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둠이 한 번, 환한 빛이 한 번, 또다시 어둠이 한 번, 빛이 한 번. 어둠이 빛을 시야에서 가리기를 여러 번이었다. 눈부신 햇살에 한참 눈을 깜빡이던 스위트피는 천천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흙에 잔뜩 깔린 풀이 침대처럼 몸을 받쳐 줘서 불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눈앞에는 눈부신 태양의 황금빛이 스며들고 있는 녹색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이었다.
‘리시안이 환각에 빠져 있던 그때 봤던 곳이야.’
수도에서 리시안셔스가 디에고의 환각에 빠졌을 때,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환각 속에 몸을 내던졌었다. 이곳은 그때 봤던 그 아름다운 숲이었다.
‘디에고의 함정이야.’
디에고가 또 자신에게 리시안셔스의 먼 과거를 보여 준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결코 아니었다. 모르는 척 외면해야 했다. 그냥 여기서 계속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하면 리시안이 날 구하러 와 줄 거야…….
스위트피는 구석으로 가 무릎을 모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절대 디에고가 보여 주는 환각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스위트피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저벅저벅-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보여 주든 절대 관심 갖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스위트피의 고개는 어느새 발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한 뒤였다.
환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도 낯선 장소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위트피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웬 여자를 발견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베일을 쓴 여자였다.
‘저 여자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여자의 뒤를 쫓았다. 아름다운 숲속을 걷던 여자는 스위트피를 알아채지 못한 채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느 사원 앞에 멈춰 섰다. 저 사원이 드래곤을 모시는 신전이라는 건 신전에 장식된 조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그곳에서 베일을 벗었다.
‘언니…….’
예상했던 대로 여자는 자신의 언니 에리카였다.
사원 앞에서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내리뜨고 있는 에리카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긴 속눈썹 아래에 음영이 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스위트피는 그녀가 눈을 뜨자 곧장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어차피 자신의 모습은 에리카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언니는 전혀 다른 이 시대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도 가장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에리카와 리시안셔스는 무슨 사이일까.
‘정말로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저릿했다. 스위트피가 이렇게 혼자서 땅굴을 파고 있을 때였다.
에리카는 벗었던 베일을 다시 뒤집어썼다. 아름답던 에리카의 얼굴과 올려 묶은 아름다운 금발도, 전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베일로 인해 완벽하게 가려졌다. 얼마 안 가 금빛 햇살이 내리쬐는 숲속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그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는 하늘을 가리고도 남을 것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리시안…….”
스위트피가 잘 아는 드래곤이기도 했다.
밤하늘보다 더 까만 비늘이 숲속의 하늘을 가리다가 이내 지상으로 내려오며 점점 작아지는 몸을 따라 줄어들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리시안셔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스위트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를 내고 말 것이다.
어차피 이 순간은 리시안셔스의 과거를 보여 주는 것이고, 자신이 소리를 내 봤자 저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몰래 훔쳐보는 것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무 생생해서, 환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작은 소리라도 내면 저들이 자신을 발견할 것만 같았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모습을 저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망설임 없이 베일을 쓴 에리카에게 다가와 그 몸을 안아 들었다.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안아서 이동할 때처럼.
“아…….”
소리를 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지만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가슴께에 통증이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부정하고 싶었는데. 리시안셔스와 에리카는 정말로 연인 사이가 맞았던 것이다.
‘나는 마냥 애 취급하면서.’
자신에게는 전혀 기회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언니와는 저렇게 애틋한 모습을 보여 주고.
‘왜 하필 내 언니야.’
상대가 다른 여자였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세월을 산 드래곤이니까, 살면서 연인이 있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질투는 났겠지만, 적어도 질투심을 느끼는 걸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겠지.
그런데 하필이면 리시안셔스의 과거 연인은 자신의 자매인 에리카였고, 스위트피는 제 눈앞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살아남았던 자매의 모습을 이렇게라도 다시 보게 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추한 질투심이나 느끼고 있었다.
‘언니와 리시안이 특별한 관계였다면…….’
……아니, 사실 이미 둘의 관계는 무척 특별해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동안 말도 안 되는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품게 된 감정을 버릴 수 있을까?
스위트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 수는 없어.’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리시안셔스를 좋아하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가족들과 함께 산 시간보다 리시안셔스의 곁에서 보호받으며 지내 온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이렇게 디에고의 환각 속에서 에리카를 보게 되니 그나마 모습이 선명한 거지, 부모님은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리시안셔스가 에리카와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스위트피는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나와 그들이 들어간 사원 앞으로 향했다.
사원으로 입구로 달려가자, 긴 복도로 들어가는 스위트피와 에리카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상으로 저들의 모습을 훔쳐보면, 정말 봐서는 안 될 모습까지 보게 될 거 같다는 예감에도 불구하고 스위트피의 발은 그들의 뒤를 쫓으려고 했다.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스위트피는 에리카와 리시안셔스의 모습을 더 훔쳐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어……?”
땅에 약간의 진동이 울리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도 숲이었으나, 아까와는 분명 다른 숲이었다.
“허억! 허억!”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스위트피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 저 멀리서 다급하게 달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스위트피의 시야에 보였다. 달빛이 옷을 온통 땀으로 적실만큼 도망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비췄다. 그러나 그도 잠시, 거대한 그림자가 남자를 가렸다.
그 그림자가 무엇을 가리키는진 스위트피도 알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남자에게 다가간 스위트피는 남자가 공포에 질린 원인을 확인했다.
달빛을 가린 비늘은 검었다. 이윽고 세로로 뾰족한 동공을 가진 샛노란 눈이 남자를 응시했다.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섰다.
손등 위로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했다. 드래곤의 모습이던 리시안셔스를 보고도 무섭다는 느낌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 리시안셔스의 정체를 처음 알았을 때는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도 같긴 하나, 그와 함께한 지도 오래된 지금 리시안셔스의 본체는 스위트피에게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리시안셔스에게서는 드래곤의 모습일 때도, 거대한 뱀과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볼 때도 그 안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는데…….
지금의 리시안셔스의 눈에는 자신보다 작고 약한 존재를 향한 살의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리시안셔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남자를 낚아채기 직전, 거대한 또 다른 존재가 리시안셔스의 몸을 정통으로 밀쳤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서로 엉켜 붙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른 드래곤은 반려의 앞에서 목이 물어뜯겼다. 반려를 지키려던 드래곤은 목이 뜯긴 채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윽고 적을 죽인 검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안 돼…….”
스위트피는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으나, 불편한 다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하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리시안, 그러지 마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리시안셔스는 꼭 다른 인물 같았다. 다른 드래곤과의 전투로 다친 곳이 있는 것인지, 긴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등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흐으……. 왜, 왜 이러는 거야!”
남자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반려인 드래곤을 잃었다는 충격에 제정신이 아닌 듯 악다구니를 썼다.
“당신은 살인자야! 이런다고 당신이 신이 될 거 같아? 오늘 나와 내 반려를 죽인 것처럼 당신도 똑같이 돌려받을 거야!”
“…….”
“다른 드래곤에 의해서 당신은 죽고, 당신의 반려는 심장이 뽑히겠지! 당신이 우리에게 한 짓처럼! 똑같이 당할 거라고!”
리시안셔스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고 본인에게 쏟아지는 무의미한 저주를 가만히 들어 주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그가 심장을 취하기 전, 가엾은 드래곤의 반려를 향한 마지막 배려인 것처럼.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반려의 저주는 끝이 없었다. 결국 리시안셔스는 그의 말을 계속 들어 주지 못했다.
“말이 많구나.”
남자의 머리를 고정시키듯이 머리채를 잡은 리시안셔스가 피가 흘러내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너의 드래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이제껏 널 살려 왔을 텐데.”
푹!
리시안셔스의 손이 남자의 왼쪽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스위트피는 비명을 간신히 참아 낸 대신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자신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목격하게 된 것에 대한 충격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스위트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건 리시안셔스가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자신의 눈앞에서 다른 인간의 심장을 뽑아내고 있는 존재는 리시안셔스가 맞았다. 자신이 준 안대를 착용한 리시안셔스는, 한쪽 금안에 싸늘함만을 품은 채 남자의 심장을 뽑아냈다. 리시안셔스의 손에는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된 심장이 들려 있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마.”
냉정하던 리시안셔스의 금안에 미약한 죄책감이 서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화감이 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뽑아 놓고는, 그저 작은 동물 하나 사냥한 것만큼의 죄책감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