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쾅!
몸이 뒤로 밀쳐지며 여린 어깨와 등이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머리가 먼저 벽에 부딪혔다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윽…….”
인상을 잔뜩 찌푸린 스위트피의 흐린 시야로 디에고의 섬뜩한 눈빛이 보였다. 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스위트피의 얼굴을 주시했다.
“내 고린도에는 왜 손을 댔지?”
“…….”
“이번에는 무슨 수작이야. 내가 여기에 있는 건? 그건 누구에게 들었어?”
인간화된 모습으로도 어깨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분노에 의해서인지, 몸이 약해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디에고가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워하는 상황이라 해도 스위트피가 물리적으로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지하실에는 풀 한 포기 자라있지 않았고, 지하실에 있는 동물도 쥐밖에 없는데 그들은 사람의 맛을 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즉, 스위트피가 이 지하실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는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우, 우연히…! 우연히 들어온 거야!”
어깨를 짓누르는 손이 어쩌면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커질 때쯤, 스위트피가 디에고의 손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서 전과 똑같이 뾰족하게 대꾸하며 언쟁을 벌여봤자 자신만 불리할뿐더러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연히?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제발, 이 손부터 놓고 얘기해!”
“아하. 인간들 중에 내 허락 없이 너에게 입을 쉽게 놀린 자가 있는 모양이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성을 돌아다니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거 같은데, 이 시간에? 탈출할 기회를 찾았나 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추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디에고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당신을 찾아다녔어!”
“거짓말 마. 네가 나를 왜? 그럴 리가 없잖아!”
“걱정되니까!”
어깨를 붙잡은 손에 일순간 힘이 더 들어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무자비하던 손아귀의 힘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지금이 기회였다.
“오랫동안 안 보여서 당신을 찾아다녔어…….”
스위트피는 그가 또다시 자신을 의심하며 추궁할 틈을 주지 않으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을 쏟아냈다.
“성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당신의 행방을 물어봐도 알려주지는 않지,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지……. 그래서 밤마다 당신이 돌아올까 봐 성 밖을 돌아다녔던 거야. 그러다가 사람들이 지하실에 들락거리는 걸 우연히 보고 들어온 것뿐인데…….”
“네가 날 걱정했다는 그 허튼소리를 믿으라고?”
“당연히 걱정했지. 당신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떡해?”
지나치게 온순한 태도와 달콤하기만 한 말은 외려 의심을 크게 살 수 있었다. 이미 일전에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쉽게 속지 않는 모습을 보였었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스위트피는 새침한 표정으로 디에고의 말을 받아쳤다가 그를 살피는 척하며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렸다.
“겨우 당신을 발견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서…….”
“…….”
“그래서 걱정했던 거야.”
“내 고린도에는 왜 손을 댔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게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거 같아서 그랬어. 나쁜 의미는 없었어. 내가 그 뿔에다가 손을 대봤자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거짓말이 늘기는 했지만…….”
“거짓말 아니야.”
디에고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거짓말이 늘기는 했으니 말이다.
스위트피는 진실을 얘기하는 디에고의 말을 단번에 반박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걱정할 사이가 아닌 건 알아. 이제 와서 당신과 사이좋게 지낼 생각도 없어. 난 여전히 당신을 싫어하니까.”
“…….”
“하지만 누군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드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거야. 당신같이 생명을 우습게 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모를 테지만.”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은 사람을 이토록 완벽한 거짓말쟁이로 탈바꿈시켰다. 다행히도 스위트피의 거짓말은 생각보다 효과가 크게 나타났다. 디에고는 붙잡고 있던 스위트피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네 말에 속았다고 착각하지 마. 널 몰아세우는 일이 재미 없어서 놔주는 거뿐이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형형하던 기운은 완전히 누그러진 상태였다.
“당장 나가.”
“…….”
“그리고 다시는 이 안에 발도 들이지 마.”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스위트피는 그대로 나가려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디에고를 돌아봤다.
“당신은?”
“때가 되면 나갈 거야.”
벽에 기대어 앉은 디에고의 손등에 비늘이 돋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마 기력이 없는 탓에 인간화가 금방 풀릴 듯했다. 더 이상 대답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디에고를 잠시 응시하던 스위트피는 절뚝거리며 지하실을 나오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
계단을 올라오며, 스위트피는 자신의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설마 디에고가 아파하는 게 불쌍해서?’
스위트피는 힘겹게 계단을 오르다가 그대로 벽을 짚고 잠시 멈춰 섰다. 자신이 한 생각이 너무 황당했던 탓이었다.
동정하긴 누굴 동정해.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망치고 파괴한 원흉인데.
분명 처음 이 지하실을 내려가 고통에 잠겨 있는 디에고를 봤을 때만 해도 연민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디에고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 거지…….
스위트피는 잠시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된 시기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정확히는 디에고에 의해 고린도를 통해 보던 환각에서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맨 처음에는 디에고의 흉흉한 기세에 두려움을 느꼈으나 점점 다친 짐승처럼 몸을 떨며 사납게 구는 모습에 조금 안쓰러움을 느낀 것도 같다.
마치, 환각 속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세레티라는 여자가 느꼈을 법한 감정이 전이된 것처럼.
“말도 안 돼.”
디에고의 능력은 타인을 환각 속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능력은 환각이 아니라 타인의 아주 먼 과거를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저 능력은 디에고의 것이 아니라 리시안셔스의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저런 힘을 쓸 때마다 고린도가 솟아 있었고, 이번만 해도 고린도에 손을 댔다가 환각인지 머나먼 과거인지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저 고린도는 본래 리시안셔스의 것이니까.
남의 것을 빼앗고 몸에 심었지만 감당이 되지 않아서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이라면?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린 스위트피는 다시 무거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다리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고린도를 통해 보았던 환각, 혹은 과거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만약 그 환각 속에 나온 언니가 정말 내 언니가 맞다면, 베일을 쓰고 있던 여자도 내가 맞을까? 하지만 이름도 다르고, 무엇보다…….’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어.
차분하게 정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만 쌓여가고 속 시원한 정답은 하나도 도출해낼 수 없었다.
특히나 베일을 쓰고 다니던 자신의 모습은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환각 속에서 마치 그 여자와 자신이 하나가 된 듯이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어쩌면 리시안의 연인이 언니가 아닐 수도 있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의 수도에서 디에고를 처음 마주했던 날, 그날 보았던 환각 속에서 리시안셔스는 똑같이 베일을 쓴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 물론 이후에는 자신의 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긴 했지만.
제 마음대로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환각은 모두 짤막한 조각이었다. 전체적인 틀을 보면 예상하고 있는 바와는 분명 다를 수도 있다.
‘리시안의 말대로 내가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게 내 매력이니까.’
하지만 만약 디에고가 알려 준 진실이 별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해도,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스스로 리시안을 떠났잖아.’
하지만 적어도 그를 좋아하는 게 괴롭지는 않을 테니까.
또한, 자신 때문에 리시안셔스가 다른 반려를 죽이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위트피는 계단을 오르며 마음으로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꾹 억누르며 참아냈다. 조금 더 진실의 열쇠를 쥐고서 그를 찾을 수 있도록.
***
숲은 고요했다. 언제나처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분명 이러한 고요함이 익숙하고 평온하게 느껴져야 하거늘, 그는 숲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낯선 기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지독한 적막함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리시안셔스!」
이 숲에 조그마하던 여자애가 허락도 없이 방문하던 순간들이 눈앞에 그려진 듯 선연했다.
“꺼지라고 해도 기어코 내 옆에 붙어있더니…….‘”
이제는 꺼지라는 말은커녕, 생각으로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놈을 따라서.
처음에는 제게 달라붙던 여자애가 태도를 달리한 것에 어이가 없었고, 그다음은 허전했고, 또 그다음은 허망했다. 리시안셔스는 그 비슷한 기분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이런 감정을 인간들의 언어로는 상실감이라고 부른다.
보내주려 했다. 어찌 되었건 그건 그 아이의 선택이다. 디에고는 위험한 놈이지만, 그런 위험을 선택한 것도 본인의 몫이니 죽게 되더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 아이가 죽으면 자신도 죽겠지만, 어차피 이생에는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억지로 봉인에서 깨어나 숨을 쉬며 낮과 밤을 보내고, 또 하루를 견뎌야 하는 것이 곤혹일 뿐이었다.
그 아이는 기나긴 시간 중 스쳐 지나간 짤막한 인연일 뿐이었고, 지루한 삶에 작은 재미를 준 정도의 존재였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었다.
기나긴 시간 속에 고작 스쳐 지나갈 짧은 인연, 지루한 삶에서 작은 재미를 주는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무서운 파급력을 가진 존개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내가 있을 곳은 네 곁인데…….”
리시안셔스의 머릿속에서 바람에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하던 베일이 떠올랐다. 그 베일이 절대 벗겨지지 않도록 야무지게 붙잡고 있던 작은 손과, 슬쩍 손을 뻗자 손끝을 스치던 베일의 감촉도 생생하다.
“분명 그러할 텐데…….”
그러나 그 회상 속의 주인공은 어느새 베일을 벗고 다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리시안!」
제 오래된 연인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스위트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