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 누구도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자리에 스위트피가 서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그 사실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늘 시끄럽게 굴던 영악하고, 뻔뻔하며, 얄밉던 꼬마 반려는 사라졌다. 알아서 제게 자유를 주었으니, 이제 자신은 귀찮은 부모 노릇은 그만두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평온한 날들을 보내면 된다.
하지만 이제 스위트피가 찾아올 일이 없는 이 숲은 리시안셔스에게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조그맣던 꼬마와 몇 년을 함께 지내면서, 제 안에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다.
스위트피를 몰랐던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처음부터 스위트피의 존재는 없었던 것처럼 죽음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리시안셔스에게는 주어진 일이 많았다. 만약 스위트피가 디에고의 손에 당장 죽지 않는다면 14일마다 스위트피를 위해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해야 한다. 자신이 거둔 아이니만큼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아이를 찾아 나서는 게 맞다고 생각되었다.
모든 걸 너에게 맞춰줬는데 무엇이 그리 불만이라 어리석고도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디에고가 너에게 어떤 사악한 꼬드김을 한 것인지.
한쪽 무릎을 굽힌 리시안셔스는 무덤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재회하자마자 할 말은 아니지만, 다시 작별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일은 또 하기 싫었는데…….”
사랑은 괴로운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특히나 더 괴로운 짓이었다. 그 괴로움을 안겨준 신은 어쩌면 드래곤들에게 신이 될 기회가 아니라 형벌을 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차피 내 죽음은 네 것이니, 삶은 그 아이에게 양보해 줘.”
너도 네 삶에선 날 선택해 주지 않았잖아.
“다시 안녕, 세레티.”
결정을 내린 리시안셔스는 굽히고 있던 무릎을 세우고 일어섰다.
스위트피를 찾아야만 한다.
지금 느끼는 괴로울 정도의 적막은 인간 아이를 향한 단순한 애착 대상의 부재 때문인지, 혹은 그보다 더 큰 감정의 산물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스위트피를 찾게 된다면 이 감정의 실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위트피를 향한 감정의 종류를 생각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제게 좋아한다 고백하던 스위트피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져 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이 꼭 스위트피의 마음과 같은 것처럼.
마음을 정하고 무거운 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그의 눈에 작은 꽃이 하나 보였다. 원래 이곳에는 나 있지 않던 꽃이었다. 스위트피를 닮은 듯한 사랑스러움에 저절로 손이 뻗어나가 조심스럽게 꽃잎을 어루만졌다.
항상 자신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뻗던 스위트피의 손길과 닮은 감촉에 리시안셔스는 눈을 감았다.
그제야 그는 스위트피가 떠난 지금,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자각했다.
* * *
작은 공국이긴 해도 왕이나 다름없는 자의 성이라 그런지, 도서관은 규모가 아주 큰 편이었다. 스위트피는 조엘의 도움을 받아 가며 드래곤에 관한 자료를 찾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 뿔이 디에고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네, 드래곤의 뿔은 고린도라고 하는데, 그 고린도는 원래 제 드래곤의 것이었어요.”
“그 뿔의 원래 주인이라는 드래곤은 아가씨의…….”
“제 진짜 반려예요.”
어쩔 수 없이 스위트피는 조엘에게 모든 상황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해줬다.
“그래서 드래곤들끼리 서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많았던 거군요. 전 그들이 영역 다툼이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드래곤은 짐승이 아니에요.”
“영역 다툼은 인간들끼리도 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세상에 드래곤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전후 사정을 아는 사람은 드래곤의 반려로 선택된 인간 말고는 없다고 봐야 했다.
“아, 그리고…….”
“또 다른 얘기가 더 있습니까?”
스위트피는 자신이 고린도를 통해서 본 환각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런 일에 관해서 조엘이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 자신이 본 환각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또 다른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 고린도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요.”
“굳이 다른 드래곤의 것을 훔친 것이니, 물론 그러할 테죠. 어떤 힘입니까?”
“일단 첫째로 그 뿔만 솟아나면 더 세지는 거 같고, 또…….”
결국 스위트피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그냥 말도 안 되는 환각을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주 먼 과거의 일을 보여 주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고린도가 보여 주는 환영 속에서 아가씨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봤고, 그 여자가 된 것처럼 느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제가 그 여자가 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다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저와 너무 닮았는데, 전 그런 기억이 일절 없잖아요.”
조엘은 생각에 잠긴 듯 대답이 없었다.
워낙에 표정이 없는 편인지라 과연 조엘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황당한 소리일 테니 말이다.
“무슨 생각 해요?”
인내심이 길지 않은 스위트피가 결국 조엘을 채근했다.
“아가씨가 한 얘기를 전에 들어본 것 같아서요.”
“앞에 했던 고린도 얘기요, 아니면 고린도에 관련된 환각 얘기요?”
“일단 앞에 했던 얘기 중 고린도가 아닌 드래곤과 반려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전에도 드래곤의 반려가 있었어요? 지금과 똑같은 전쟁이 있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전쟁은 모르겠지만 인간과 반려를 맺은 드래곤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긴 했습니다. 드래곤들의 반려가 언제부터 운명적으로 나타나고, 전쟁이 시작될 거라 알려진 시기가 모르겠지만…….”
스위트피가 알기로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드래곤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며 반려가 생기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과 상관없이 아주 오래전에도 드래곤에게 반려가 있었을 수도 있다.
‘반려’의 의미라는 건 원래 신이 억지로 묶는 것이 아닌, 자의로 선택한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평생을 사랑할 사람이니 말이다.
“잠시만요.”
조엘은 몸을 일으키더니 익숙하게 책장에서 얇은 책을 하나 꺼내왔다.
“이게 뭐예요?”
“동화책입니다.”
“갑자기 동화책을 왜…….”
“저희 나라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신화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림책과 함께 정리한 내용이죠.”
조엘이 책을 펼쳤다. 얇고 큰 동화책에는 귀여운 그림체로 드래곤들이 그려져 있었다.
“옛날 옛적에 드래곤과 인간들이 모여 사는 땅이 있었습니다.”
높낮이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조엘이 어울리지 않게 동화책을 느릿하게 읽어 내려갔다.
“신은 인간과 드래곤을 공평하게 사랑했어요. 그러자 드래곤들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답니다.”
우리는 인간들보다 훨씬 강하고 우월한데, 어째서 인간들과 세상을 공평하게 나눠 가져야 하지?
왜 우리는 인간들을 지켜줘야 해?
그다음 장의 드래곤들은 아주 흉포한 표정으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드래곤들은 첫 번째로 태어나 가장 신의 사랑을 받는 검은 드래곤에게 말했어요. 우리가 인간들을 밀어내고 세상을 지배하자.”
그다음 장에 나온 그림에는 검은 비늘을 가진 뿔이 달린 드래곤이 나왔다. 다른 드래곤들보다 훨씬 더 큰 데다가 화려한 뿔이 그가 가장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그림 속의 드래곤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물론 그림 속 드래곤의 모습은 실제 드래곤과는 조금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리시안셔스의 본체와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뿔이 달린 검은 드래곤의 모습을 보자 리시안셔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드래곤은 형제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인간들이 정말 신의 사랑과 드래곤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졌죠. 그래서 검은 드래곤은 가장 특별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산다는 곳을 방문했답니다.”
“…….”
“그러나 특별하고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인간을 만난 드래곤은 실망했답니다. 너무나 볼품없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죠.”
내용은 아이들의 동화인 만큼 아주 간단했다.
여자가 얼마나 볼품없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아마 아이들은 소문과 달리 못생긴 외모를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검은 드래곤은 여자의 내면을 보고 사랑에 빠졌답니다.”
“…….”
“검은 드래곤과 인간 여자는 서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드래곤과 인간들도 이들을 축복했어요. 드래곤과 인간 여자는 그렇게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답게 내용은 아름다운 해피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