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스위트피가 목소리를 내기 전이었다.
쩌적, 쩌적-
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묘한 느낌에 스위트피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천장이 들어 올려졌다.
“으앗……!”
말 그대로 천장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이다.
“리시안셔스……!”
검은 비늘이 스치더니, 샛노란 눈이 스위트피를 발견했다. 그러나 눈 맞춤은 짧았다. 제 곁에 있던 디에고도 본체로 변한 탓에 땅이 흔들렸고, 스위트피는 그 자리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멀쩡하던 천장이 한꺼번에 뜯겨 나가면서 잔해가 아래로 떨어졌다. 디에고가 부리는 인형들이 스위트피를 감싸기는 했으나 에리카의 얼굴을 본 스위트피가 발작하며 밀치고는 구석진 곳에 가서 몸을 웅크렸다.
드래곤의 전투 현장에 있는 건 스위트피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에 몸을 웅크린 스위트피는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아까 디에고가 했던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계속 좋아한다고 고백하다 보면 리시안셔스도 어쩌면 내 마음을 받아 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내 헛된 바람일 뿐이야. 리시안셔스는 여전히 날 어린애로만 보는걸?
그래도 리시안셔스가 곁을 내어주는 인간은 나뿐이잖아.
그건 리시안셔스가 반려로 묶인 어린아이를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괜찮아, 상관없어.
정말로 상관없어? 리시안셔스가 언니와 특별한 사이였을지도 모르는데.
“…….”
그리고, 리시안셔스도 사실 다른 드래곤과 다를 바 없잖아. 내 가족을 죽인 디에고처럼, 리시안셔스도 인간의 심장을 취했다고.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었을 거라잖아. 리시안은 날 지키려고 그런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너한테 숨기는 것투성이인데.
“리시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생각을 어느 쪽으로 갈피를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전투는 시작되었다. 먼저 공격한 것은 디에고였다.
“아…….”
디에고에게 반격하던 리시안셔스의 거대한 발에 의해 모여 있던 인형들이 부서지고 망가졌다. 그 속에는 에리카의 얼굴을 한 인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언니가 죽던 그 날. 언니의 심장을 쥔 디에고의 회색 비늘이 검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스위트피의 머릿속에서 그 드래곤은 이내 디에고가 아닌 리시안셔스로 바뀌었다.
‘우리 언니가 당했던 것처럼 리시안도 다른 인간의 심장을 뽑았다고?’
스위트피는 언제나 살고 싶었다. 가족들을 다 잃은 채 다리가 불구가 된 그 날도 간절하게 살고 싶었고, 마고 부인과 크리스에게 학대당하던 시기에도 생존에 대한 욕구를 버린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리시안셔스에게 매달리고 그와 함께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가 그를 좋아하게 된 지금은, 자신을 살게 해 주기 위해 다른 인간의 심장을 뺏었다는 그가 고마웠으나……. 그런 고마움을 느끼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살고 싶었으나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서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어쩔 수 없이 드래곤의 반려로 선택된 사람들일 텐데. 어느새 하늘로 날아오른 드래곤이 뱀처럼 엉겨 붙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이 평온하던 마을에 의도치 않게 재앙을 불러오고 말았다.
‘리시안을 도와야 해……!’
리시안셔스는 전투 도중 스위트피가 끼어드는 것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스위트피는 그가 위험에 처할 거 같으면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서고는 했다. 특히나 디에고는 스위트피에게 있어서는 가장 지독한 상대라 평소라면 곧바로 리시안셔스를 도왔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모든 걸 알려 줄게.」
그러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의문을 모두 해소시켜 줄 사람이 디에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내가 물어보면 리시안도 대답해 줄 거야.’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도 떠올랐다. 리시안셔스는 드래곤들의 전쟁에 관한 규칙을 알려 줄 때 14일 이내에 다른 반려의 심장을 빼앗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알려 주지 않았었다.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일인데도.
그동안 자신을 지켜 주려고 밤이 되면 몰래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하면서도 제게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은 리시안셔스가, 과연 물어본다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줄까? 그리고 자신의 언니와 관련된 것은 어떻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드래곤 두 마리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어느새 고린도가 솟은 디에고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위트피는 그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어……?”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몸이 아래로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닥을 확인하자, 새까만 구덩이가 스위트피의 몸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 * *
두 드래곤은 이전과는 다르게 대등해진 상태였다. 디에고의 원래 힘인 사물과 똑같은 물건을 만드는 힘은 같은 드래곤과의 전투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축에 속했다. 그러나 지금 디에고의 머리에 나 있는 고린도에서 나오는 힘은 얘기가 달랐다.
대상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들춰, 그중 가장 끔찍했던 기억 속에 잠기게 하여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리시안셔스가 가진 고유의 능력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디에고의 뿔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칼날은 리시안셔스를 과거의 악몽에 빠뜨리려고 했지만, 투명한 막이 그 공격을 튕겨 냈다. 뭐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 낼 수 있는 방패의 대결이었다.
디에고의 공격이 리시안셔스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투명한 막에 금을 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방어막이 뚫리지는 않았다.
『삶에 미련 없는 척하면서, 저 인간 여자아이를 이렇게까지 지키려는 이유가 뭐야?』
디에고가 대놓고 리시안셔스를 향해 빈정거렸다.
『저 꼬마애를 반려로서 사랑하기라도 해?』
『그러는 너야말로 이러는 이유가 뭐지.』
리시안셔스의 한쪽 금안이 디에고를 응시했다. 한쪽 눈을 잃은 애꾸눈 주제에, 시선만으로 상대를 긴장시키게 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디에고는 아직도 리시안셔스의 눈빛에 긴장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보아하니 아직도 반려가 없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넌 이 싸움과 관련 없는 것 아닌가.』
『지금 나더러 자격이 없으니까 주제를 알라는 건가?』
『그 이후로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나에 대한 악감정으로 이러는 거라면 그만둬.』
리시안셔스의 말투는 디에고를 한심해하는 거 같기도, 아이처럼 어르고 타이르는 거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리시안셔스가 여전히 그를 자신보다 아래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디에고는 자신에게 뿔을 빼앗기고도 여전히 고고한 척하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어린아이다. 너와 나의 오래된 악연으로 희생되기에는 아까운 아이야.』
『하-』
멍청하긴.
디에고는 조롱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걱정 마, 리시안셔스. 죽일 기회라면 이미 여러 번 있었어. 난 저 애를 해칠 생각이 없어.』
『그렇다면 스위트피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글쎄, 왜일까.』
말끝을 길게 늘이던 디에고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스위트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반려가 탐이 난다고 한다면, 믿겠어?』
『무슨 헛소리를…….』
리시안셔스는 디에고의 발언을 쓸데없는 말로 상대의 속을 뒤집으려는 단순한 수작으로 치부했다. 스위트피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리에서 전투를 크게 벌이면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무리가 가는 한이 있어도 디에고를 몰아세워 스위트피에게 떨어지기 위해 리시안셔스는 불을 내뿜어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상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스위트피!』
지상에 있는 스위트피가 원형 모양으로 생겨난 검고 끈적한 물에 빠지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리시안셔스는 아래로 급하강했다. 본체화를 푼 리시안셔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스위트피에게 손을 뻗었다.
물속에 잠기던 스위트피의 손끝과 리시안셔스의 손끝이 닿았다. 그러나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스위트피의 몸은 리시안셔스의 눈앞에서 아래로 깊게 잠겼다.
“스위트피!”
망설임 없이 리시안셔스도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위험 때문에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근처에 그에게 적의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크윽!”
드래곤의 앞발로 인간화 상태인 리시안셔스의 몸통을 들어 올린 디에고가 리시안셔스에게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조롱하듯 말했다.
『너에게는 환각을 튕겨 낼 힘이 있을지 몰라도, 너의 반려에게는 아니겠지.』
디에고는 이미 아래까지 깊숙하게 잠겨 스위트피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삼켰다.
『걱정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네 반려를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
“말했잖아? 네 반려가 탐이 난다고.”
리시안셔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당장 스위트피를 구하러 가는 것은 디에고가 방해하는 이상, 무리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디에고를 죽이면 된다.
“너와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 같군.”
디에고는 억지로 손아귀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디에고의 손아귀에서 순식간의 본체로 돌아간 리시안셔스가 야만적인 짐승처럼 디에고의 목을 사납게 물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