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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55화 (55/120)

<55화>

- 아, 푹 자고 있었는데 왜 깨우고 난리야!

“미안해. 근데 졸린 건 나도 마찬가지야.”

- 넌 졸리지만 자발적으로 안 자고 나온 거고! 나는 잘만 자다가 너 때문에 깬 거잖아?

“물론 그건 정말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내가 너랑 마주칠 때마다 늘 빵 부스러기를 주고는 했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날이 밝으면 또 나한테 얻어먹으러 올 예정이었으면서…….”

스위트피의 말에 양심이 찔린 비둘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할 말이 없어 딴짓을 부리는 것이다.

“안 그래도 리시안은 네가 시끄럽다고 그냥 통구이로 잡아먹자는 거 내가 간신히 말리고 있는 중인데…….”

- 뭐어?! 드래곤님이 날 죽일 생각이라고? 그걸 왜 이제 말해!

“걱정하지 마. 리시안에게는 네가 내 친구니까 그러지 말아 달라고 했어.”

- 고맙다, 친구야!

자연스럽게 호칭이 ‘인간아’에서 ‘친구야’로 바뀐 게 더 괘씸하고 얄밉긴 했으나 스위트피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비둘기를 귀찮아하고 거슬려 하기는 했으나, 진심으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물론 통구이로 먹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위트피가 굳이 리시안셔스의 얘기까지 꺼내 가며 없는 얘기로 비둘기의 겁을 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내 덕분에 빵도 얻어먹고, 드래곤한테 잡아먹힐 위험도 벗어난 거지?”

- 그래, 다 네 덕이다! 넌 이제부터 내게 소중한 친구다!

“그럼 그 소중한 친구의 부탁도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네?”

- 어? 부, 부탁? 뭐, 못 들어줄 이유가 있는 건 아니긴 한데……. 근데 뭘 부탁하려고?

무언가 찝찝함을 느낀 비둘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랑 인형 공방에 가자.”

- 뭐어? 지금 이 시간에? 싫어, 난 안 가.

“내 부탁 들어주기로 했잖아.”

- 양심 없이 부탁을 이 시간에 들어달라고 할 줄은 몰랐지. 잘 들어. 착한 비둘기는 꿈나라로 갈 시간이라고.

“그래서 내 부탁 안 들어주려고?”

- 아, 왜 꼭 지금인데? 내일 드래곤님과 같이 가면 되잖아!

리시안셔스와 함께 갈 수 없으니까 지금 나온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비둘기는 내일 낮에 리시안셔스와 함께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괜히 여기서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비둘기에게 약점만 잡히는 셈이라, 스위트피는 오히려 세게 나가기로 했다.

“알았어……. 리시안에게 말해야겠다. 내가 수다도 들어주고, 빵도 나눠 주고, 리시안에게 죽을 뻔한 것도 구해 준 비둘기가 내 사소한 부탁 하나도 안 들어줬다고.”

- 뭐? 야!

“그래서 결국에 야심한 시각에 나 혼자 길을 헤맸다고.”

- 아직 길을 헤맨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곧 헤매게 되겠지.”

- 그게 무슨 헛소리야?

“미안해, 둘기야. 이번에는 리시안을 막아 주지 못할 수도 있어.”

- 그, 그게 무슨…….

“리시안이 이번에야말로 널 통구이로 만들지도…….”

자신이 통구이가 되는 상상을 한 비둘기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좋았어, 이제 다 넘어왔군.’

스위트피는 사악한 미소를 숨긴 채 비둘기에게서 등을 돌렸다.

- 자, 잠깐만, 인간아!

“…….”

- 기다려, 친구야!

비둘기가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그제야 스위트피도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리고는 이유를 짐짓 모르는 척하며 돌아섰다. 비둘기는 자포자기한 말투로 스위트피에게 물었다.

- 오래 걸리진 않을 거지?

“물론이지.”

왜냐하면 리시안셔스가 외출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숙소로 돌아가야 하거든.

뒷말을 숨긴 스위트피가 씩, 웃었다. 목숨줄을 스위트피에게 맡기게 된 비둘기는 한숨과 함께 날아와 얄미운 금발 친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 근데 난 한 번도 안 가 봐서 길을 몰라.

“걱정하지 마. 여기에 약도가 있으니까.”

스위트피가 비둘기에게 약도를 펼쳐서 보여 줬다.

- 누가 그려 준 거야?

“여관 주인이.”

비둘기는 여관 주인장이 쓸데없이 길 설명을 잘한다고 투덜거렸다. 비둘기는 이번에도 시끄럽긴 했으나, 적어도 수다스러운 성격 덕분에 밤거리가 더는 무섭진 않았으니, 스위트피는 기분 좋게 비둘기의 수다를 들어주기로 했다.

* * *

공방은 원형 모양으로 모여 있는 마을과는 다르게 약간의 외곽 쪽에 빠져 있었다. 그냥 어디에서나 볼 법한 작고 평범한 공방을 생각하던 스위트피는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소규모의 마을처럼 보일 정도로 여러 채의 건물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이 전부 인형 공방이었다.

손님이 방문할 일 없는 새벽인데도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입구 앞에는 팻말로 ‘인형의 마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페인트로 칠해진 건물이 모여서 이뤄진 공방은 정말 인형들이 사는 마을처럼 보였다.

- 으음……. 잠깐만, 인간아.

“왜 그래?”

- 뭔가 느낌이 불길하지 않아?

“뭐가?”

- 뭐랄까. 야생에서 오래 살아온 나의 촉이 말해 주고 있어. 이 공방에는 아주 무서운 것이 있을 거 같다고 말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이 비둘기는 야생이 아니라 인간들의 도심과 마을을 떠돌며 살았지만, 스위트피는 굳이 그 사실까지 지적하진 않았다.

비둘기가 말하는 불길함은 스위트피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인기척 하나도 들리지 않는 늦은 새벽이라 전체적으로 어두운 바깥 풍경이 으스스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공방이 특별히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록색, 분홍색, 노란색, 등등. 건물들이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어서 낮에 왔다면 좀 더 예쁜 공방의 풍경에 감탄했을 것이다.

“너 귀찮아서 지금 핑계 대는 거지?”

- 아,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잠깐 둘러보고 나오기만 할 거니까, 너무 겁먹지 마, 둘기야.”

- 둘기라고 안 부를 수는 없나?

“왜? 나름 귀엽지 않아?”

스위트피는 불만스럽게 구구, 거리는 비둘기의 턱을 쓰다듬으며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공방은 마을처럼 불이 모두 꺼져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남의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온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으나,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은 마을처럼 이뤄진 인형 공방으로 들어서자, 입구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건물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모두 안쪽에서만 볼 수 있게 나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빛이라고는 희미하게 비춰 오는 달빛뿐이었던지라, 바깥보다 훨씬 더 어두운 가게 내부를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창문 바로 앞에 인형이 전시되어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사진에서 본 것과는 많이 다르네…….”

창문 바로 앞에 진열되어 있는 인형들은 분명 예쁘고 잘 만들어져 있긴 했으나, 신문 기사 속 사진에서 본 것만큼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언니와 똑 닮은 인형을 본 것이 자신의 착각은 아니었을지,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려던 때였다.

휙-

모여있는 건물과 건물 사이로 사람이 지나갔다.

“방금 봤어? 사람이 저쪽으로 지나간 거 같은데…….”

나, 나도 본 거 같아…….

스위트피는 비둘기의 만류에도 아까 검은 그림자가 스쳐 가던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이미 가버린 것인지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울 때였다.

저벅, 저벅.

이번에는 스위트피의 바로 뒤쪽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제발 부탁이야. 이제라도 돌아가자. 어…? 느낌이 안 좋단 말이야.

느낌이 안 좋은 건 스위트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공방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의 인기척일 수도 있는데…….

뒷골이 송연해졌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기척과 섬뜩한 분위기, 비둘기의 설득으로 스위트피의 마음이 흔들리던 순간이었다.

끼이익-

낡은 문소리가 들렸다. 정원에는 나무는커녕 작은 풀도 나 있지 않아 바람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던 공방인지라, 낡은 문소리는 스위트피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스위트피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여 있는 1층짜리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건물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 야, 야! 들어가려고? 난 안 되겠다. 갈 거면 너 혼자 가!

“둘기, 너는 수도에서도 날 버리더니 여기서마저도…….”

- 무서운 걸 어떡해!

“의리 없는 널 내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가고 싶으면 가.”

- 항상 빵 부스러기를 나눠 준 건 고맙게 생각해. 언젠가 너에게 꼭 은혜를 갚을게. 근데 그게 오늘은 아닌 거 같아.

온전히 혼자 남는 건 무서웠지만 싫다는 비둘기를 억지로 곁에 둘 수는 없었다. 스위트피는 어쩔 수 없이 비둘기를 보내주려고 했다.

- 그 드래곤님은 여관에 있는 거지?

“리시안? 아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 가 있어.”

-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

“나한테 안 알려 줬어. 근데 갑자기 리시안은 왜?”

- 이럴 줄 알았어. 너, 드래곤님 몰래 나온 거지? 이렇게 밖에 나온 거 들키면 손해는 네가 보는 거네! 안 되겠다, 네가 이렇게 밤늦게 돌아다니는 거 그분을 찾아서 일러야겠다!

“뭐? 둘기야!”

무섭다고 해서 그냥 보내주려고 했는데, 리시안에게 일러바치겠다니.

스위트피는 애타게 비둘기를 잡아 보았으나, 비둘기는 서둘러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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