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
“별것도 아닌데 굳이 들어야겠어요?”
“가족이 보고 싶나?”
“…….”
“난 가족이 없어 모르겠지만, 보고 싶다고 해서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가족들은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났잖아요. 이제는 얼굴도 흐릿해요.”
“하지만 기억이 흐릿하다고 해서 그리운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어차피 마시지도 않을 물잔을 들고 가볍게 흔들며 찰랑이는 물결을 응시하던 리시안셔스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현재가 아닌, 머나먼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평생을 가도 그리운 존재는 있기 마련이야.”
이미 꿈속에서 리시안셔스가 다른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봤던 스위트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시안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어요?”
그 존재가 설마 우리 언니는 아니죠……?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가족을, 특히 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스위트피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렇게 서글프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죽은 줄 알았던 언니와 재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스위트피도 물론 언니가 보고 싶었다. 에리카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동생을 마냥 예뻐해 주던 의젓하고 상냥한 언니였다. 어릴 적의 스위트피는 자신의 언니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요정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적도 있을 정도로, 에리카는 스위트피에게 동경의 대상이며 가장 믿고 따르는 존재였다.
그래서 언니가 만약 살아 있다면 정말로 기쁘고, 보고 싶겠지만.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이 소름 끼치고 경멸스러웠다.
“됐어요, 안 들을래요.”
스위트피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리시안셔스가 입을 열기 전에 대화를 차단해 버렸다. 리시안셔스의 성격상 과거에 인연이 있던 사람을 굳이 자신에게 얘기해 줄 거 같진 않았지만, 자신도 리시안셔스에게 소중했던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듣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저 물 마시고 싶어요…….”
때마침 물 주전자에 있는 물이 떨어졌다. 평소라면 스위트피가 직접 가지러 갔겠지만, 지금은 슬쩍 리시안셔스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잘해 주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거 같았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가족에게 부리고 싶은 투정을 본인에게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이 다루듯이 머리를 쓰다듬더니 선선히 일어나 물을 가지러 갔다.
‘리시안은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내가 어떤 애인지 알지 못해.’
얼마나 못돼 먹고 이기적인지…….
‘그만하자.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고개를 거칠게 흔든 스위트피는 해결되지 않는 우울한 문제는 뒤로 밀어 넣었다. 대신 자신과 리시안셔스가 앉기 전부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던 신문을 펼쳤다.
눈길을 끄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면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신문을 양 갈래로 펼치자, 웬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 보였다. 그 흑백 사진이 스위트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한 스위트피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언니……?’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 있는 인물들 중, 에리카가 있었다. 스위트피는 황급하게 사진이 실린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사람과 똑같은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라고……?’
기사 내용은 단순했다. 사람과 똑 닮은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 있다는 것. 크기와 피부, 생김새까지 사람과 닮아서 인형에 영혼을 불어넣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돈다는 공방이라고 했다.
공방의 위치를 확인한 스위트피는 다시 사진 속 여자를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언니, 에리카가 맞았다. 아무리 기억이 흐릿해졌다고 해도, 마을에서 소문날 정도로 유독 예뻤던 언니의 얼굴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신문을 계속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멀리서 물을 채운 주전자를 들고 오는 리시안셔스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신문을 도로 접은 스위트피는 자신의 옆에 있는 빈 의자에 내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리시안셔스를 맞았다.
“자-.”
“고마워요.”
목마르지도 않은데 물을 마신 스위트피는 아직 음식이 남아 있지만 식사를 끝내려고 했다.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어?”
“……네?”
“아까 보니까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던데.”
“아, 아니요. 심심해서 잠깐 읽어 본 건데 별 내용 없었어요.”
“그래?”
리시안셔스는 무료하다 싶으면 책이나 신문을 읽고는 했으므로, 스위트피는 혹여라도 리시안셔스가 신문에 관심을 가질까 봐 긴장했다.
“갑자기 느려졌네.”
“뭐, 뭐가요?”
“음식을 먹는 속도가.”
“…….”
“보통 생각이 많아지면 그러던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함께 보낸 시간이 길다 보니 리시안셔스도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지금 스위트피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음식을 먹을 여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스위트피는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든다는 공방과 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인형이란 말이야?’
아무리 봐도 사람 같았는데…….
물론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라 화제가 된 거고, 흑백 사진으로 파악하는 건 한계가 있긴 할 것이다.
‘확인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
만약 사진 속 에리카의 얼굴이 사실은 단순한 인형일 뿐이라 하더라도, 우연히 닮은 인형을 만든 것일 리 없었다.
에리카는 그 작던 고향 마을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으니, 만약 누군가가 에리카의 얼굴을 본떠서 인형을 만든 것이라면 같은 마을 출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을의 생존자는 스위트피, 한 명뿐이었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생존자가 따로 더 있었을지도 몰라.’
어찌 되었든 확인하지도 않고 이대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건 찝찝했다.
“리시안. 저 가고 싶은 마을이 생겼어요.”
스위트피는 아까 기사에서 본 공방이 있는 마을을 얘기했다.
“별로 보잘것없는 마을일 거 같은데, 가고 싶어진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그냥, 관광지로 볼 게 많은 마을인 거 같아서요.”
차마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우리 언니를 닮은 인형을 봤는데, 그 마을에 있는 공방에서 만들었대요. 사람인지, 진짜 인형인지, 인형이라면 누가 만든 건지 확인해야겠어요.
“안 될까요?”
“안 될 이유야 없지. 네가 원한다는데.”
굳이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리시안셔스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우리 언니와 리시안이 어떤 특별한 관계였을까 봐.
몇 년 동안은 그래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조금은 세울 수 있었던 스위트피는, 오늘만큼은 이런 자신이 몹시 싫어졌다.
* * *
그다음 날,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원하는 마을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리시안셔스의 발등 위에 앉은 스위트피는 내내 불어오는 바람에 따가워서 그런 척, 눈을 감고 불안감을 잠재워야 했다.
빨리 도착했으면 싶다가도, 아주 늦게 도착하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드래곤의 속도는 빨랐고, 스위트피는 결국 생각보다 이르게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친구와 다시 재회했다.
- 인간! 여기서 널 다시 만나는구나!
“둘기야!”
수도에서 디에고를 처음 봤을 때, 인연을 맺었던 비둘기였다. 길거리 생활이 고되기는 했는지, 비둘기는 예전만큼 털에 윤기가 흐르지 않았다.
“하필 여기서 저 시끄러운 미물을 또 만날 줄이야.”
리시안셔스는 고개를 작게 흔들며 혀를 찼다.
- 아앗, 드래곤님도 아직 이 꼬마 인간과 함께셨군요.
“누구보고 꼬마래? 나도 이제 다 큰 성인이거든?”
- 보통 성체가 된 인간들은 좀 더 크지 않나?
“그러는 너도 비둘기치고 못생겼어.”
- 모, 못생……. 이! 오래된 길거리 생활로 야성미가 넘치는 비둘기 님께 그 무슨 무례한 언사야!
비둘기가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스위트피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리시안셔스로 인해 저지당했다.
만만하다 싶으면 바로 달려들고, 자신보다 강자라고 생각되면 바로 고개를 수그리는 비둘기는 리시안셔스의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 인간아, 그리지 말고 먹을 것을 좀만 나누어다오.
하지만 정이 뭔지. 스위트피는 여전히 시끄럽고 얄밉지만, 불쌍해 보이는 비둘기를 외면하지 못하고 음식을 나눠 줬다.
리시안셔스는 정말로 이 시끄러운 비둘기를 감당하기가 힘든지, 여관 안으로 방을 잡으러 먼저 들어갔다. 웬만하면 자신의 곁을 비우지 않는 리시안셔스가 저렇게까지 피한다는 건, 이 비둘기가 정말로 피곤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