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디에고의 앞발을 밟았다. 그가 그르르, 거리는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
혹시 깨어난 것은 아닐까,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봐도 디에고가 난폭하게 군다거나 포효하는 등의 움직임은 없었다. 스위트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행동에 나섰다. 끙끙거리며 디에고의 등에 올라탄 스위트피가 검은빛을 뿜으며 아주 미세하게 진동하는 뿔을 향해 마침내 손을 뻗었다.
스위트피의 손끝이 본래 리시안셔스의 것이었던 고린도에 닿는 순간이었다.
“어……?”
그 순간의 기분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스위트피는 자신이 고린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하고 낯선 감각에 뒤늦게 고린도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누군가가 억지로 붙여놓은 것처럼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고린도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스위트피를 덮쳐오고 있었다.
“리, 리시…….”
위험에 처할 때면 습관처럼 부르던 이름을 입과 마음, 둘 다 부르지 않으려 스위트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린도의 어둠에 잡아먹혀 버렸다.
***
깜빡, 깜빡.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낯선 풍경에 저절로 입을 벌렸다.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천장은 과장을 조금 보태 산처럼 높았는데, 책장은 거의 천장에 닿을 만큼 거대했다. 곳곳에 나 있는 창문은 천장과 바닥을 연결할 만큼 길었고, 창가로 들어오는 오후의 황금빛 햇살은 부유하는 먼지마저 보석처럼 보일 만큼 눈부셨다.
『굳이 그런 짓을 왜 하는 거야?』
그러나 왕족들이 살법한 성처럼 아름다운 도서관의 내부 풍경보다도 스위트피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설마, 디에고……?’
두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회색 드래곤이 책상 위에 앉아 베일을 쓴 한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드래곤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아주 작고 볼품없긴 하지만, 분명 디에고가 맞았다.
그리고 베일을 쓴 여자는 아마도…….
‘나와 똑같이 생긴 여자겠지.’
여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이 쌓여 있었는데, 더듬거리며 그중 한 송이를 고른 여자는 꽃을 빈 페이지 위에 올렸다. 그러자 꽃은 본래 종이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책 속의 그림이 되었다. 깃펜을 집은 여자는 형태가 느껴지는 것처럼 종이를 더듬거리며 꽃 그림에 닿지 않게 글을 써 내려갔다.
『네가 그런 행동을 한다고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아.』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계속하는 거야?』
“내가 할 일이니까.”
답답할 정도로 베일을 꽁꽁 뒤집어쓴 여자는 귀찮게 말을 거는 디에고의 말에 일일이 계속 답해 줬다.
『네가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고, 신의 말씀을 받아 적고 관리해도, 인간들은 네가 아니라 너의 자매를 찬양해.』
“……그건 당연한 거야. 에리카는 나와 다르게 완전하니까.”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든 우울한 기분은 떨쳐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디에고도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내가 이런 얘기만 해서 기분 나쁘지?』
“그런 거 아니야.”
『리시안셔스 때문에 날 떠맡게 된 걸 후회하면서.』
“나는 디에고 널, 내 친구라고 생각해.”
『그렇겠지. 넌 내 앞에서만 너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디에고.”
『하지만 좋아하는 건 리시안셔스잖아.』
디에고의 목소리는 투정을 부리는 거 같기도, 화를 내는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손바닥만큼 작은 몸으로 언짢은 기분을 티 내봤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보다 내가 널 먼저 만났어야 했어.』
“…….”
『내가 완전했다면 그날 너를 구한 건 나였을지도 모르는데.』
스위트피는 홀린 듯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스위트피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던 그때의 그 풍경이었다. 에리카와 대화를 나누고 밤이 되자, 신전 밖으로 나온 여자가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안 돼!”
여자가 떨어지자 스위트피가 딛고 선 바닥도 동시에 무너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스위트피와 여자는 바다에 빠지거나, 바위에 부딪혀 죽지도 않았다. 어느새 여자와 한 몸이 된 스위트피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노란빛을 발견했다.
‘저 눈은…….’
어둠 속에서 빛의 형태로만 보였으나 스위트피는 저것이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리시안셔스의 눈동자와 닮은 색이었기 때문이다.
몸이 낚아채졌다. 이 감각조차 익숙했다. 드래곤의 갈고리 같은 발에 낚아채인 것이다. 스위트피는 드래곤에게 붙잡힌 상태에서도 자신의 베일이 벗겨지지 않도록 억세게 붙잡았다.
드래곤은 가뿐하게 스위트피를 절벽 위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린 스위트피, 혹은 세레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놀래킬 생각은 없었어. 널 해칠 생각도 없고.”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얼굴도 궁금했으나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던 자신은 어차피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하지만 희한한 것은 저 눈부신 금안만큼은 선명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암흑뿐이던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 겪은 빛과 색이었다.
“아…….”
목소리를 내려던 세레티는 황급히 입을 도로 다물었다.
‘내 목소리는 예쁘지 않잖아.’
불완전한 자신의 목소리는 어쩌면 쇠를 긁는 것처럼 흉측하게 들릴 것이다.
에리카는 세레티의 목소리가 새의 지저귐처럼 사랑스럽다고 했으나, 제 자매는 언제나 자신을 위로해주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한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은데…….’
세레티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마음을 전할 방법을 열심히 생각했다.
“궁금한 사람이 있어서 찾아왔어. 듣자 하니 여기엔 나와 똑같이 첫 번째로 만들어진…….”
반면,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정작 세레티에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이유를 묻지 않고 본 목적을 꺼냈다. 그러나 제 자매를 제외하면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세레티에게는 그의 무심함은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하던 말을 멈춘 것은 남자 쪽이었다. 스위트피는 근처에 있던 꽃잎으로 글자를 만들었다.
‘당신의 눈이 아름다워요.’
살려준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고맙지는 않았다. 미련 없는 삶을 억지로 이어붙이게 만든 것이니 조금은 밉기까지 했다. 그러나, 남자의 눈은 세레티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빛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을뿐더러 어둠이 세상의 전부였던 세레티에게는 남자의 눈이 태어나 처음으로 겪고, 앞으로도 유일할 빛이었다.
두 개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름이 뭔가요?’
두 번째 질문에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을 해 줄 마음이 없는 건가…….
조금 시무룩해질 때였다.
“리시안셔스.”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신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러는 넌?”
‘세레티’라는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대외적으로 사람들은 신이 만든 첫 번째 인간인 세레티는 에리카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세레티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대의 이름을 물었으면 본인의 이름도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남자의 금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실린 것을 발견한 세레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이 드래곤을 기분 나쁘게 하지 말고, 이제 그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
세레티는 바닥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
세레티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남자가 툭, 던지듯 가볍게 물었다.
“앞이 안 보여?”
하필이면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말에 세레티는 할 말을 잃었다.
날 비웃을 거야.
어떤 아픈 반응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되었다. 저절로 손끝이 말렸고, 손톱이 여린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데 의외로 리시안셔스의 반응은 아주 덤덤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별일이 아닌 듯 넘어가고 있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는 거 같길래, 의아해서 물어본 거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긴장되는 탓이었다. 세레티는 급하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께서 신전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무리 앞이 보이지 않아도 절벽 밑으로 추락하던 자신을 들어 올려 허공을 날아 절벽 위에 다시 내려주는 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꽃잎을 이용해 그리 묻자,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대답했다.
“궁금한 사람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이제 됐어.”
“…….”
“누굴 만나도 너보다 재미있을 거 같진 않네.”
…내가 재미있다고?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어본 적이 없던 세레티였다. 항상 신전에만 갇혀있었고, 신전의 사제들과도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세레티가 첫 번째 인간인 것을 알면서도, 세레티를 대행하는 에리카를 진짜 첫 번째 인간처럼 대우하며 따르고, 진짜 세레티는 은근하게 배척하고는 했다. 그야 이 세상에 앞이 안 보이는 존재는 저 하나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를 불쾌해하지 않고 재미있게 여겨주는 유일한 존재…….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꽃잎으로 다시 글자를 만들었다.
‘내일도 저를 만나러 와 주시면 안 되나요?’
세레티는 리시안셔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스위트피.』
기대와는 다르게 들려온 것은
『스위트피!』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자신을 부르는 디에고의 목소리였다.
***
“아아악!”
눈을 뜨자마자 스위트피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고통과 함께 잠들어있던 디에고가 마침내 눈을 뜬 탓이었다. 디에고의 두 눈은 리시안셔스와는 다르게 아름답지 않았다. 핏발이 선 디에고가 스위트피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아직 본체인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인지하고는 서둘러 인간화를 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선 디에고는 비틀거리면서 스위트피에게 다가왔다.
“오, 오지 마……!”
두려움에 잠긴 스위트피가 뒷걸음치며 손을 내저었으나, 그 손은 디에고에게 붙잡혀 그에게 힘없이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