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스위트피는 이제야 리시안셔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로는 그가 인간이 아닌 신에 가까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인간의 죽음에 보이는 연민이나 죄책감은 너무 미약해서 오히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만 와닿게 했다.
‘그렇다면 리시안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껏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여자로 봐 주지는 않아도, 다른 의미로 그에게 특별한 존재일 거라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여 주던 애정이나 관심이 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작고 사소한 것이었다면?
작고 약한 짐승을 해친 것과 똑같이 미약한 죄책감을 보이는 지금처럼, 제게 보이는 특별한 관심이나 돌봄도 사실 기르고 있는 동물을 향한 애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면…….
스위트피는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리시안셔스의 모습과 눈앞에서 보이는 모습이 달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더는 리시안셔스를 믿지 못할 것 같았다.
리시안셔스만큼은 다른 드래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나마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걸 위안 삼기에는, 이제 자신을 향한 리시안셔스의 진심마저도 의심이 갔다.
다른 인간들을 피도 눈물도 없이 해치는 드래곤이 자신이라고 해서 남들과 다르게 생각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 봤지?』
“헉……!”
목이 잘린 드래곤이 입꼬리를 찢어져라 비틀며 웃었다.
『리시안셔스는 저런 드래곤이야.』
죽은 드래곤의 입을 빌린 디에고가 스위트피에게 살살 속삭였다.
『너의 드래곤은 다를 거라 생각했어?』
“시, 시끄러워! 듣고 싶지 않아……!”
『저 녀석이나 나나 똑같아. 같은 종족인 이상, 본능이 같은 건 어쩔 수 없는 법이지.』
“아, 아니야! 리시안은, 리시안셔스는, 달라. 다르단 말이야…….”
『너희 인간들도 그렇잖아. 덫에 걸린 짐승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사냥꾼도 있겠지만, 조금의 가책도 못 느끼는 사냥꾼도 있듯이.』
“제발….”
『리시안셔스는 그중 짐승에게 작은 연민을 느끼는 사냥꾼에 속하는 거뿐이지.』
“제발 조용히 해……!”
스위트피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악에 받친 목소리였지만, 디에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스위트피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더 크게 웃었다.
스위트피가 갇혀 있는 환각의 공간에는 디에고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이렇게나 끔찍할 수 있다니. 쇠를 긁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에 스위트피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한참을 그렇게 견디고 있었을까. 칼날보다 날카롭게 느껴지던 디에고의 웃음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장면을 보고는 귀를 막았던 손도 떼어 냈다. 정확히는 팔에 힘이 풀려 귀를 막고 있던 손이 떨어진 거였지만.
리시안셔스는 또 인간을 죽이고 있었다. 어떤 반려는 나이가 조금 있었고, 또 어떤 반려는 자신이 리시안셔스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어리기도 했다.
그는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드래곤의 반려라면 망설임 없이 심장을 뽑았다. 어떤 날은 리시안셔스가 밤중에 찾아내어 먼저 습격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전부 너 때문이야.』
먼저 습격해 온 드래곤을 해치운 뒤, 아직 스위트피가 숨어 있는 동안 반려를 찾아내 심장을 뽑기도 했다.
『저 인간들의 죽음에는 너의 책임도 있어.』
그가 가벼운 연민을 내보인 뒤 심장을 뽑으면, 그 심장은 하얀빛과 함께 가루가 되어 리시안셔스의 손끝을 타고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리시안셔스는 하얀 빛 조각이 되어 자신에게 스며드는 인간의 심장 따윈 개의치 않고 손을 털었다. 손에 묻은 피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손에 있는 피를 닦아 내고 나면, 그는 구석진 곳에 숨어 있던 자신을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나와도 된다, 스위트피.”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정말로 산 사람의 심장을 잔인하게 뽑아내던 아까의 드래곤과 동일 인물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리시안셔스가 방금 전 피를 닦아 낸 손으로 스위트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숨어 있느라 고생했구나.”
리시안셔스가 그렇게 다정하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을 걸어 주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었다. 리시안셔스가 다치지 않고, 자신도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내보이면서.
이제 와 깨달은 사실인데, 스위트피는 자신과 리시안셔스를 습격해 온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서로 스치듯 마주치기는 했어도, 공격해 온 드래곤이 죽고 난 뒤에는 그 반려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일이 없었다. 굳이 적의 반려를 살필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은 리시안셔스에 의해 심장을 빼앗기고 죽어 가고 있었구나.
『너 때문에 리시안셔스가 다른 인간을 죽인 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봐.』
“…….”
『다른 생명을 짓밟고 지켜 낸 목숨인 줄 모르고 저렇게 웃는 꼴이라니.』
“…….”
『참으로 역겨울 따름이지.』
스위트피는 디에고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리시안셔스를 보며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제가 생각해도 역겨웠다.
『네가 리시안셔스의 곁에 있으면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될 테지.』
“하지만, 리시안이 다른 반려를 해치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거야! 리시안은 나를 지키기 위해…….”
말을 하던 스위트피는 자신이 내뱉은 발언에 스스로 놀라 말을 멈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거야?’
아니면 리시안셔스에게 면죄부라도 주고 싶은 건가?
『널 향한 리시안셔스의 애정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아.』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사실 스위트피도 그 사실이 제일 불안했다. 저렇게 다른 사람을 해친 리시안셔스에게 면죄부를 주려면 그만큼 자신을 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키우는 동물을 좀 더 오래 살게 하기 위해 다른 집의 가축들을 해치는 격이지.』
그 애정도 사실 별것이 아니라면.
별것 아닌 이유로 저렇게 다른 인간들을 죽인 거라면.
『리시안셔스가 사랑한 인간은 딱 한 명뿐이야. 그 누구도 리시안셔스에게 그 여자를 대체할 존재가 될 수는 없지.』
“…….”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너도 봤겠지?』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라 피할 수조차 없었다.
『스위트피.』
아주 오래된 사이인 것처럼, 디에고는 친근하게 스위트피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선택해.』
그가 다시 한번 스위트피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리시안셔스가 아니라 내 곁에 있겠다고 해.』
“시, 싫어! 다, 당신은…….”
『네 가족을 죽인 원수지.』
디에고는 조금도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사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목소리는 아주 당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너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아. 리시안셔스가 사랑한 여자에 관해서 자세히 알려 줄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나? 아, 애초에 언니의 남자인 걸 뻔히 알면서 계속 옆에 있는 건 경우가 아니지.』
“…….”
『그것도 언니의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
스위트피가 죄책감을 느끼는 부분을 정확하게 찔렀다. 자매와 연인이었던 남자를 좋아하면서 그의 곁에 있는 것과, 가족을 죽인 남자의 곁에 있는 것.
어느 쪽이든 최악인 건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스위트피.』
디에고의 사악한 속삭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을 알아.』
여태 디에고가 해 왔던 어떤 말들보다 가장 스위트피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발언이었다.
“거, 거짓말……. 당신이 무슨 수로…….”
『진짜야.』
목이 잘린 드래곤의 입을 빌려 말을 전할 뿐, 진짜 디에고의 모습은 이곳에 없는데도 마치 온몸이 디에고에게 붙잡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그에게 감싸여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는 기분이었다.
『너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죽지 않고, 너로 인해 리시안셔스가 인간을 죽이지 않도록.』
“…….”
『신이 주최한 이 싸움을 끝낼 방법을 알려 줄게.』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귓가에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 스위트피.
『나를 선택해.』
* * *
“허업!”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검은 호수 밖으로 빠져나온 스위트피는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두 드래곤은 아직도 전투 중이었다.
디에고와 전투 중이던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와 눈이 마주쳤으나, 가까이 다가오거나 말을 걸지는 못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 수 없을 정도로 디에고가 맹렬하게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보는 스위트피의 눈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을 내려야 할 때였다.
양쪽으로 팔을 벌린 스위트피가 힘을 쓰기 위해 집중했다. 디에고가 만든 공방에는 풀 한 포기조차 자라 있지 않아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마을 귀퉁이에 있는 식물들은 모두 스위트피의 부름에 응답했다.
길게 자란 꽃과 나무줄기가 두 드래곤이 전투 중인 하늘까지 솟아올랐다. 하늘까지 솟아오른 줄기는 리시안셔스와 디에고의 사이를 갈랐다. 마을에 있던 모든 식물의 줄기가 하나처럼 엮여 두 마리의 드래곤 사이에 거대한 벽을 만들어냈다.
디에고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는 틈을 탄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를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스위트피를 데려가 먼 곳에 숨겨 두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몰려온 새 떼들이 리시안셔스의 앞을 막았다.
『……스위트피?』
리시안셔스도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거 같았다.
“미안해요, 리시안.”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힘에 의해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묶인 사이, 디에고는 유유히 내려와 스위트피의 곁에 섰다. 스위트피는 이제껏 리시안셔스에게 그래 왔던 것처럼 디에고의 거대한 발에 올라탔다.
“저는……. 디에고와 함께 갈 거예요.”
『대체…… 어째서?』
리시안셔스는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저 녀석이 네게 뭘 보여 준 거지?』
“…….”
『저 녀석은 네게 위험해, 스윗. 네가 뭘 봤든 디에고에게 휘둘리면 안 돼.』
납득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스위트피를 얻은 디에고는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스위트피는 온 힘을 다해 자신과 디에고를 쫓아오려는 리시안셔스를 가로막고, 줄기로 묶어 버렸다.
“미안해요…….”
이걸로 끝인 줄 알았다.
“리시안……!”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비늘에 생채기를 만들어가면서까지, 스위트피의 줄기를 끊어 냈다. 그렇게 리시안셔스의 집요한 추적이 다시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안 돼!”
스위트피를 데려오려는 집념으로 리시안셔스의 방어막이 허술해진 틈을 탄 디에고가 그를 환각 속에 빠뜨렸다. 검은 호수가 순식간에 리시안셔스를 집어삼켰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리시안에게 손을 뻗었으나 순식간에 날아오른 디에고가 밤하늘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 손이 닿기는커녕 리시안셔스의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달이 유독 아름다웠던 밤, 반려와 드래곤은 서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