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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54화 (54/120)

<54화>

“둘기야. 넌 이 마을에서 지낸 지 얼마나 됐어?”

- 좋아하는 암컷을 따라온 지 사흘째지.

“그 암컷 비둘기는 역시 널 받아 주지 않았지?”

- 그 ‘역시’라는 말이 좀 기분 나쁘다?

“네가 예민한 거야.”

아예 여관 테이블에 앉아 멀리서 아이들 노는 것을 관찰하듯이 자신과 비둘기를 지켜보는 리시안셔스를 보며, 스위트피는 최대한 소리를 낮춰 비둘기에게 속닥거렸다.

“이 마을에서 인형을 만드는 공방을 알고 있어?”

- 인형을 만드는 공방? 아아, 알 거 같다. 요 근래에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곳이니 말이야.

지나치게 말이 많은 비둘기는 리시안셔스가 학을 떼게 만들 만큼 피곤한 존재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질문 하나만 던지면 알아서 자세한 정보를 알려 준다는 점이었다.

- 그런데 공방 주인이 좀 예민한가 봐. 최근에는 외지인이 아닌 사람들은 방문을 못 하게 막아 버렸대.

“외지인만 공방을 방문할 수 있다는 말이야?”

- 응. 독특한 녀석이지? 뭐, 어쨌든 넌 문제없이 공방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 공방의 인형들이 정말 그렇게 사람처럼 생겼어?”

- 난 관심이 없어서 공방 근처에는 안 가 봤어. 마을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 있어야 먹을 게 많거든.

“그럼 공방 주인이라는 사람 얼굴도 못 봤겠네?”

비둘기는 구구, 소리와 함께 인정했다.

- 대신에 하도 소문은 많이 들었지. 생긴 건 무척 아름답다고 하던데? 뭐, 그래 봤자 네 옆을 지켜 주는 저 드래곤님만큼 아름답진 않겠지만.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 고마우면 빵 부스러기나 더 주든가!

“오늘은 이게 끝이야. 대신 내일 더 줄게.”

- 진짜지? 오예! 약속한 거다? 어기면 안 돼!

“알겠어.”

내일도 빵 부스러기를 주겠다는 약속을 세 번이나 더 반복한 다음에야 스위트피는 비둘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기도 하고,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 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역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기에는 상당히 피곤한 친구였다.

“미안해요, 리시안. 많이 기다렸죠?”

“이럴 때 보면 네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왜요?”

“저렇게 시끄러운 녀석에게 꽤 친절하잖아.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녀석인데도.”

“으음……. 많이 시끄럽긴 하죠.”

“입을 열 줄은 알아도 다물 줄은 모르는 거 같더군. 그냥 아예 주둥이를 영원히 다물게 해 줄까.”

“나쁜 친구는 아니니까 봐줘요, 리시안.”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창밖에 있던 비둘기가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안쪽에 있는 리시안셔스와 눈이 마주치고는 아예 멀리 날아가 버렸다.

무심하고 냉정하긴 하지만 대체로 그보다 약한 인간과 동물에게 자비로운 리시안셔스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역시 저 비둘기는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이었다.

그날 밤, 스위트피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육체적인 피곤함은 어쩔 수가 없어 자꾸 졸음이 쏟아지려는 것을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오는 리시안셔스의 인기척이 들렸다.

‘뭐, 뭐지?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거 같은데 왜…….’

이제까지 리시안셔스와 한방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평온하게 자는 척을 해야 하는데, 자꾸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려고 할 때였다. 콕, 볼을 찌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자는 척 그만해, 스윗.”

아, 어차피 처음부터 들킨 상태였구나.

스위트피는 슬쩍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 알고 있었어요?”

“몇 년 동안 잠든 네 모습을 보면서 무료한 밤을 보냈는데, 모를 수가 있나. 굳이 왜 자는 척을 하는 거야?”

“자는 척이 아니라, 자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잠이 안 와서…….”

“왜?”

리시안셔스가 이번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스위트피의 모습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그게…….”

스위트피는 이유를 대야 했다. 사실 리시안셔스 몰래 나갈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잠들면 안 되니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거 같다. 리시안셔스는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계획이 망했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제게 약해지고는 하는 가엾은 모습을 보이기로 선택했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확실히 그 대답은 리시안셔스의 의문을 해소시키는 동시에 마음을 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듯했다.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보고 싶지 않은 척했으면서.”

“…….”

“미안해서 어쩌지. 곁에 있어 주고 싶은데…….”

리시안셔스가 무슨 일인지 말끝을 길게 늘였다.

“이만 나가 봐야 할 거 같아.”

“네? 갑자기 왜요?!”

리시안셔스의 외출은 스위트피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자신도 모르게 크게 묻고 말았다.

“이유가 있어.”

리시안셔스는 그 이유를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이유를 알려 주면 안 돼요?”

리시안셔스가 잠깐 자리를 비우기를 기다리긴 했지만, 책을 가지러 내려간다거나 하는 등의 짧은 순간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리시안셔스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최소 몇 시간 정도는 걸리는 외출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늘 자신의 곁을 떨어지지 않던 리시안셔스였던지라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거든.”

사실 며칠 전부터 다른 드래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혼자 있고 싶어 하던 이유를 빌려 썼다. 드래곤의 개체 수가 많이 줄어서 전처럼 자신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그래서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스위트피 몰래, 자연스럽게 죽일 기회가 없었다.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하지 못한 지 오늘로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차라리 얌전히 자고 있을 때가 좋았는데…….”

“뭐라고요?”

강물에 애를 혼자 두는 기분인 리시안셔스의 마음도 모르고, 스위트피는 자신을 비꼬는 거 같자 한껏 뾰족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물론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내가 없을 때 혼자 돌아다니지 말란 뜻이다.”

스위트피는 속으로 혼자 찔렸다. 리시안셔스 몰래 나갈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슬그머니 표정을 관찰하자 우려되는 마음에 당부를 하는 거 같았다. 마치 속 썩이는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간 리시안셔스가 하지 말라는 짓을 한 적은 없었는데, 왜 꼭 말 안 듣는 아이처럼 취급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았어요. 어차피 이제 졸려서 진짜로 자려고 했어요.”

스위트피가 애써 대화를 마무리하며 리시안셔스를 보내려고 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자고 있어.”

“아, 좀! 엄청 유난스럽게 구는 거 알고 있어요?”

한참 어린아이를 떼어 놓고 일하러 나가는 부모 같은 느낌이 싫어 성질을 내자 리시안셔스가 그제야 웃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나섰다.

‘리시안, 미안해요…….’

리시안셔스에게는 이제 잘 거라고,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오늘은 정말로 말 안 듣는 아이처럼 굴어 볼 생각이었다.

* * *

춥지 않게 겉옷을 목 끝까지 여민 스위트피는 저녁을 먹고 나서 리시안셔스 몰래 여관 주인에게 물어서 알아낸 공방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리시안셔스가 나간 지 20분째인 지금이 들키지 않고 몰래 나갈 기회였다.

어디 나가는지 정말 궁금하긴 했으나, 나중에 돌아왔을 때 물어보면 될 일이고.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도저히 공방에 리시안셔스와 함께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말로 공방에서 자신의 언니와 마주치게 될까 봐.

인형이라 할지라도, 리시안셔스가 보게 되는 것은 싫었다. 만약 리시안셔스가 에리카를 닮은 인형을 보고 동요를 보인다면, 그건 그 둘이 정말로 어떤 관계였다는 뜻일 테니까.

“서둘러야겠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지만 새벽 밤거리는 나와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무서웠다. 마을의 모든 집이 다 폐가처럼 보이는 기분에 스위트피는 몸을 잘게 떨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스위트피는 자신의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혼자 가기엔 너무 무서운데…….’

무작정 혼자 공방으로 간다고 문을 열어 주지도 않을 텐데, 그냥 돌아갈까. 아니야, 잠깐만. 그럼 리시안과 같이 공방에 가자고? 그건 또 싫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발을 동동 구를 때였다. 저 멀리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비둘기들 가운데, 익숙한 비둘기가 눈에 들어왔다.

“둘기야!”

자고 있던 비둘기는 스위트피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자 졸음기 가득한 기색으로 대충 구구, 소리를 냈다. 대충 아는 체만 해 준 것이다.

“너 잘 만났다.”

하지만 스위트피가 다가오자 주변의 동족들이 비둘기에게 눈치를 준 탓에, 어쩔 수 없이 비둘기는 스위트피가 다른 동족들의 숙면을 더 방해하기 전에 먼저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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