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까 내가 그랬지? 신께서는 하루의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바로 첫 번째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
“신께서도 무리하셨던 거야. 그래서 첫 번째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에리카 딴에는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얘기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 얘기를 듣는 자신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를 쉬고서 만든 두 번째 인간인 넌 나에 비하면 완벽하잖아.”
“그건…….”
“그럼 불완전한 나보다는 네가 ‘세레티’에 더 걸맞지 않을까?”
그제야 스위트피는 자신과 꼭 닮은 저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말대로 나는 신의 첫 번째 인간인데도 이 이야기를 알지도 못했어. 하지만 너는 모든 신과 드래곤과 사람들의 사랑까지 받으니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 수 있잖아.”
“잘난체하려고 꺼낸 얘기가 아닌 거 알잖아. 내가 널 대신해 세레티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첫 번째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너야.”
우울한 표정에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자신의 눈동자는 회색이었다. 눈동자에 색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지, 에리카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전혀 엉뚱한 곳에 향해 있었다.
사실 ‘시선’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어느 것도 보지 못할 테니까.
“내 불완전함을 위로하고자 너의 완전함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에리카.”
“…세레티.”
어떻게든 자존감을 올려주려는 에리카의 노력에도 ‘세레티’라 불린 자신의 마음을 되돌리진 못할 거 같았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베일을 쓴 자신이 신전 밖으로 나섰다. 앞이 보이지 않아 벽을 더듬으며 맨발로 신전을 나선 자신은, 주변에 있는 꽃과 나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곳으로 향했다.
바위산 꼭대기에는 신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경사진 계단뿐이었다. 신전을 사이에 두고 계단 맞은편에는 짙푸른 바다가 있었다.
세레티는 자신이 여기서 한 발만 내디디면 추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친 바닷바람에 스위트피의 긴 머리카락과 베일이 휘날렸다. 그 와중에도 제 자신을 혐오하는 세레티는 절대로 벗겨지지 않게 베일을 꽉 붙잡았다.
- 세레티! 그러지 마!
- 우리는 널 사랑해.
- 위험해, 돌아와!
꽃이 조심스럽게 줄기를 늘어뜨려 세레티의 발목을 옭아맸다.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있던 새들도 달려와 세레티의 옷깃과 베일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
종족끼리의 번식이 아닌, 신께서 직접 손을 대어 생명을 창조하던 시대.
신께서 만든 창조물 중 유일하게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난 세레티는 신께서는 첫 번째로 만든 인간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말에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다. 어차피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아닌, 두 번째로 창조된 인간인 제 자매를 세레티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두 눈에 담지도 못하는 자신은 굳이 불필요한 목숨을 이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을 사랑하는 식물과 동물들은 제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세레티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던 식물의 줄기는 그녀의 뜻에 따라 줄기를 풀었다. 옷깃을 잡아당기던 새들도 그녀에게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혐오스러운 자신을 가려주는 베일이 벗겨지지 않도록 세게 쥔 세레티가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새까만 어둠만 보이는 바다가 있는 곳으로 추락했다.
* * *
하필이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이었다. 스위트피는 눈을 번쩍 떴다. 예고 없이 꿈을 꾸게 된 것처럼, 꿈에서 추방당하는 것도 예고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리시…….”
“일어났네?”
무의식적으로 리시안셔스를 찾으려던 스위트피는 바로 눈앞에 있는 디에고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너무 당황스러웠던 탓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스위트피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은 질문의 모양을 띄고 있었으나, 사실상 불쾌함의 표현이었으며 당장 나가달라는 축객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반응은 예상했던 듯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로 태연하게 받아쳤다.
“네가 걱정되어서 말이지.”
“당신이? 내 걱정을?”
“너도 알겠지만 난 네가 필요해.”
“…….”
“아직 내게 쓸모를 다하지 않았는데 죽어 버리면 곤란하지.”
아무렇지 않게 인간을 죽이는 모습에서 이미 알 수 있었던 사실이지만, 디에고는 자신의 목숨도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쓰임을 당하기도 전에 죽지 말라는 헛소리를 하려고 곁을 지키고 있었다니. 덕분에 좋은 다짐 하나는 할 수 있었다.
죽더라도, 디에고의 곁에서는 죽지 않으리라.
‘하지만 리시안셔스가 14일 동안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하지 않으면 난 죽어.’
그렇다면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길 바라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 할까.
악에 받친 화풀이로 마고 부인과 크리스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불태워 달라고 드래곤에게 부탁했던 스위트피는, 막상 자신을 위해서 다른 이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하는 순간에서야 타인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어쨌든 서로 약속한 게 있으니까.”
스위트피가 먼저 대화의 운을 띄웠다.
“먼저, 얘기해 줘. 내가 당신에게 뭘 어떻게 해 주면 돼? 내게 바라는 게 뭐야?”
이번에야말로 디에고가 제게 원하는 것을 알아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이들의 대화에 방해꾼이 찾아왔다. 문밖에서 누군가가 똑똑, 노크를 한 것이다.
디에고가 대충 검지와 엄지를 튕겨 딱, 소리를 내자 용케 알아들은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전에.”
“…….”
“음식부터 입에 넣어.”
음식이라니. 가장 중요한 대화를 나누던 때에 여유롭게 식사나 하라니? 하지만 디에고는 진지해 보였다.
“인간들의 의사라는 놈이 네게 식사 후 약을 먹여야 한다고 했는데, 넌 깨어나지도 않고.”
“…….”
“어쩔 수 없이 곯아떨어진 네 입을 강제로 벌려서 약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위트피는 트레이를 가지고 가까이 다가와 시중을 들어준 시녀 덕분에 침대 위에서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을 왜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준 거지?
“설마 당신이 직접 간호한 건 아니지?”
“그랬다면?”
“그런 불필요한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지만, 만약에 직접 간호를 해 준 거라 해도 나한테 고맙다는 소리는 들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거야.”
“왜지?”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당신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다고.”
“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거 안타까워서 어쩌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씩, 웃는 디에고의 모습에 스위트피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든 네게 약을 어떻게 먹였을 거 같아?”
무슨 의미지?
아직은 디에고의 말뜻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디에고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쓸자, 그제야 그의 말뜻을 이해한 스위트피는 벌게진 얼굴로 베개를 들어 디에고에게 집어던졌다. 디에고는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지만 반면에 스위트피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경멸이 한가득이었다.
스위트피는 울 거 같은 얼굴로 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처음에는 허리까지 젖혀가며 웃던 디에고는 이윽고 심상치 않은 스위트피의 반응에 서서히 웃음을 잃어갔다.
“그렇게까지 끔찍해 할 필요 있나?”
“당신 같은 괴물과 누가 입을 맞추고 싶어 하겠어!”
“내가 괴물이면 리시안셔스는?”
“리시안은 당신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디에고가 보여 준 환각 속에서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던 것을 떠올린 스위트피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도 뻔뻔하게 리시안셔스를 두둔하진 못하네.”
“시끄러워.”
“왜? 너의 드래곤을 배신한 거 같아서 그래? 어차피 리시안셔스는 네 입술은커녕 이마에도 입을 맞춰주지 않았을 거 같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접시가 날아갔다.
쨍강-!
접시가 벽과 마찰하며 산산조각 났다. 그 안에 담겨있던 내용물도 누군가의 토사물처럼 바닥에 퍼졌다.
“반려님, 다시 준비해오겠습니다.”
하필이면 눈치 없는 시녀가 스위트피를 ‘반려’라고 불렀다. 안 그래도 디에고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스위트피가 이 말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왜 절 그렇게 부르세요?”
“그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시녀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행인 건 디에고가 이 대화에 끼어들어 대신 대답해줬다는 점이다.
“그 말 그대로야. 넌 내 반려가 될 예정이야.”
“누구 마음대로?”
“너도 동의했던 사항이야.”
“내가 언제?!”
“아까 내게 물었지?”
가벼운 손짓으로 시녀를 내보낸 디에고가 스위트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스위트피는 침대 위에 남아 있는 베개와 접시를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지만 대부분은 디에고를 비껴갔다.
디에고를 맞추는 것도 있긴 했지만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딱딱한 대리석 벽에 부딪힌 것처럼, 유리는 디에고와 부딪혀 깨졌지만 디에고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스위트피의 격렬한 방어와 거부에도 가까이 다가온 디에고가 기어코 스위트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네가 내게 해 줘야 하는 것.”
「먼저, 얘기해 줘. 내가 당신에게 뭘 어떻게 해 주면 돼? 내게 바라는 게 뭐야?」
디에고는 아까 전 스위트피가 했던 질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해.”
“…….”
“너의 반려로 리시안셔스가 아닌 날 선택해.”
고개를 비틀어 디에고에게 붙잡혀 있던 턱을 빼낸 스위트피가 단번에 답했다.
“싫어.”
물론 거부였다.
“날 선택하는 편이 네게도 좋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계속 살려면 14일 이내에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여야 해.”
“…….”
“그런데 의무감에 널 돌봐주던 것뿐이던 리시안셔스가, 네가 본인을 버리고 내게 왔는데도 널 위해서 다른 인간을 죽일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라도 본인을 반려로 선택하라는 얘기였다.
“리시안셔스와는 다르게 그런 더러운 일은 내게 더 어울리잖아. 안 그래?”
설령 리시안셔스는 의무감에 자신을 돌봤던 것뿐이라 해도, 스위트피는 그와 운명으로 묶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헛소리하지 마.”
그러니까 목숨이 걸려 있다 해도 디에고를 반려로 선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상했던 대답인지 디에고는 피식, 웃으며 스위트피에게서 돌아섰다.
“음식은 새로 준비하라고 일러둘게.”
“필요 없어.”
“나와 입 맞췄다는 게 그렇게 구역질 나?”
침실을 나서려고 문을 연 디에고의 뒷모습에 또 던질 것이 없는지 손과 눈이 분주해지던 때였다.
“걱정 마. 약은 멀쩡하게 수저로 먹여줬으니까.”
그나마 스위트피가 위안이 될 말을 남긴 채, 디에고는 침실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스위트피는 그대로 기운이 빠져 침대 위에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