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스위트피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정하며 성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성의 모든 곳을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제 걸음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다 확인해 본 것 같긴 한데. 딱 한 군데, 아직 내려가 보지 못한 곳이 있기는 했다. 바로 성의 후문 쪽 죄수들을 가둬놓는 감옥처럼 쇠창살 문이 닫혀 있는 동굴 같은 공간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나중에 도망칠 수 있는 길을 알아보려는 것인데, 저곳에 따로 뚫린 길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아직 발을 들여본 적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확인은 해 볼까.’
이렇게 넓은 성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은밀한 탈출구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스위트피는 잠겨있지 않은 쇠창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나다니면서 확인한 바로는, 낮에는 잠겨 있는 이 문이 밤에는 이상하게 잠겨 있지 않았다.
간혹, 모두가 잠든 시각에도 이곳에 사람이 드나들긴 했으나 들키지 않도록 숨죽이고 있었던 탓에 이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끼익-,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스위트피는 동굴같이 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밤에도 누군가가 이곳을 방문한 것인지, 좀 더 깊이 들어가자 벽에 걸려있는 횃불이 은은하게 안쪽을 비추고 있었다.
작은 불빛에 안도하기도 잠시, 스위트피는 불빛 맞은편에 있는 계단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하실……?”
지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 있었던 탓이었다.
‘내려가 봐야 할까…….’
지하실에 따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 같은 건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이대로 걸음을 돌리면 기껏 여기까지 온 노력이 아까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스위트피는 계단을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벽에 있는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지하에 사람이 드나든 게 분명해. 아니면, 지금도 사람이 있거나.’
누군가가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도 인공적으로 불이 어둠을 밝혀 주고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스위트피는 일부러 숨소리도 죽인 채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을 썼다. 계단은 길었고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도록 지탱할만한 손잡이도 없었다.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는 디에고를 따라오게 되면서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사람들에게 들키면 다시는 밤에 성을 돌아다니는 일은 못 할 수도 있다. 자신을 믿지 않는 디에고에게 쓸데없는 의심을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위트피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돌아서려 했다.
콰득!
“…….”
그런데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으깨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섬뜩하고 기묘한 소리는 스위트피에게 계속 아래로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스위트피는 조금 더 용기 내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지하에 도달했을 때였다.
사람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벽 뒤에 숨은 스위트피는 눈만 빼꼼 내밀었다. 손이 묶인 사람들이 또 다른 거대한 철창 너머로 끌려가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그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애원하고 있는 거지? 살려달라니. 처형이라도 당하는 거야?’
또 다른 철창 너머로 끌려간 이들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건지, 철창 너머의 존재는 또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모습을 숨긴 채로 확인하는 건 한계가 있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찍찍-, 찍찍-
그때 발밑에서 나는 소리에 스위트피는 고개를 내렸다. 새까만 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을에서 보던 쥐들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크고 더러운 쥐들을 발견한 스위트피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얘들아, 부탁이 있어.”
스위트피는 쥐들에게 저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봐달라 얘기하려 했다. 그런데 스위트피를 보는 쥐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 인간, 인간이다.
- 죽었어? 안 죽었잖아.
- 그래도 약해 보이는데? 귀만 살짝 뜯을까?
- 한 입만 맛보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쑥덕거리던 쥐들이 동시에 스위트피를 올려다봤다. 동물과 식물은 스위트피에게 호의적이었다. 꽃과 나무와 풀이 온화하고 다정하다면, 동물들은 통통 튀는 성격으로 스위트피의 친구가 되어주고는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이 검은 쥐들은 무언가 달랐다.
스위트피는 섬뜩함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때 두세 마리의 쥐들이 단체로 스위트피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물었다.
“꺄악!”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튀어 나갔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비명이 길어져 철창 너머로 끌려가거나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닿기도 전, 누군가가 스위트피의 입을 틀어막았다.
살을 문 쥐들을 뜯어서 던진 남자는 스위트피를 데리고 벽 사이,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갔다.
- 쳇, 도망가자. 우리가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 맛있어 보였는데, 아쉬워.
쥐들은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이미 놀랄 대로 놀란 스위트피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스위트피의 힘은 약했고 물리적인 힘으로 남자에게서 벗어나기는 역부족이었다.
“쉿, 쉬잇-.”
그는 스위트피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는 입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남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 같다는 미약한 믿음이 들자, 스위트피도 더 이상 버둥거리며 반항하지 않았다.
스위트피가 얌전해지자 붙잡고 있던 몸을 놓아준 남자는 그대로 손을 붙잡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시 계단을 올랐다.
“자, 잠깐만요!”
남자에게 이끌려 위로 올라가던 스위트피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남자를 불렀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누구길래 저를 돕는 거고요?”
“쉿!”
“…….”
“우선 올라가서 얘기해요. 전부 설명해 줄게요.”
스위트피는 남자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스위트피를 데리고 지하실 계단을 다 오르다 못해 아예 철창 근처를 멀찍이 벗어나고 나서야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줬다.
어찌나 세게 붙잡혀 있었던지, 손목이 얼얼할 정도였다.
“미안합니다.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정말로 미안한지 눈매를 아래로 축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급한 상황이었잖아요. 오히려 절 도와주시기도 했고…….”
“다리는 괜찮습니까?”
“아…….”
스위트피는 쥐들에게 물린 자국이 선명한 다리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에 느꼈던 섬뜩함이 다시 다리를 타고 뒷덜미까지 올라오는 듯했다.
“그 쥐들은 대체…….”
“이 성의 지하실에 사는 쥐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이로 보죠.”
“먹이라고요?”
“지하실에 있는 괴물은 사람들을 잡아먹고 난 다음에 뼛조각을 뱉어내는데, 그때 거기에 붙어있는 살점을 쥐들이 뜯어 먹죠. 그러니 사람을 무서워할 리가 없죠.”
“잠깐만요. 뭔가 얘기가 이상한데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괴물’은 누굴 얘기하는…….”
스위트피는 스스로 말을 하면서 그 괴물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디에고.”
“네, 당신의 드래곤입니다. 반려님.”
스위트피는 단번에 남자를 향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전 그 드래곤의 반려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드래곤에게 특별한 존재는 맞지 않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걱정 마십시오. 반려님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세요. 전 디에고의 반려가 아니라니까요?”
스위트피가 진심으로 불쾌해하자, 진위를 확인해 보려는 것인지 한참 표정을 관찰하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저를 그 자식의 반려라고만 부르지 않으면 뭐고 부르든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아가씨, 이제 그만 침실로 돌아가십시오. 아가씨가 지하실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애꿎은 사람들이 더 죽습니다. 그 드래곤은 아가씨에게 저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그 말에 스위트피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숨길 만큼 그놈과 제가 각별한 사이는 아니라서요.”
“며칠 동안 저 드래곤의 행방을 성 안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지금 지하실에서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드래곤은 아가씨에게 자신의 행방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인즉, 디에고가 직접 사용인들에게 자신이 다른 인간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피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디에고가 며칠째 계속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요?”
“한 번 일어났든, 자주 일어났든, 그 사실이 중요합니까?”
“…….”
“신인지, 괴물인지는 몰라도, 저 드래곤이 우리 나라의 백성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죠.”
한 번만 일어난 일이면 괜찮다는 생각은 한 적 없다.
그런 의미로 한 질문은 아닌데…….
남자도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금방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위로 올라가서 약 바르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세요. 질문하실 게 있다면 날이 밝고 절 다시 찾아주십시오.”
마지막까지 쥐에게 물린 스위트피의 다리를 신경 써 준 남자가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저기……!”
가장 중요한 걸 묻는 것을 잊어버릴 뻔했던 스위트피가 다급하게 남자를 붙잡았다.
“누군데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아니, 그쪽을 뭐라고 얘기해야 찾을 수 있는데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본인의 이름을 얘기했다.
“조엘이라고 합니다. 한때는 이 성의 주인이 저의 아버지였죠. 지금은 성의 수많은 사용인 중 한 명일 뿐입니다.”
“…….”
“낮에는 정원에서 일하고 있으니, 절 만나고 싶으시다면 정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거기까지 설명한 조엘은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스위트피는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조엘의 말대로 아무도 모르게 침실로 돌아가 다리를 씻고, 약을 바르고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침대 위에 누웠다.
하지만 지하실에서 봤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아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디에고가 더욱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습관처럼 리시안셔스를 불렀다. 침대 이불보를 세게 쥔 스위트피의 손에 푸른 나비 문양이 작은 빛을 냈지만, 아까의 일을 되짚어 보던 스위트피는 차마 제 반려의 표식을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