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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61화 (61/120)

<61화>

찬바람이 여리고 부드러운 피부를 하염없이 긁고 때렸다.

리시안셔스였다면 스위트피가 지나친 추위에 떨지 않도록, 오랫동안 거친 바람에 노출되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중간에 쉬어갔겠지만, 자신의 반려도 아닌 드래곤에게 그런 상냥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디에고는 날아가는 속도조차도 조절하지 않아, 하마터면 아래로 떨어질 뻔한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까는 리시안셔스가 쫓아올까 봐 그랬다고 치더라도, 지금은 좀 천천히 가도 될 텐데…….

자신의 몸통보다 훨씬 더 넓은 드래곤의 발목을 끌어안은 스위트피는 거친 바람에 눈을 뜨지 못하면서도 결코 디에고에게 속도를 늦춰달라 말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자신의 언니를 죽이고 마을을 불태운 원수에게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록, 제 반려를 두고 디에고를 따라온 처지지만.

『눈을 떠라, 꼬마야.』

디에고는 스위트피가 어떤 처지인지 알고 있는 것인지, 스위트피에게 눈을 뜨라고 종용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불길했기에 스위트피는 눈을 억지로 치켜떴다. 바람 때문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흐르는 시야 속에 저 멀리,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 보였다.

이윽고 드래곤이 날갯짓을 멈추며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으앗!”

섬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성, 그중 성벽 위에 스위트피를 내던진 디에고는 곧장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바닥을 굴러 무릎이 까졌다. 안 그래도 오랜 비행에 몸이 약해져 어지러웠던 스위트피는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리시안셔스와는 다르게 손가락 마디마디가 두꺼운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가는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디에고 님!”

스위트피는 정신없이 끌려가면서도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성벽을 지키고 있어야 할 기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을 경계하기는커녕,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디에고가 이 성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이상한 모습은 한 번뿐만이 아니었다. 디에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 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성에서 시종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디에고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들이 왜 당신을 쫓아내지 않아? 이 성의 진짜 주인은 어디에 있고?”

“아, 그 살만 뒤룩뒤룩 찐 수염 긴 노친네 말이지?”

“윽……!”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몸을 거대한 홀 중앙으로 내던졌다. 스위트피는 이번에도 중심을 못 잡고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을 뒹굴었다.

“엄살은.”

디에고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스위트피를 지나쳐 세 개의 계단을 올라 성주의 자리에 앉았다.

“사람 좀…….”

바닥을 짚어 간신히 일어선 스위트피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만 집어 던져!”

“오, 성질부리는 거야?”

“난 물건이 아니야!”

“물건은 아니지만 내겐 물건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지.”

디에고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넌 내 손아귀에 들어왔고, 여기엔 리시안셔스처럼 널 과보호해 줄 존재는 없어.”

“…….”

“난 그 머저리와는 달라. 널 오냐오냐 해 줄 생각 없다고. 그러니까 까불 생각 따윈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디에고는 스위트피를 이렇게 막 대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데려오기만 하면 어르고 타이르고, 달콤하게 혓바닥을 놀려 어린 숙녀의 마음을 제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더는 저 꼬마에게 예전처럼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휘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디에고는 스위트피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이미, 작은 인간 여자에게 휘둘리고 있는 중이었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강제로 빼앗아 오다시피 한 거라 더럽기도 했다.

“아니. 너야말로 날 이렇게 함부로 대해서 좋을 게 없을걸?”

“무슨 자신감이지?”

“너에겐 내가 필요하잖아.”

당사자인 스위트피가 모르고 있을 뿐, 이미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감정적으로 충분히 휘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스위트피는 지금 이 자리에서 디에고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제대로 쥘 생각인지, 한 마디도 지려 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따라온 이유는 알아낼 게 있어서야. 리시안셔스의 과거와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나도 당신을 돕지 않겠어.”

“넌 이미 내 영역 아래에 있어. 지금 내가 네 목을 조른다고 해도 널 도울 인간은 하나도 없단 뜻이지.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나?”

“당신은 절대 날 못 죽여.”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나 보네.”

안 되겠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제대로 겁을 줘서 기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디에고는 스위트피를 상대로 힘을 쓰려고 했다.

“당신은 나 아니면 안 되잖아.”

그러나 디에고의 생각이 틀렸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당신을 도울 수 없다는 거 다 알아. 나보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스위트피는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신과 기 싸움 할 생각 없어. 내 가족을 죽이고, 죽은 언니를 본떠 인형으로 만들어 모욕까지 한 당신과 말싸움한답시고 이렇게 얼굴을 계속 마주 보는 것도 껄끄러운 일이야.”

“…….”

“그러니까, 협조적으로 굴어. 나도 당신에게 협조할 테니까.”

디에고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의 저 여자는 리시안셔스에게는 어떻게 대했을까.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처럼 뾰족한 세모눈을 뜨고서 독한 말만 내뱉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추가로 말해두겠는데, 다시는 날 짐짝처럼 내던지지 마. 아니, 그냥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마.”

얼마나 예쁘게 굴었을까.

독기가 아닌 애정이 서린 눈으로 바라봤겠지. 자신에게는 제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지만, 리시안셔스가 뺨을 어루만지면 기꺼이 얼굴을 내맡겼겠지.

“유념하지.”

괜한 감정이 치솟아 올라와 스위트피에게 더 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감정을 꾹꾹 억누른 디에고가 동의의 대답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디에고를 쏘아 본 스위트피가 홱, 돌아서서 홀을 나서려고 했다. 짧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하얀 목선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디에고는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대답을 머잖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어쩌지.”

속으로는 조급했지만 겉으로나마 침착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스위트피의 발목을 붙잡았다.

“네가 제시한 조건들 중 하나는 지키지 못할 거 같은데 말이야.”

“무슨 조건?”

본인 딴에는 독기를 품은 것이겠지만 제 눈에는 새침하게밖에 안 보이는 스위트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디에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가까이 갈수록 스위트피는 손가락 끝을 잘게 떨었지만 결코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마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것이겠지.

“미리 사과하지.”

“뭐, 뭘?”

“네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말라던 말, 지키지 못할 거 같거든.”

디에고가 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손이 자신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워내자 스위트피는 결국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이내 닿아온 감촉은 뺨에 닿은 간지러운 온기였다.

“거봐, 이미 닿고 말았잖아.”

의도해서 손을 댄 거면서, 마치 실수로 만진 것처럼 뻔뻔한 반응이었다.

찰싹, 디에고의 손을 내친 스위트피가 뒤늦게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황급히 돌아서서 디에고에게서 멀어졌다.

“…….”

디에고는 스위트피가 멀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거 같았다.

“하,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자신의 한심함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이제는 휘둘리지 않고, 휘두르는 쪽이 되려고 했는데. 또 저 꼬마에게 휘둘린 기분이었다.

* * *

성에는 무수히 많은 방이 있었다. 그중 아무 방에나 들어간 스위트피는 두꺼운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디에고에 의해 긁힌 무릎이 아팠고, 하도 넘어져서 뼈가 부딪힌 탓인지 욱신거리기도 했다.

‘난 절대 울지 않을 거야.’

스위트피는 훌쩍거리면서도 눈은 부릅뜨고서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리시안은 뭐 하고 있으려나…….’

기껏 구해 주고 지켜 주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목숨을 늘려줬는데, 다른 드래곤과 가 버렸으니 괘씸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나 같은 건 잊어버렸을까.

자신을 향한 리시안셔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으니, 지금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있을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조금 못된 마음인 건 알지만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날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나는 리시안셔스를 못 잊을 테니까.

‘벌써 보고 싶다…….’

내일부터는 결코 평화롭고 순탄한 시간을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마음껏 리시안셔스를 그리워하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스위트피는 눈을 감았다.

“리시안…….”

잠꼬대처럼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른 스위트피는 알지 못했다. 손등에서 피어난 푸른 나비 모양의 문양을. 그리고 흐린 날씨의 창밖에서 푸른 나비가 잠든 스위트피를 바라보다 유유히 날아간 것도.

* * *

그날 밤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이 되어도 회색빛 구름 때문에 태양이 보이지 않아 어두운 침실에 있으면 밤과 구별이 되지 않는 날씨이기도 했다. 디에고는 다소 들뜬 모습으로 그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성의 시종들에게 다양한 인간들의 음식을 내오게 시켰다.

지금의 그 꼬마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그 또한 인간의 음식은 뭐가 맛있는지 모르니, 그냥 무조건 맛있는 걸로 많이 만들어오라고 명령을 내린 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디에고는 시종들에게 스위트피를 찾아오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스위트피가 어느 침실로 들어갔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찾아오라는 건 무책임한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성에서 오래 일한 시녀가 스위트피를 금방 찾아내기는 했다.

“반려님, 일어나세요.”

그러나 스위트피의 몸에 손을 댄 시녀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몸이 불덩이 같았다. 침실을 나선 시녀는 빠른 걸음으로 디에고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했다.

“뭐라고?”

디에고의 되묻는 목소리에 시녀는 벌벌 떨며 다시 한번 고했다.

“몸이 뜨거우시고 호흡이 가쁜 것이, 감기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디에고에게서는 마땅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시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만 마주친 디에고의 살벌한 표정에 잠시 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디에고의 눈동자는 누군가에게 깊은 분노를 느끼는 것처럼, 살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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