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대로는 안 된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시간만 버릴 것이다.
저녁이 될 때까지 침실 구석에서 분에 차 있던 스위트피는 몸을 일으켜 디에고를 찾아 나섰다. 진짜로 그를 반려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와 싸운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디에고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를 찾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성이 넓어서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추워서 침대의 이불을 담요처럼 몸에 두른 스위트피는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는 성 안을 돌아다녔다.
‘리시안은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면 내게 와 줬는데.’
디에고는 자신의 진짜 반려도 아니니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결국 디에고를 찾지 못한 스위트피는 바람을 쐬기 위해 성과 성을 잇는 다리로 나왔다. 달이 지배하는 밤하늘보다도 더 짙은 어둠으로 보이는 바다에서 소금기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사실, 스위트피가 내내 방구석에서 분에 차서 씩씩거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디에고에게 명령을 받은 시녀는 스위트피의 끼니를 챙겨 주려고 계속 침실을 방문했고, 스위트피는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굴 만큼 모질지 못했다.
「전에 있던 대공은 무능력했지요. 해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도망치고는 했던 작자였으니까요.」
그 결과, 스위트피는 시녀를 통해 이 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섬에 위치한 작은 공국은 틈만 나면 해적의 침입을 받았다고 했다. 공국을 통치하는 군주는 무능력해 민심이 흉흉해져 갔다고. 때마침 또다시 해적의 침입이 있을 때, 디에고가 나타나 해적을 쓸어버리고 군주의 목을 따 이 공국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디에고가 통치하게 된 후에 이 공국의 사람들은 살기 편해졌나요?」
그러나 스위트피의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던 시녀는 마지막 대답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기만 했다.
‘어쨌든 이 나라는 디에고의 것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자신이 마음먹고 도망치려고 해도 잡힐 확률이 높을 것이다. 운 좋게 거대한 드래곤의 시야를 벗어나려고 해도 이 나라의 사람들이 전부 디에고의 눈과 귀 역할을 할 테니 말이다.
거기다가 성의 사용인들은 싫다고 표현했는데도 스위트피를 향해 꼬박꼬박 ‘반려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디에고의 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자신이 도망친다는 건 군주의 비가 도망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일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디에고의 반려라는 거야.’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나는 리시안의 반려야.’
리시안은 날 반려라고 여기지 않지만…….
기분이 또 울적해질 것 같았다. 스위트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선명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리시안셔스의 발등을 타고 밤하늘을 날 때는 그의 몸에 하늘이 가려져 달빛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빛 한 점도 보지 못한 채 밤하늘을 날 때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리시안셔스가 있으면 세상 그 어디에 가도 안전할 것만 같다는 마음이 들고는 했다.
충족되는 안정감을 버리고 디에고를 따라나선 것은 자신이었다.
‘리시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알고 싶어.’
벌써부터 그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리시안셔스는 강한 존재이니 위험할 일은 없을 테지만. 리시안셔스의 눈과 닮은 노란 달빛을 올려다보던 스위트피는 시원한 파도 소리에 집중하며, 달이 뜬 밤바다를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미약한 두통이 스위트피를 덮쳐왔다.
‘이 풍경과 비슷한 걸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머릿속에서 짧은 장면들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갔다.
황금빛 자수가 수놓아진 베일을 쓴 채 아래로 추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고 바다에 빠지기 직전, 밤바다보다도 더 새까만 것이 스위트피에게 다가왔다.
“아…….”
스위트피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꿈속에서 봤던 모습 이후의 장면 같은데…….
무언가가 떠오르고, 의식적으로 계속 떠올리려고 할수록,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스위트피는 머릿속에 밀려오는 통증을 참아내며 계속해서 다음 장면을 떠올리려고 했다.
『어이, 꼬마.』
그러나 방해꾼이 나타났다. 회색 비늘을 한 드래곤이 다리에 서 있는 스위트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보여야 하는 것은 이 드래곤이 아니라, 새까만 비늘을 가진 다른 드래곤이어야 할 것 같다는 기묘한 기분이 들 때였다.
“침대에나 누워있지, 왜 밖에 나와서 빌빌거리고 있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디에고가 어느새 주저앉아 있던 스위트피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낮에 깨어나서 온갖 난리를 피우길래 다 나은 줄 알았더니. 또 감기인지 뭔지 하는 거 때문에 비실비실하게 구는 거야?”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이마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제 딴에는 아픈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겠지만, 스위트피는 고개를 저으며 그 손길을 거부했다.
디에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스위트피가 중심을 잡고 서자 팔에 손을 떼며, 짧게 웃었다. 쓸데없는 반항을 하는 스위트피를 어리석게 여기는 거 같기도 했다.
“낮에도 얘기했지만 네가 죽으면 내가 곤란해.”
“알아.”
“알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인간들에게는 잠이 만병통치약인 것 같던데.”
더는 할 말이 없는지, 디에고는 그대로 스위트피를 스쳐 지나갔다.
“…그쪽을 계속 찾았어.”
하지만 디에고는 몇 걸음 가지도 못해 스위트피의 목소리에 멈춰 섰다.
“나를?”
“할 말이 있어서.”
“아아, 절대로 날 반려로 선택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하려고?”
“아니, 그 반대야.”
스위트피의 녹안은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 뚫어져라 주시하는 디에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당신을 반려로 여길 수 있도록 노력할게.”
본인의 뜻대로 되었으니 좋아해야 마땅하건만 디에고는 얼굴을 사납게 찌푸렸다.
“네가, 나를……?”
본인을 반려로 선택하라고 데리고 온 것이면서, 막상 원하는 대로 해 주니까 무척이나 당황하는 듯한 반응에 스위트피야말로 당혹스러웠다.
“무슨 수작이지?”
“수작이 아니라, 정당한 거래를 하기 위해서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당신도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알려줄 거 아니야.”
“…….”
“그런데 그 ‘반려’라는 게…….”
등 뒤로 손을 감춘 스위트피는 초조함에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선택에 따라 쉽게 바뀔 수도 있는 거야?”
“나도 몰라.”
“……뭐?”
반려로 자신을 선택하라 말한 건 다름 아닌 디에고였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모르겠다고 하다니, 황당할 노릇이었다.
“네가 말로만 날 반려로 여기겠다고 해서, 내가 진짜 네 반려가 될 일은 없을 거야.”
“…….”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지. 네가 진심으로 날 사랑하게 된다면, 신이 너의 반려를 나로 바꿔줄지도.”
그 말은 내가 디에고를 반려로 여기는 척한다고 해서, 진짜로 디에고가 내 반려가 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스위트피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전에는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보며 ‘영악한 꼬마’라고 부를 때마다 웃고 넘겼었는데, 지금 이 순간을 겪어보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사나운 짐승을 대하듯이 디에고를 향해 느리게 한 걸음씩 다가섰다.
“노력해 볼게. 그런데…….”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손의 떨림을 억지로 멈춘 스위트피가 조심스럽게 디에고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은 왜 날 반려로 원하는 거야?”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의심할 것이니, 그를 향한 적대적인 시선은 굳이 감추지 않되 태도만큼은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스위트피의 녹안을 빤히 보던 디에고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설마, 입을 맞추려는 걸까. 디에고의 팔을 붙든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스위트피는 디에고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피부가 맞닿은 곳은 입술과 입술이 아니었다. 이마와 이마, 코와 코가 맞닿았다.
“순종하는 ‘척’, 연기까지 하는 노력은 가상한데.”
스위트피가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자신이 영악한 것보다 훨씬 더,
“거짓말이 너무 어설퍼.”
디에고는 눈치 빠르고 교활하다는 점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왜 도망쳐?”
“그…….”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나. 진짜로 당신을 내 반려로 여기도록 노력할 거라고, 그렇게 해명해야 하는 걸까. 근데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거 같은데…….
“당분간 지켜볼게.”
“뭐, 뭐를?”
“네 연기에 속아주겠다고. 그러니까 너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지.”
“…….”
“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척 계속 해 보란 말이야. 그 정도 정성은 보여 줘야 나도 입을 열 생각이 들 것 같으니까.”
어설픈 유혹이라도 해보라는 것일까. 스위트피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스위트피가 이날 이후의 디에고에게 우스꽝스러운 미인계를 쓰는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후에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 *
처음에는 디에고가 그냥 어디론가 외출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그리고 그다음 날이 되어도.
계속 디에고의 모습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자, 스위트피는 성의 사용인들에게 그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종종 외출을 나가시면 기약도 없이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만 할 뿐, 그가 어디로 갔고 언제 돌아오는지 알려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계속 디에고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나중에 디에고에게서 도망치려면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매일 밤, 모두가 잠든 시각. 스위트피는 은밀하게 밖을 나서고는 했다. 성의 구조를 확실하게 익히기 위해서였다.
성 바로 앞에는 바다가 있었지만 만약 디에고에게서 급하게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바다 쪽으로 도망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배를 타고 힘겹게 노를 저으며 바다로 탈출해도 하늘을 나는 드래곤인 그가 자신을 발견만 하면 잡으러 오는 것은 아주 쉬울 테니까.
오히려 마을에 숨어 있다가 때를 봐서 도망치는 편이 나은 거 같았다.
‘하지만 수배지를 내리면 금방 잡히게 될 텐데…….’
이 좁은 공국에서 짧은 금발을 가진 여자를 찾아내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관광객도 없는 곳이니, 낯선 외지인 여자에게 더욱 시선이 갈 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