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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62화 (62/120)

<62화>

“대체 왜 이렇게 약해빠졌어. 짜증 나게.”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누워 있는 스위트피에게 다가온 디에고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인간은 찬바람에 오래 노출되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특히나 반려님은 몸이 약한 듯싶은데…….”

“누가 너한테 뻔히 아는 말 지껄이래?”

“죄, 죄송합니다…….”

디에고는 성에서 오랫동안 성주 일가의 주치의를 담당해왔던 의사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이거 살려놔. 나한테 필요한 존재라서 데려온 거니까.”

“맡겨주십시오.”

“내가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디에고 님.”

디에고는 내일까지 스위트피를 낫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걸음을 옮겼다.

‘귀한 분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의사는 무심하게 나가버리는 디에고의 뒷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디에고는 예고도 없이 짧은 금발 머리의 여자를 데려왔다. 그러나 디에고에게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물어볼 겁 없는 인간은 이 성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여자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못할 때였다.

디에고가 먼저 이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정의해줬다.

「전에 데리고 있던 놈이 버릇없게 키워서 손이 많이 갈 거야. 불편한 곳 없이 잘 보살피도록 해.」

이 여자를 살뜰히 보살필 것을 명령하면서,

「저 아이, 내 반려가 될 예정이거든.」

‘반려’라고 지칭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결혼이라도 할 예정이 아닌가, 싶었다.

‘인간과 드래곤이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되긴 하지만…….’

하지만 분명히 ‘반려’라고 했다. 그러니 해석할 수 있는 방향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드래곤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이상한 점은 그런 것치고 디에고의 반응이 지나치게 무심했다는 것이다. 연인이 아픈데 의사에게 귀찮은 짐을 떠맡기듯이 굴고는 무심히 나가버리다니. 스위트피의 열을 재던 의사는 약을 만들어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디에고는 스위트피를 낫게 하라고 했지만 의사가 할 일이라고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단순한 감기에 수술까지는 필요 없으니 말이다.

푹 재운 다음 이따가 깨워 간편한 식사 후에 약을 먹이라는 뻔한 말을 전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갑자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방금 전에 의사에게 스위트피를 떠맡기고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던 디에고였다.

“디, 디에고 님……?”

디에고는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

“미쳐버리겠군.”

비켜, 의사를 밀친 디에고는 침대맡에 서서 스위트피를 빤히 쳐다봤다. 드래곤의 작은 힘에도 벽에 부딪혀 바닥에 넘어진 의사 따위는 디에고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야, 꼬마, 너 엄살 부리는 거지?”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몸을 강제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힘없이 축 늘어진 스위트피의 몸은 디에고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일으켜지긴 했으나, 거기엔 스위트피의 자의가 없었다. 죽은 것처럼 늘어진 몸뚱이를 붙들고 있어 봤자였다.

디에고는 씩씩거리면서 스위트피의 몸을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디에고는 자신이 화난 이유를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냥 화가 났다. 스위트피가 일부러 자신을 골머리 썩게 하려고 아픈 척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자신의 곁으로 오자마자 아프다고 난리인 건지, 이렇게 끙끙 앓으면 어쩌라는 건지. 리시안셔스는 얼마나 이 작은 아이를 곱게만 키웠으면 바람 좀 쐤다고 아프고 난리야.

“얘, 지금 당장 낫게 해.”

“네, 네?”

“못 들었어? 지금 당장 낫게 하라고.”

“죄, 죄송합니다! 그건 불가능한 문제인지라…….”

“내 덕분에 이 성이 이제까지 안전할 수 있었던 거 아니야? 난 너희들의 은인일 텐데,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네? 아,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자신도 말도 안 되는 것을 우기고 있다는 것은 안다. 인간들의 의학이 발전해봤자, 하루아침에 앓아누워있는 사람을 낫게 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부아가 치미는 것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데에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으음…….”

가쁜 숨만 색색, 내쉬던 스위트피에게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사의 머리를 터트리려고 비늘이 돋은 손을 뻗던 디에고의 행동이 그대로 멈췄다.

“…시…….”

스위트피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은 잘 듣지 못했겠지만, 디에고는 똑똑히 들었다. 지금 스위트피가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리시안…….”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하…….”

디에고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가.”

이윽고 그는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한 채 짧은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디에고의 성질을 아는 시녀와 의사도 이유 따윈 묻지 않은 채 서둘러서 침실을 나섰다.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해.”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땀에 전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내게 온 거야.”

전날에 했던 손끝 하나 대지 말라는 말을 떠올린 디에고가 오히려 더욱 과감하게 스위트피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 발로, 내게.”

스위트피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디에고는 한 번 더 강조했다.

“리시안셔스를 버린 건 너야.”

그러니까…….

“넌 이제 내 거야.”

이제 신께서도 날 다시 그분의 품속에 받아주시겠지.

디에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도 이불을 끄집어 스위트피의 정수리까지 빈틈없이 덮어줬다. 그러다가 더욱 가빠진 스위트피의 숨소리를 듣고는 슬그머니 이불을 턱 밑까지 내렸다.

“리시안셔스는 이걸 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리시안셔스라면 몰라도 자신은 인간의 보모 역할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스위트피의 곁을 꼭 지키고 있을 생각이었다. 딱히 스위트피를 돌보거나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본인이 버린 반려를 제 앞에서 찾는 괘씸한 이 꼬마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얼굴을 가장 먼저 보고서 현실을 깨달았으면 싶었다.

리시안셔스를 애타게 찾아봤자 지금 곁에 있는 드래곤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네가 두 발로 내게 왔다는 것 또한.

침대맡에 있던 의자를 끌고 온 디에고는 스위트피가 누워있는 침대에 두 발을 뻗고는 불량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나 디에고는 삐딱했던 자세를 금방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스위트피의 손등에 푸른 빛이 올라와 있었다.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나비 문양이었다. 처음 봤으나, 이게 무엇인지는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디에고와 스위트피를 연결시켜주는 반려의 문장이었다. 그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디에고는 비늘이 선 손으로 드래곤의 발톱을 세웠다. 푸른 나비 문양이 그려진 이 손등의 가죽을 벗겨버리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차마 스위트피의 가죽을 벗겨내는 일은 하지 못했다. 대신 작은 손등을 표식이 보이지 않도록 감싸버렸다. 그렇게 하면 반려의 문장이 사라지기라도 하듯이.

* * *

한편, 깊게 잠든 스위트피는 꿈속이었다.

자신도 지금 눈을 뜨고 보고 있는 풍경이 꿈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환각인지 꿈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의식 속 기억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이 꿈은 이미 여러 차례 꿨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꿈은 무언가 달랐다.

“태초에 혼돈만이 존재하던 시절-.”

이 목소리는 스위트피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나긋나긋한 말투에 청아한 목소리로 제게 신화에 대해 들려주던 언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스위트피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아주 긴 계단을 올랐다.

“신께서는 땅을 만들어 세상을 받치고, 하늘을 만들어 또 세상을 지탱하게 하셨지.”

산처럼 높은 계단을 오를수록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계단 위에 다 오르자, 중앙에 뚫려있는 신전의 천장 위로 구름까지 뚫고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기묘한 풍경의 신전 돌담에는 마주 앉은 두 소녀가 있었다.

한 명은 황금색 자수가 수놓아진 하얀 베일을 쓰고 있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언니…….”

가쁜 호흡을 내쉬면서도 미약한 목소리로 에리카를 불렀다. 그러나 스위트피를 보지 못한 에리카는 눈앞에 있는 베일을 쓴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과 달을 만들어 낮과 밤이 존재하게 하셨고, 바다와 강물을 만들고 숲을 만들어 생명이 살 수 있는 생명을 만들어 주셨지. 그럼 그다음은 뭐였을 거 같아?”

“생명을 창조하는 일?”

“맞아.”

그런데, 에리카의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도 묘하게 익숙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 거 같은데…….

“신께서는 가장 먼저 드래곤을 만드셨지. 이유가 뭔지 아니?”

옛이야기를 해주는 에리카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는 얼굴은 스위트피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비록 이제는 오래전이라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지금 보이는 저 모습과 똑같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야.”

“…….”

“신께서는 우리들을 오랫동안 계획하셨어. 혹여나 신의 눈길이 닿지 않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에게 보호받게 하기 위해서 드래곤을 창조하신 거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눈앞에 있는 언니보다 베일을 쓴 여자에게 더 신경이 쓰이니 말이다.

“신께서는 다양한 동물들과 최초의 드래곤을 하나 만드시고는 휴식을 취하시지도 않고 곧장 인간을 창조하셨지.”

“…….”

“세레티. 신의 첫 번째 딸이라는 뜻이야.”

“…….”

“그리고 그건 너야.”

에리카가 얘기를 들려주던 여자의 베일을 벗겨냈다. 스위트피는 베일을 벗은 여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에리카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내가 왜 저기에…….”

혼란스러웠으나 이런 스위트피의 혼란을 친절하게 설명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꿈속의 상황은 아직 끝이 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널 ‘세레티’라 부르는걸.”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달리 완전하지 못해.”

“그런 말 하지 마. 내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자신의 손을…….

아니,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의 손을 붙잡은 에리카가 안타까움을 담은 시선으로 응시하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위트피는 귀로는 에리카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은 자신의 모습을 한 여자에게서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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