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66화 (66/120)

<66화>

다음 날, 해가 뜨고 나서도 디에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스위트피는 약속대로 정원으로 나섰다. 넓은 정원에서 단번에 조엘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스위트피는 작은 꾀를 썼다.

“정원이 참 잘 가꿔져 있네요.”

“정원사가 공을 들이고 있는 덕분일 겁니다.”

디에고에게 명령을 받은 시녀는 스위트피의 말에 적당히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녀는 스위트피의 시중을 들려고 하되, 선을 그어 넘어오지는 않았다. 물론 스위트피는 그녀의 시중을 받을 생각도 없었으니, 먼저 선을 그어 주는 행동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제 이름과 같은 꽃은 없나요?”

“…죄송합니다, 반려님 제가 이 넓은 정원에 피어 있는 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럼 정원사를 불러주시겠어요? 정원에 피어 있는 꽃에 대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스위트피가 성의 사용인에게 뭔가를 먼저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의아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저와 같은 꽃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니,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가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스위트피의 미소는 사람을 손쉽게 무장해제 시키고는 했다.

얼마 안 가 스위트피는 시녀의 뒤를 따라 이쪽으로 오고 있는 조엘을 발견했다. 정원의 꽃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다는 것을 핑계로 시녀를 뒤로 물리고 조엘과 나란히 걸으면서, 스위트피는 작은 목소리로 전날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어젯밤에 말이에요…. 재가 돌아가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 드래곤은 여전히 사람들을 잡아먹으려 기력을 채우고, 저희는 뼛조각을 치우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나눠 주죠. 마치 가축에게 사료를 나눠 주는 것처럼요.”

스위트피의 질문에 답해 주는 조엘의 표정과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덤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스위트피와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으면서도 주먹을 세게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해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밤에는 항상 그런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건가요?”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주기는 불규칙하지만…, 그 드래곤이 나약해지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기력을 회복하는 것 같더군요. 한번 시작되면 점점 기간이 길어지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나 이번에는 유독 오래가는군요.”

“그럼 나약해져 있을 때 공격하면 되지 않을까요?”

말을 내뱉자마자 스위트피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으세요.”

아무리 나약해졌다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늑대나 사자 같은 포악한 짐승 따위가 아니었다. 디에고가 수도에서 만났던 서커스단에게 붙잡혀 있었던 것은 정말로 그들에게 포획되었다기보다는, 포획당해 준 것에 가까웠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바이올렛이 은밀하게 갖다 바치던 인간들의 숫자가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이 성의 공자시라고요.”

“그렇게 불리던 때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서 쫓겨난 몸입니다.”

“하지만 디에고 때문에 자리를 빼앗긴 거잖아요.”

“아니요, 백성들에 의해 쫓겨난 겁니다.”

“…….”

“제 아버지가 무능력했던 것도 맞으니, 드래곤을 이 공국의 주인으로 떠받들기로 한 백성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선택을 원망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들도 몰랐겠죠.”

저 드래곤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잡아먹을 줄은.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성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거예요? 디에고가 자리에서 내쫓았잖아요.”

“그는 제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입장에선 거슬려서 해적을 쓸어버렸을 뿐인데, 백성들이 알아서 숭배하며 따르고 있는 거죠. 제가 이 공국의 대공이었던 아버지의 아들인 건 알지만 거슬려 하지도, 위협적으로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왜 이렇게 다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물론 제가 물어본 거긴 하지만, 너무 쉽게 대답해 주셔서요…….”

자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다른 이들이 알려 주지 않는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은 조엘에게 있어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가 대공의 아들이었던 사실까지는 말해도 상관없을지 몰라도, 디에고가 공국의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줬으니 말이다. 더욱이 디에고는 이 사실을 스위트피에게 알리지 않도록 성의 사용인들에게 함구령까지 내린 상태였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스위트피의 입장에서 디에고는 이미 최악인 존재인데, 굳이 자신에게 안 좋은 모습을 감추려 한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이렇게 대대적으로 많은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긴 했다. 그날 지하실에서 봤던 살려달라던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리고, 오래전 자신이 지었던 죄가 다시금 떠올랐다.

복수심에 차올라서 마을의 죄 없는 사람들까지 화마에 감겨 죽게 했던 그 날이…….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오래전 잔상에 두통이 밀려올 때였다. 조엘이 스위트피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아가씨는 불쾌해하겠지만 제 눈에는 그 드래곤이 아가씨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좋은 쪽으로요? 아니면 나쁜 쪽으로요?”

“…그건 확답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군요.”

어느 쪽이든 간에, 조엘의 말대로 디에고가 스위트피를 이 성에 데려오고 난 후 꽤 신경을 썼던 건 사실이다. 사용인들에게 항상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아플 때 돌봐줬다고도 하고, 사용인들에게 자신을 ‘반려’라고 부르게 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아가씨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제가 아는 걸 전부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게 뭘 바라시는데요?”

“그 드래곤의 약점, 찾아주십시오.”

절뚝거리면서도 힘든 티 내지 않고 오래 걷던 두 다리가 그대로 멈췄다. 조엘도 스위트피의 발걸음에 맞춰 그대로 멈춰 섰다.

머리가 멍했다.

‘내가 뭘 들은 거야…….’

약점? 디에고의 약점이라고?

이제까지 디에고에게서 원하는 정보만 얻어내고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던 스위트피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디에고에게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도 도망칠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나름대로 도주로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단 성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는 일도 아득히 멀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거기다가 저렇게 인간들을 학대하고 잡아먹는 드래곤이라면…….

스스로 드래곤을 모시기로 결정했던 공국의 민심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런 드래곤의 반려라니. 도망치려다가 공국의 백성들에게 붙잡혀 먼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바다로 무작정 도망치면 디에고에게 바로 붙잡힐 가능성이 컸다. 자신에게는 드래곤을 막을 힘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을 끌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일 뿐, 디에고를 완전히 막을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의 약점을 잡아서 그를 꼼짝도 못하게 만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불리한 건 스위트피가 아니라 디에고가 된다.

“디에고의 약점을 알고 있어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빨리 말해 봐요.”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도 스위트피는 간절했다.

“그 드래곤은 나약해져서 인간들을 잡아먹을 때면 늘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 아닌, 괴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조엘이 드래곤을 ‘괴물’이라 부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에고가 괴물인 것이지, 모든 드래곤이 괴물인 것은 아니었다.

‘리시안셔스는…….’

반사적으로 리시안셔스가 다른 인간의 심장을 뽑던 모습이 떠오른 스위트피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애써 그의 생각을 지워버리고는 다시 조엘의 얘기에 집중했다.

“그때, 뿔이 솟아 있더군요.”

“…….”

“평소의 드래곤의 모습일 때는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나약해져 있을 때면 항상 그 뿔이 보이고는 했습니다.”

스위트피는 그 뿔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뿔은 검은색이었죠?”

“알고 계시는군요.”

“저도 본 적이 있거든요.”

그건 디에고의 뿔이 아니었다. 본래는 리시안셔스의 것이었다.

“그 뿔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반쯤 미쳐서 그 뿔을 뽑으려다가 간신히 참는 모습까지 본 적이 있습니다.”

디에고가 훔쳐서 자신의 머리에 박은 리시안셔스의 고린도(뿔)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니…….

“그 뿔이 드래곤의 약점인 거 같은데, 제 추측이 어떻습니까?”

“저도 그렇게 느껴지네요. 그런데 약점을 안다고 해서 제가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볼게요.”

“어떻게 찾으실 생각입니까?”

그냥 알겠다고 하고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조엘은 생각보다 예리한 질문을 꺼냈다.

“그게…….”

실은 스위트피도 확실한 답은 주기 어려웠다.

고작 드래곤과 관련된 책을 구해서 읽어보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드래곤과 관련된 책을 읽어서 쓸만한 정보를 얻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땅한 방법이 생각 안 나신다면, 제 방법대로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수라도 있나요?”

“우선 그 드래곤을 만나보십시오.”

그는 충격적인 얘기를 하면서도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 지하실에 있는 디에고를 만나라는 얘기 또한 안부 인사를 건네듯이 던졌다. 타고난 성정 탓인지, 아니면 많은 일들을 겪어 심지가 단단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갑자기요……?”

“인간을 마구잡이로 잡아먹고 나면 마치 인간처럼 지친 표정으로 잠이 들고는 합니다. 그때 잠시 그 드래곤을 살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가씨에게 위험한 제안이니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보다는 그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 제안인데요.”

사람들 몰래 안으로 들이는 건 조엘이 해야 할 일이었다. 거기다가 만약에 들키게 된다면 모든 책임을 지게 되는 것도 그였다. 아주 높은 확률로 이 일이 들키게 된다면 조엘은 죽게 될 것이다.

“거기다가 무작정 만난다고 해서 제가 그 뿔을 무기로 쥐고 흔들 방법을 찾으리란 보장도 없어요. 전 진짜로 디에고의 반려도 아닌데다, 당신과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라고요.”

잠시 뒤에 서 있는 시녀의 눈치를 살핀 조엘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마치 이 말을 들으면 스위트피가 제안을 수락할 것처럼 두 눈에는 어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괴물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나면 인간의 모습으로 넋 나간 채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리고는 합니다.”

스위트피를 내려다보는 조엘의 시선은 집요했다. 정말로 특별한 구석이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여자에게 선택받으면 이 고통은 끝날 거야. 신께서도 날 인정해 주실 거야.”

“…….”

“늘 끝에 가서는 그런 말을 하더군요.”

전에 디에고에게도 비슷한 말을 듣기는 했었는데…….

스위트피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뭐길래…….’

자신의 선택이 무슨 이유로 디에고를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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