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57화 (57/120)

<57화>

“날 찾았던 거야?”

“그래, 널 찾았지. 그것도 아주 오래.”

디에고는 장식장에서 가뿐하게 뛰어내렸다. 인형들이 순식간에 갈라져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런 인형들은 무슨 수로 만든 거지? 우리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물을 본떠 똑같은 물건을 만드는 건 내가 가진 본래의 능력이거든. 네 덕분에 봉인되어 있다가 깨어났으니,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얘기해! 내 덕분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내 뿔은 본래 리시안셔스의 것이지. 그러니까 리시안셔스의 상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선선히 설명을 해 주던 디에고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눈이 점차 커졌다.

“잠깐만. 리시안셔스도 봉인되어 있던 능력이 깨어났을 텐데. 너 설마, 리시안셔스에게 아무것도 못 들었어?”

“듣다니, 뭘?”

스위트피로서는 정말이지, 디에고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반면, 디에고는 스위트피의 반응을 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배를 부여잡고, 허리까지 숙여 가며 소리 내어 웃고 있는 중이었다. 스위트피는 미친놈으로밖에 안 보이는 디에고를 경멸을 담아 쏘아봤다.

“이야……. 진짜 재미있네.”

몸을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웃음을 멈춘 디에고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스위트피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위트피는 당연히 디에고의 손길을 피했으나, 이윽고 들려오는 디에고의 발언에 충격을 받아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넌 리시안셔스에게 조금도 반려로서 여겨지고 있지 않구나?”

그건 스위트피가 애써 긍정적인 생각과 희망으로 외면해 오던 사실이었다.

‘리시안셔스는 날 좋아하지 않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거는 귀여운 꼬마 아이를 지켜보는 시선에 불과했다. 어쩌면 키우는 동물에게 애정을 쏟는 인간의 가벼운 애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시안셔스가 그렇게라도 애정을 쏟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으니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시간이 흘러서 자신이 성숙해지면, 계속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다 보면…….

‘리시안셔스도 날 반려로 여겨 줄지도 몰라.’

신에 의해서 묶인 이름뿐인 반려가 아니라, 진심으로 반려라 여겨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허튼 희망일 뿐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조금도 여지를 준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불쌍해라.”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도하게 연민을 품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디에고가 스위트피의 얼굴을 감쌌다 리시안셔스만큼이나 커다란 손은 스위트피의 한쪽 얼굴을 다 감싸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리시안셔스에게 고백했지? 좋아한다고.”

충격받아 굳어 있던 스위트피의 눈이 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스위트피.”

“…….”

“리시안셔스같이 점잖은 놈은 너 같은 꼬맹이를 조금도 여자로 느끼지 않을걸?”

“신경 꺼! 허튼 소리하지 말고, 이 인형에 대해서나 설명해!”

“아, 그렇지. 네가 꼬맹이인 것과 리시안셔스가 널 사랑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긴 하지. 왜냐하면 리시안셔스는 이미 잊지 못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디에고의 손이 이번에는 이들의 곁에 서 있던 에리카를 닮은 인형에게 향했다. 디에고가 뺨을 쓰다듬자, 가짜 에리카는 고개를 더욱 기울며 눈을 감았다. 길들여진 고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의 언니를 본떠서 인형을 만든 것도 모자라, 그 인형을 제 앞에서 애완동물처럼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스위트피는 겁도 없이 디에고의 몸을 밀쳤다.

“허어, 이렇게 난폭할 수가 있나?”

“저 인형에게 손대지 마.”

“내가 만든 작품에 손대지 말라고?”

“우리 언니의 모습을 본떠 만든 거잖아!”

“하지만 껍데기만 닮았을 뿐, 너의 진짜 자매는 아니지.”

굳게 다문 어금니가 저절로 갈렸다. 저 드래곤이 본인이 죽인 에리카를 모욕하듯이 인형을 만든 것도 싫었고, 저 인형 자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형을 이대로 외면하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디에고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리시안셔스가 내가 보여 준 과거의 환각 속에 빠져 있을 때, 너도 봤잖아.”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기는. 뻔히 다 알면서.”

디에고가 피식, 웃었다.

“리시안셔스가 이것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으면서 모르는 척하기야?”

디에고가 말하는 ‘이것’은 에리카를 뜻했다.

“궁금한 게 많을 거야. 네 궁금증을 해소해 줄 사람은 나뿐일 테고.”

“리시안셔스에게 물어보면 돼. 당신에게 들을 건 하나도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왜 이제까지 리시안셔스에게 단 하나도 묻지 못했을까?”

“…….”

“너처럼 모르는 것투성이인 드래곤 반려는 없을걸.”

에리카와 관련된 건 차마 리시안셔스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자신은 리시안셔스를 좋아하는데, 리시안셔스가 언니와 특별한 관계라고 하면 슬프고 혼란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문은 계속해서 넘쳐 났다.

에리카에게는 다른 반려 드래곤이 있었다. 그 환각 속에서 에리카가 리시안셔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시대상으로 봤을 때 에리카가 그 풍경 속에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스위트피는 어차피 디에고가 만든 환각에서 본 것이니, 자신을 흔들기 위한 그의 교묘한 속임수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와 같이 가자.”

“뭐라고……?”

“나는 네가 원하는 대답을 다 해 줄 수 있어.”

“필요 없으니까 저리 가! 지금 당장 리시안을 부를 거야!”

“그 녀석은 지금 이 마을에 없는 거 같은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걸 어떻게…….”

“네가 이 밤늦은 시간에 혼자 나왔다면 뻔한 거 아니겠어? 그 녀석도 다른 반려의 심장을 찾으러 자리를 비웠겠지.”

“무슨…….”

“덕분에 운이 좋았어. 당연히 리시안셔스와 싸울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스위트피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았다.

“리시안이 다른 반려의 심장을 찾으러 갔다니…….”

황당해하는 스위트피의 중얼거림에 외려 디에고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스위트피는 울컥해서 디에고의 말에 반박했다.

“리시안셔스를 당신이랑 똑같은 취급하지 마! 리시안은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라. 신이 될 욕심도 없고, 인간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지도 않는다고!”

“푸흣……. 하하하하!”

디에고가 아까처럼 배를 부여잡고 실컷 웃었다.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웃은 그는 너무 웃어 현기증이라도 나는지 다른 인형들에게 기대섰다. 여전히 얼굴에는 조롱과 웃음기가 가득한 채였다.

“신이 되고 싶은 드래곤들도 분명 많겠지만……. 그 모든 드래곤들이 똑같은 이유로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개중에 리시안셔스처럼 아무 욕심 없는 드래곤이 과연 한 명도 없었겠어?”

“…….”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너에게 리시안셔스가 네게 말해 주지 않은 또 다른 규칙을 말해 주지.”

인형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킨 디에고가 스위트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14일.”

디에고가 검지로 스위트피의 왼쪽 가슴께를 꾹 눌렀다. 스위트피는 뒤로 밀려나며 미약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14일 이내의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여서 심장을 취하지 못하면.”

“…….”

“자신의 반려가 죽는다.”

직접적으로 설명을 들었지만 이해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디에고가 이해하기 어렵게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줬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했다.

“네가 살아서 이렇게 자랄 수 있었다는 건, 리시안셔스가 너 하나 살리자고 다른 죄 없는 인간 반려들을 죽여 왔기 때문이야.”

리시안셔스가 나 때문에…….

스위트피의 머릿속에는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에 타들어 가며 괴로워하던 바이올렛은 리시안셔스가 죽이긴 했지만, 그건 그 아이가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하고자 했던 방법이었다.

전에 다른 드래곤의 습격이 있을 때 그의 반려를 죽인 적은 있긴 했지만, 그건 실수였다. 리시안셔스도 무척 당황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실수로 인간을 죽여서 당황한 게 맞나……?’

어쩌면 그때 리시안셔스가 당황했던 것은 인간을 죽이는 모습을 제게 들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디에고의 말을 듣자 머릿속에서 그간 의문이었던 사실이 하나둘씩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습격이 있을 때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숨겨 두고서는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습격이 오랫동안 없었을 때에는 어땠을까.

자신은 밤이 되면 식사한 뒤에 일찍 잠드는 편이었고, 한번 자기 시작하면 아침이 될 때까지 좀처럼 깨어나는 법이 없었다. 리시안셔스에게는 밤에 몰래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찾으러 나가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리시안은 그런 드래곤이 아니야…….’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마음을 줄 수 있었던 수많은 이유 중 한 가지는 그가 다른 드래곤처럼 인간의 생명을 쉽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면?

‘하지만 나를 구하려고 그런 거잖아.’

내 생명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디에고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너에게 모든 걸 알려 줄게.”

리시안셔스가 네게 알려 주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을.

스위트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디에고는 뱀과 같은 눈을 반짝이며 스위트피의 대답을 종용했다.

“내게 오면 돼. 응?”

스위트피의 떨리는 입술이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달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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