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56화 (56/120)

<56화>

“진짜 너무하다…….”

어떻게 빵 부스러기를 나눠 준 친구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지?

‘어차피 비둘기는 리시안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할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비둘기의 성격상, 약 올리려고 리시안셔스를 찾아서 이르겠다고 하는 것일 테다. 어차피 진짜로 리시안셔스를 힘들게 찾아서 자신의 밤 외출을 일러바치는 정성을 보일 만큼의 걱정을 할 정도로, 의리가 있는 비둘기는 아니었다.

밖에 혼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리시안셔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특히나 드래곤들의 전쟁을 떠나서 여자 혼자서 밤 중에 홀로 돌아다니는 건 분명 위험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언니와 관련된 일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에리카를 닮은 그 인형의 정체를 확인해야만 한다.

물론 리시안셔스와 함께 온다면 좋겠지만, 디에고가 보여 준 환각 속에서 에리카와 묘한 분위기로 함께 있던 리시안셔스를 떠올리면 차마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이곳까지 함께 올 수 없었다. 아주 만약에 정말 에리카와 리시안셔스가 자신은 모르는 특별한 관계라면, 그 둘을 마주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언니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따위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말이다.

애써 생각을 갈무리한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끼익-

살짝 열려 있는 문을 더욱 열자, 다시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렸다.

“저기……, 계세요?”

갑자기 문이 열린 것이 의아해서 조심스럽게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대답은커녕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스위트피는 조명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건물 내부로 한 발짝 내디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둘기를 붙잡을 걸 그랬나.’

막상 혼자 남으니, 사방을 감싸고 있는 어둠이 주는 두려움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용기를 내서 내부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끼익-, 철컥.

“…….”

뒤에서 또다시 낡은 철갑 소리가 들리며 문이 닫혔다.

‘방금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아무도 없는데 문이 혼자서 어떻게 잠기겠어.

스위트피는 애써 의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천천히 공방 내부를 둘러봤다. 여전히 어둡긴 했으나 시야가 어둠에 적응한 덕분에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사방에는 인형이 가득했다. 그러나 아까 바깥에서 봤던 것처럼 그저 잘 만든 인형에 불과했다. 사람처럼 생긴 인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를 닮은 인형은커녕 사람을 닮은 인형조차 보이지 않자, 스위트피는 슬슬 리시안셔스에게 비밀로 한 이 외출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툭-

좀 더 깊숙한 내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스위트피는 좀 더 안으로 향했다.

“헉……!”

그리고 그곳에서 일자로 길게 서 있는 수십 개의 인형을 보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사람과 똑같은 크기의 인형들이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스위트피는 어두운 공간에서 그들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손을 뻗어, 인형의 이목구비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피부가 부드러워…….’

인형이라고 하기에는 피부가 부드러웠고, 온기마저도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머리카락의 털도 인형과는 다르게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사람이 아닌데, 사람과 똑 닮은 형상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물린 스위트피는 한 걸음 물러나 다른 인형들도 살폈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본떠 만든 것처럼, 생김새는 각각 달랐다. 조금도 닮지 않은 것이 만든 사람의 일관적인 취향은 조금도 반영되어 있지 않은 거 같았다. 한 사람이 만든 인형이라면 본인의 취향상 어느 정도 얼굴이 비슷해야 하는데, 각자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스위트피는 다른 인형도 만져 봤다. 이 인형도 아까 만져 본 인형과 똑같았다. 스위트피는 다른 손으로는 인형을 만지고, 또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인형의 뺨을 만질 때면, 자신의 뺨을. 인형의 입술을 만질 때면, 자신의 입술을. 비교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인형의 피부 촉감과 자신의 피부 촉감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스위트피가 인형의 속눈썹으로 손을 옮길 때였다.

깜빡.

인형의 눈꺼풀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설마…….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앗!”

등이 반대쪽에 서 있던 인형과 부딪혔다. 화들짝 놀라서 등을 떼어 내려고 할 때였다. 양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

스위트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반듯하게 서 있는 자세로 정면을 보고 있던 인형이 지금은 스위트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고 있었다.

“으……, 으아아악!”

스위트피는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스위트피의 몸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가기는커녕,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얌전히 서 있던 수십 개의 인형들이 스위트피의 앞을 가로막았다.

스위트피는 반대로 도망치려고 돌아섰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사람을 닮은 인형들이 스위트피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흐으…….”

두려움에 저절로 호흡이 가빠졌다.

“스윗-.”

그런데 수많은 인형들 사이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다정하게 스위트피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이름이 아니라, 애칭으로.

스위트피를 저렇게 불러 주는 건 죽은 가족들과 리시안셔스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지금 이 목소리는 스위트피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는 목소리였다.

“내 동생, 겁을 먹었구나.”

들어 본 지 너무 오래된 목소리라서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언니……?”

인형들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스위트피가 잘 아는 얼굴이 나왔다.

“이리 오렴, 스윗.”

자신보다 채도가 낮은, 밀색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에리카가 두 팔을 벌린 채 스위트피를 향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그 자리에서 굳어서 한 발자국도 꼼짝할 수 없었다.

“왜 그러니?”

에리카는 굳어 있는 스위트피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거니?”

언니를 닮았다. 외모만 보자면 분명 자신의 언니였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에리카의 얼굴을 보고도 반가움이나 애틋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에리카는 분명 사람처럼 생겼으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응당 느껴져야 하는 기운이, 에리카에게서는 조금도 뿜어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가족끼리 재회하는 건데…….”

“…….”

“반응이 너무 차갑잖아.”

에리카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릴 적과는 다르게 눈높이가 맞는 에리카를 보던 스위트피는 그제야 깨달았다. 에리카는 표정이 없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으나, 누군가가 도자기를 빚어 만든 것처럼 어색했고, 눈동자에는 영혼이 담기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스윗.”

에리카가 스위트피를 끌어안았다.

‘언니…….’

정확히는 언니를 닮은 인형의 품은 따뜻했다. 하지만 자신을 감싼 손가락 마디의 관절이 다른 인형과 똑같은 구체로 이뤄진 것을 보고 스위트피는 두려움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그때,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위트피는 가짜 에리카에게 안긴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벽에 붙어 있는 높은 장식장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런 짓을 벌인 작자를 확인한 스위트피의 눈에 분노로 핏발이 섰다.

“……디에고.”

인형보다 더 인형처럼 생긴 남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덫에 걸린 짐승을 포획한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내 선물이 마음에 안 드나 봐?”

스위트피는 손끝부터 시작해서 전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점점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욱 커졌다.

이제야 알 거 같았다. 왜 인형이 언니와 닮았는지. 굳이 기사로 에리카를 닮은 인형을 실어서 외부로 공방을 알린 것은 아마도 자신을 불러들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비열해.”

“리시안셔스에게는 말도 예쁘게 하면서 내게는 말투가 뾰족하네?”

스위트피에게 디에고는 존중할 가치도 없는 작자였다. 비록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다고는 하나, 그래도 끝까지 디에고를 믿고 따르던 바이올렛을 그가 어떻게 버렸는지 아직도 선명했다.

무엇보다 언니의 심장을 뽑고, 가족들을 죽였으며, 고향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원흉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리시안셔스를 위기에 빠뜨렸고, 다른 드래곤과 합심해서 자신을 납치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죽은 자신의 언니를 이런 식으로 모독까지 하고 있었다.

스위트피가 그를 존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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