 아니, 전생이라면…….’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조엘이 고린도가 보여준 풍경을 자신의 전생이라 확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능성만 쥐고 있자는 것뿐인데도, 거부감이 들었다.
만약 그때 본 풍경이 정말 자신의 전생이고, 리시안셔스가 언니가 아닌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다면 기뻐해야 할 일일 텐데도.
스위트피는 공연히 그것이 자신의 전생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조엘.”
지금 당장 세레티가 자신의 전생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스위트피는 지금 당장 중요하다 생각되는 단서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이 동화 속에 나오는 신화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검은 드래곤과 인간이 긴밀하게 교류하는 모습은 스위트피가 고린도를 통해서 봤던 세레티와 리시안셔스가 교류하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알아는 보겠습니다. 때마침 제 스승께서 역사학자이시고, 디에고의 등장으로 드래곤에 대한 사료를 많이 수집하고 계십니다.”
“부탁할게요, 조엘.”
“아가씨가 제게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가 아니어도 제가 하려는 일이기도 하고, 공국의 백성들을 위한 일이니까요.”
서로 나눌 대화는 다 나눴으니, 이제 조엘과 떨어져야 할 때였다. 지금의 그는 일개 정원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공국의 소공자였던 조엘과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면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반려님!”
어떻게 이렇게 때를 잘 맞출 수 있는 건지…….
스위트피가 조엘을 만나기 위해 따돌렸던 시녀의 목소리가 근방까지 들렸다. 성의 구조를 잘 아는 조엘은 반대편에 있는 출구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스위트피의 앞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여기 계셨군요.”
하루 종일 스위트피를 찾아다닌 것인지 시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괜히 미안해지긴 했지만 이렇게 시녀가 항시 곁을 지키려 들면 조엘과 만나거나 디에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곤란했다.
“혼자서 책을 좀 읽고 싶었어요.”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저와 함께 가셔야 해요.”
“어디로 가려고요?”
그런데 시녀는 단순히 스위트피를 찾은 것에 그치지 않고 어디로 가자며 손을 잡고 이끌려고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스위트피가 하녀의 손을 붙잡고 멈춰 섰다.
“디에고 님이 지금 반려님을 찾고 계세요.”
아직도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줄 알았던 디에고가 지금 자신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땀까지 흘릴 정도로 열심히 자신을 찾으려 한 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단번에 납득이 되는 순간이었다. 디에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애타게 찾은 것이다.
스위트피는 디에고의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시녀의 손을 놓고 걸음을 옮겼다. 디에고의 불호령을 피하려 빠르게 앞서 걷는 시녀를 따라 스위트피의 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거의 뛰다시피 한 스위트피는 자신이 머무는 침실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의자에 기대어 앉아 손잡이에 걸친 검지를 초조하게 까딱거리며 시간을 세던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지 피부는 창백했지만, 말하는 꼴을 보니 살만해진 것은 분명한 듯싶었다.
“가까이 와.”
마치 개를 부르듯 가벼운 손짓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디에고와 마찰을 일으켜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억지로라도 잘 지내야 그를 방심시킬 수 있을 터였다.
스위트피가 머뭇거리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레 시녀도 따라 들어오려 했다.
“넌 왜 들어와? 방해 말고 가.”
그러나 디에고는 그저 열심히 일하려던 거뿐이었던 시녀에게 차갑게 일갈하며 내쫓았다.
시녀는 스위트피를 두고는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문을 닫았다.
완벽하게 둘만 있으라고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 준 덕에, 스위트피는 디에고와 둘만 남았다.
마지못해 그의 앞으로 다가가려 한두 걸음 뗐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