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눈을 뜬 스위트피는 하루 만에 익숙해진 천장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리시안셔스는 언제나처럼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여관에 꽂혀 있던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위트피와 눈이 마주치고는 책을 덮었다.
“몸에 열이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정도였나 보군.”
간밤에 갑자기 쓰러진 리시안셔스의 곁을 지키느라 오들오들 떤 몸에 미약하게나마 감기 기운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금방 가까운 마을에 있는 숙소를 새로 잡아 이불 속에 파묻힌 덕에 감기에 걸려 앓는 신세는 피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귀족인 헤이든 모러에게 해를 끼친 건 사실이기 때문에 원래 지내던 마을의 숙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그나마 가까운 마을에 새로 숙소를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고백한 지,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어쩐지 스위트피를 대하는 자세가 평소보다 뻣뻣했다. 평소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는 거 같긴 한데, 스위트피가 손을 뻗으면 손끝이 굳는다거나, 눈을 마주치다가도 먼저 시선을 피하는 등, 평소와는 다르게 어색해하고 있었다.
‘내가 한 고백을 의식하고는 있는 거니까,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걸까.
리시안셔스의 저런 모습이 자신에게 긍정적인 신호일지 아닐지, 알 수 없어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헷갈렸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리시안셔스와 둘이서만 어색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스위트피는 당당하게 리시안셔스의 겉옷을 걸치고는 외출 준비에 나섰다.
“그 몸으로 어딜 나가려고.”
“누가 보면 제가 쓰러진 줄 알겠어요. 쓰러진 건 리시안이거든요?”
“자칫하면 감기 걸린다. 오늘은 얌전히 있어.”
“간식만 사 올 거예요.”
“하아…….”
리시안셔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스위트피와 함께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리시안셔스를 거부한 것은 스위트피였다.
“혼자 나갈 거예요.”
“왜 또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고집은 리시안이 부리는 거겠죠.”
“내가? 황당하군.”
“절 어색해하고 있잖아요.”
이제 리시안셔스는 말싸움으로 스위트피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편하게 있으라고 나가 주겠다는데, 왜 굳이 어색해하는 상대와 같이 있겠다는 거예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절 어색해하지 않는다고요?”
“물론. 내가 널 어색해할 이유가 없잖아.”
“그건 모르는 거죠. 예를 들면, 리시안이 제 고백을 엄청 의식하고 있다거나.”
“전혀. 네 고백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해.”
“아하, 그렇구나.”
지팡이를 든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다가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리시안셔스는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허리를 숙여 줬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오늘도 좋아해요.”
몸을 잘게 떨며 허리를 세운 리시안셔스가 순식간에 스위트피에게서 멀어졌다.
“의식하고 있는 거 맞으면서, 거짓말은.”
얄밉게 샐쭉, 웃은 스위트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스위트피가 속삭였던 귀를 문지른 리시안셔스는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저 영악한 꼬마를 어쩌면 좋지.
* * *
“으앗!”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서둘러서 여관을 나서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뒷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혼자 나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
자신의 고백으로 어색해하면서도,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제가 말했죠? 과보호라고요.”
“과보호를 해야 할 입장과 상황이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365일, 24시간을 내내 리시안과 붙어서 있을 수는 없다고요.”
“왜 그럴 수 없어, 이제껏 그렇게 지내 왔는데.”
“그래서 숨 막혔다고 말했잖아요!”
“……숨 막힌다고?”
스위트피의 말이 다소 충격적이긴 했는지, 리시안셔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는 넌, 숨 막히게 하는 대상을 어떻게 좋아…….”
“…….”
“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 사람이 여기에 있는 저인가요?”
“아니다. 말실수한 것이니, 잊어버려.”
리시안셔스가 그답지 않게 고개를 돌려 스위트피의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중증이긴 한가 봐.’
저런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라, 여기서 더 놀려 볼까 싶었지만 이내 관두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하는 리시안셔스인데, 이기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겠다고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를 지나치게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요.”
“대신 네가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걸로 합의를 보도록 하지.”
“같이 있을 건데, 혼자 있는 기분을 어떻게 느끼게 해 준다는 거예요?”
잠시 후, 스위트피는 간식이 든 종이봉투를 든 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리시안셔스가 말한 방법은 마치 일행이 아닌 것처럼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스위트피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부, 부담스러워……!’
멀리 떨어져서 사람들 틈 사이로 자신을 빤히 보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은, 꼭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오히려 더 답답했다.
‘안 되겠어. 그냥 옆에 있으라고 해야지.’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려고 했다. 리시안셔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라……?’
어딘가 익숙했다. 자신보다 채도가 낮은 금발의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꿈속에서 언니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 니……?”
어느새 스위트피의 다리는 여자를 쫓고 있었다.
“언니, 언니! 기다려 봐! 언니……!”
불편한 다리로 지팡이마저 버리다시피 내던진 채 계속해서 사람들 틈에 섞여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는 여자의 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간신히 따라잡아 여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언니!”
“누, 누구세요……?”
하지만 그렇게 겨우 붙잡은 여자는 자신의 언니인 에리카가 아니었다.
“저 아세요?”
“죄, 죄송합니다……. 사람을 헷갈린 거 같아요…….”
반 박자 늦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스위트피를 본 여자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가득하긴 했으나, 이내 이해해 주고는 돌아서서 가던 길로 향했다.
자신의 언니가 아니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스위트피는 어쩐지 언니와 닮은 금발을 가진 여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스윗.”
그런 스위트피의 뒤로 언제부터 다가와 있었던 것인지, 리시안셔스가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야.”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언니랑 닮은 사람을 봐서요.”
물론 채도가 낮고 생머리인 금발만 닮았을 뿐, 외모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스윗.”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리시안셔스의 눈에 서린 연민을 읽은 스위트피가 일부러 밝은 표정으로 씩씩하게 굴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걸요? 이제 와서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찾을 나이는 아니죠. 그냥 정말로, 머리카락이 닮아서 잠깐 착각한 거뿐이에요.”
하필이면 에리카의 꿈을 잠깐 꾸기도 했었기 때문에, 더욱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식은 다 샀으니까 이만 돌아가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작고 가엾은 것에 자비로운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살고 싶어서 달라붙는 자신을 매정하게 내치지 못한 거겠지만.
리시안셔스는 아무런 말 없이 스위트피가 원하는 대로 따라 줬다. 여관으로 돌아와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대충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따라 많이 먹는구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식사하는 스위트피를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리시안셔스가 먼저 입을 뗐다.
“밖에 돌아다녔잖아요.”
“넌, 늘, 항상,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잖아. 오늘은 오히려 덜 걸어 다닌 편이지.”
“그럼 여기 음식이 유독 맛있나 보죠.”
“내가 싫다 해도 감정을 표현하겠다더니…….”
리시안셔스의 검지가 스위트피의 이마를 가볍게 톡, 쳤다.
“다른 감정에는 솔직하지 못하군.”
“무, 무슨 감정이요……?”
“넌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을 먹잖아.”
예상외로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말에 스위트피는 놀라서 입으로 가져가려던 포크를 그대로 멈춰 세웠다.
“네가 날 잘 파악하고 있는 것만큼, 나도 너에 대해서라면 꽤 많이 알고 있는 편이지.”
“……좀 의외이긴 하네요.”
“아무렴 너의 성장 과정을 다 지켜봤는데.”
“그렇게 딸 다 키워 놓은 아버지 같은 소리는 그만하고요.”
“그래, 불필요한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말해 봐.”
“뭐가요?”
“왜 속상한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어떤 행동을 보이건, 물 흐르듯이 지켜봐 주는 쪽에 속했다. 그것이 어떤 짓궂은 장난에 의한 돌발 행동이든, 버릇없이 기어오르는 행동이든 말이다. 반면에 스위트피의 감정이나 행동의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는 그 이유를 들을 때까지 집요하게 캐묻는 구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