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67화 (67/120)

<67화>

스위트피는 조엘의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의 말대로 해 보는 것 말고는 지금 당장 마땅한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위트피가 제안을 받아들이고,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바로 조엘이 위험한 계획을 슬며시 꺼낸 당일 밤을 날로 잡았으니 말이다.

디에고의 상태가 언제 호전되어 지하실을 빠져나올지 모르는 데다, 호전된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틈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디에고는 가장 위험한 상태인 동시에 유일하게 틈을 노려볼 수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전날 우연히 지하실을 내려갔던 것보다 더 늦은 시각, 스위트피는 똑같은 장소로 향했다. 인간의 맛을 본 쥐들에게 또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치마 안쪽, 다리를 붕대로 칭칭 감는 만반의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조엘의 말로는 이 시각이면 디에고가 ‘식사’를 끝내고 사용인들이 ‘청소’를 끝낸 후로, 그가 깊게 잠들어 있을 거라 했다.

그는 애써 그 과정을 순화해서 얘기하긴 했지만 이미 이야기를 다 전해 들은 스위트피는 그가 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이었다.

‘식사’란 인간들을 잡아먹어 쇠약해진 기력을 보충하고, ‘청소’란 그가 뱉어낸 인간들의 뼈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끔찍해…….’

이미 자신의 가족을 죽인 그 날로부터 끝난 사이이긴 하지만, 디에고를 향한 경멸과 혐오는 더욱 짙어질 뿐 옅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그와 계속 함께하게 된다면이 전제이긴 하지만.

“조엘!”

스위트피는 철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조엘에게 불편한 다리로 서둘러 걸어갔다.

“…진짜로 오셨군요.”

“그 떨떠름한 반응은 뭐예요? 마치 진짜로 올 줄 몰랐다는 것처럼…….”

“진짜로 이 계획에 따라주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조엘이 먼저 제안한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일절 없지 않습니까. 위험부담은 아가씨가 다 떠안게 될 테니까요.”

“아니죠. 디에고는 제가 지금 필요한 상황이라서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남아 있다면 절 해치지 않을 거예요. 제정신이 아니라면 곤란하긴 하겠지만. 오히려 제가 디에고가 무서워서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면서 조엘을 넘길 수도 있잖아요.”

“위험한 상황에는 절 넘기실 겁니까?”

“농담이에요, 안 넘길 거예요.”

전혀 재미없는 농담을 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그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위험한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혹시라도 저한테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미안하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저한테 미안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다행이고요.”

위험한 일을 앞두고도 해맑아 보이기까지 하는 스위트피의 얼굴을 슬쩍 본 조엘이 머뭇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위험한 일이라는 자각이 없어 보여서 걱정입니다. 그 괴물이…….”

디에고를 ‘괴물’이라 부를 때, 조엘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고는 했다.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지만 그 역시 두려움을 이겨내려 하는 것이었다.

“지금 얼마나 예민하고 흉포한 상태인지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알고 있어요. 어제 그런 끔찍한 모습까지 봤는걸요.”

스위트피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드래곤들이 반려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신이 되기 위해서 다른 인간을 해치기는 했으나 신이 정한 전쟁의 규칙에서 벗어나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는 드래곤을 보는 건 디에고가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디에고를 생각하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껍데기들이 한데 모여 마음을 가득 메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나 두려움과 걱정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크기가 부풀기만 할 뿐, 줄어들지는 않는다. 두려움과 걱정을 계속 상기시키는 건 결코 그런 감정을 이겨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스위트피는 그 속에 긍정적인 감정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조엘, 실은 제 반려는 따로 있어요.”

만약에 언니가 리시안셔스와 특별한 관계였다면?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애완동물 정도로만 여긴 거라면?

그가 앞으로 자신 때문에 계속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러한 문제들이 이제까지 스위트피의 발목을 붙잡았었다. 그런 걱정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어서, 디에고를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걱정했던 것이 풀릴 수도 있으니까.

결국은 이 모든 과정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결과를 두려워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용기를 낸 다음에는 그만한 대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매사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기보다는 희망을 앞세워서 걸어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어쩌면 디에고가 알려 주려는 진실은 자신의 생각보다 괴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리시안이 생각하는 제 매력이 뭐라고 생각해요?」

「…우리 꼬마가 또 어쩌다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구나.」

「여관 주인장 아저씨가 부인 분과 결혼한 이유가 여장부다운 성격이 매력적이라고 해서요. 아저씨는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매력을 갖고 있대요. 근데 전 제 매력을 모르겠어요. 제게 매력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요?」

「아주 없지는 않지.」

「리시안이 생각하는 제 매력이 뭔데요?」

스위트피는 오래전, 리시안셔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항상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엉뚱한 질문과 얘기를 꺼내던 스위트피는 그날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리시안셔스에게 제 매력을 물었었다.

「금화가 끊임없이 나온다고 너무 사치를 하는 것 같아. 내일부터는 고급여관에서 머무는 건 자제하도록 하지.」

「제 매력을 알려달라니까 갑자기 금화를 아끼자는 얘기는 왜 해요? 그, 그리고 고급여관에서 자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요!」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렴.」

대화 도중 갑자기 리시안셔스가 금화를 아끼자는 말에 스위트피는 쩔쩔매며 고급여관에서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를 늘어놨었다.

「이미 좋은 여관의 침대에 길들여져서 낡은 침대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요.」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아.」

「제가 좋은 침대에서 자는 편이 리시안도 좋을걸요?」

「왜지?」

「반려가 불편한 침대에서 끙끙대며 자는 걸 보고 싶어요? 제가 불편해하면 리시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텐데, 전 리시안을 위해서라도 좋은 침대에서 편히 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턱을 괴고 스위트피의 헛소리를 들어주던 리시안셔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었다.

「바로 그거야.」

「…네?」

「너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거.」

「…….」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면 저런 결론이 나오는지 신기하고 궁금한데, 어이가 없기도 하고.」

「…….」

「그런데 또 재미있기는 해서, 계속 들어주게 되지. 이런 것도 너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스위트피는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자신이 내키는 대로 생각하려고 한다.

결국엔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조엘은 스위트피의 얘기를 듣고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도 당신의 생각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스위트피의 얘기에 납득을 못한 거 같았지만, 그는 굳이 용기를 내려는 사람에게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그 대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앞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위트피는 절뚝거리면서도 그를 따라 열심히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에게 목소리가 닿지 않도록, 침묵 속에서 긴 계단을 내려가기만 하던 스위트피는 오래전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때, 그 대화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었다.

「치…. 결국엔 뻔뻔하다는 얘기잖아요. 그거 말고 다른 매력은 없어요?」

「하나 더 있긴 하지.」

「진짜요? 빨리 말해 봐요!」

「생존 욕구도 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거.」

「그게 무슨 매력이에요.」

그 얘기를 하던 순간엔 리시안셔스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조금 거둬졌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런 너를 보면 내가…….」

하필이면 그 순간에 주문했던 음식이 나온 탓에 대화가 끊겼었다.

‘갑자기 그때 일이 생각나네.’

잊고 지냈었는데…….

새삼 궁금해진다. 그때 리시안셔스가 마저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리시안셔스와의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긴 계단을 내려가느라 왼쪽 무릎이 아프긴 했지만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 통증을 조금씩 잊게 해 줬다.

마침내 계단을 내려온 스위트피는 양옆으로 늘어진 인간들이 잡혀 있는 감옥을 지나, 그 끝에 있는 거대한 어둠과 마주했다. 그 어둠이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먼저 올라가요.

스위트피가 조엘에게 입 모양으로만 속삭이며 계단 쪽으로 손짓했다. 조엘은 망설이긴 했으나 스위트피가 부드럽게 어깨를 밀며 애써 밝게 웃자, 그제야 걸음을 떼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지하실에는 스위트피만 남겨졌다.

정확히는 감옥에 갇혀 떨고 있는 사람들과 저 멀리 있는 거대한 드래곤도 함께였지만, ‘함께’라고는 보기 힘든 관계였다.

스위트피는 복도 끝에 있는 디에고를 향해 소리를 낮춰 걸으면서 양쪽을 번갈아 살폈다. 어두운 감옥 안에 갇힌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고 창백했다.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그들은 낯선 스위트피의 존재를 유심히 관찰했다.

경계, 두려움, 희망 등등. 온갖 감정이 섞인 시선들을 감당하며 앞으로 나아간 스위트피는 마침내 본체의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디에고를 마주할 수 있었다.

디에고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던 조엘의 말이 사실이기는 한지, 숨결이 고르지 못했고,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고린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고린도에서는 계속 검은 빛이 흘러나왔다. 검은빛이라는 표현은 이상하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저 뿔은 리시안셔스의 것이니까, 어쩌면 저게 디에고의 약점이 될 수도 있어.’

왠지 고린도에 손을 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져보기에는 너무 높은데.’

디에고가 아무리 엎드려 있다고 해도, 스위트피보다 훨씬 컸다. 까치발을 들어 머리 위에 나 있는 고린도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안 되겠어…….’

스위트피는 조금 더 과감한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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