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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51화 (51/120)

<51화>

“그런데 왜 갑자기 쓰러진 거예요?”

“참 일찍도 물어보는군.”

스위트피가 먼저 얘기 주제를 돌렸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먼저 제 꼬마 반려가 한 고백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없어질 감정이다. 어린 날의 섣부르게 한 고백을 부끄러워하며 없던 일로 치부하려고 들 날이 분명 올 것이었다. 굳이 지금 이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아까의 얘기를 꺼내 창피를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좀 놀라긴 했는데 추워서 정말 죽을 거 같았거든요. 어디 심하게 아픈 건 아니죠? 눈 감고 있을 때 표정이 불편해 보이진 않았는데…….”

“뒤늦게라도 걱정해 줘서 아주 고맙구나. 하지만 네가 걱정할 건 없어. 드래곤도…… 기력이 방전되면 가끔 숙면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리시안셔스는 거짓말을 보태 스위트피를 안심시켰다.

“신기하다…….”

“내가 쓰러진 것이?”

“사실 저한테는 이상한 믿음이 있거든요.”

“어떤 믿음?”

“무슨 일이 있어도 리시안은 무사할 거라는 믿음이요.”

신이 되기 위한 드래곤들의 전쟁이 시작된 이상 무사하다는 것은 드래곤과 그 반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다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다치지 않고, 살아서 계속 제 옆에 있어 줄 거 같아요. 그래서 리시안이 쓰러졌을 때도 생각보다 걱정이 크진 않았어요.”

“그러다가 내가 죽게 되면 어쩌려고?”

대답을 모호하게 흐린 스위트피가 정말 추운 건지, 리시안셔스의 겉옷에 아예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근데, 전 리시안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죽더라도 네가 살 길은 알아봐 놓고 가마.”

“만약에 리시안이 죽는다면…….”

정말로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미래를 생각해 보던 스위트피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혼자 남겨져서 살아가야 하는 게 무섭겠죠. 소중한 이를 또 잃은 거니까.”

“…….”

“그런데 리시안은 항상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줘서, 뭐라고 해야 할까……. 리시안이 잘못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요.”

항상 구해 줬고, 그도 무사히 돌아와 제 곁을 지켜 줬던 리시안셔스였다. 자의든 타의로든 자신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 같다는, 스위트피 식의 믿음의 표현이었다.

제 나름대로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숨김없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스위트피의 모습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아…….”

스위트피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나서야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스위트피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색하게 손을 내린 리시안셔스가 씩, 웃으며 불편해진 분위기를 풀었다.

“항상 살아서 네 곁에 있을게. 스윗, 네가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진 얼굴의 노인이 될 때까지.”

“좋아요. 약속한 거예요?”

“난 한 번 한 약속은 지켜.”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스위트피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제 옆에 있을 거라면, 그 긴 세월들 중에 언젠가는 제 고백을 받아 주는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얘기를 마무리하려던 리시안셔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반면에 스위트피는 아주 해맑게 웃는 낯이었다.

스위트피가 부끄럽고 창피해서 자신에게 했던 고백에 관해서는 묻어 두려는 줄 알았던 리시안셔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고백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스위트피의 얼굴에는 창피함이 한 조각도 깃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네가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줄 알았는데…….”

“왜요? 제가 거절당해서요?”

“보통은 고백을 거절당한 걸 창피해하기 마련이니까.”

“누군가를 좋아해서 솔직하게 고백한 게 왜 창피해할 일이에요? 거절당한 건 속상하고 슬픈 일이지, 창피할 일은 아니에요.”

예전에는 필요에 의해 너무 쉽게 타인의 물건을 훔치려고 해서 이 꼬마의 도덕성을 걱정한 적도 있었는데…….

스위트피는 의외의 구석에서 건강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스윗, 분명하게 말하겠지만 난 네 마음을 못 받아 줘.”

“또 거절이에요?”

“쓰러지기 직전에도 얘기했지만, 지금의 넌 아직 어려서 감정을 혼동하고…….”

“제 핑계 대지 말고 리시안의 감정을 얘기해요.”

리시안셔스는 자라나는 스위트피를 지켜보면서 가끔 고집이 너무 세져서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고집이 하필이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 순간에 발동될 줄이야.

“제 감정은 리시안보다 제가 더 잘 알아요. 그러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

“너무 어릴 때부터 봐서 제가 여자로 안 보여요?”

이제 이 얘기를 회피하고 싶어진 건 리시안셔스였다. 하지만 스위트피가 원하지 않을 때 모르는 척 넘어가 줬던 것처럼, 스위트피가 얘기하길 원한다면 자신도 피하지 말고 대화에 응하는 것이 이 아이를 위한 배려였다.

“그래. 내 눈에 넌 여전히 작은 꼬마일 뿐이니까.”

아이를 위한 거절이었다. 만약 이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스위트피가 살아남게 된다면, 이 아이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 같은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아닌, 좀 더 괜찮은 또래의 인간 수컷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스위트피는 수많은 방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본인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보지 못해 눈앞에 있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는 거뿐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단호한 어투로 거절한 것이건만, 스위트피는 의외로 전혀 상처받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럼 앞으로 좀 더 성숙한 매력을 보여 주도록 할게요!”

이미 주먹까지 불끈 쥐고서 하는 결심은 성숙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거 말고는 더 없어요?”

“뭘 더 말하라는 거지?”

“가령,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든가?”

“…….”

“절 받아 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말이에요.”

무언가를 알고 한 질문은 아니겠지만, 그 말은 리시안셔스의 아주 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잊지 못할 여자라……. 리시안셔스의 시선이 미약한 산풍에 살랑거리는 스위트피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스윗.”

“아, 됐어요! 안 들을래요!”

조금 느릿하게 할 말을 꺼내려던 리시안셔스의 대답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질문을 꺼낸 당사자였다.

“리시안이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어도 상관없어요.”

“…….”

“그렇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니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스위트피가 활짝 웃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상대가 싫다고 하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게 예의라고 하지만, 전 그런 거 몰라요. 어차피 제가 계속 고백해도 리시안은 절 떠나지 않고 지켜 줄 거잖아요. 그렇죠?”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이라는 말은 잇지 못했으나, 스위트피는 이미 무슨 대답을 할지 다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찬 눈빛으로 리시안셔스의 말을 잘랐다.

“저는 리시안이 저를 약하고 지켜 줘야 할 존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할 거예요.”

“……이용한다고?”

“어차피 절 버리지도 못할 테니까, 리시안이 부담스러워해도, 제가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지면 마음껏 표현할 거예요.”

대놓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뻔뻔한 발언이 아닐 수 없으나, 리시안셔스는 도무지 스위트피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좋아해요!”

“…….”

“그리고 내일도 좋아할 거예요! 내일모레도, 또 그다음 날도!”

스위트피의 고백은 이기적이면서도 사랑스럽고 빛이 났다. 그리고 당당한 척하지만 고백을 하는 목소리 끝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호하게 밀어내는 것이 맞을 텐데.

“나는 인간이 아니야.”

“상관없어요.”

“우리가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어, 네가 감정을 혼동하는 걸 수도 있어.”

“아까도 말했지만, 거절하더라도 제 핑계 삼아서 거절하진 말아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다른 감정과 혼동하는 바보는 없어요.”

긴 세월 동안 이렇게 사랑스럽고 빛이 나는 존재는 이로써 두 번째였다.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한없이 나약해졌었던 과거를 가진 리시안셔스는 이번에도 스위트피의 당당한 고백에 마음이 나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영악한 꼬마가 그 점을 파고들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 와.”

리시안셔스가 손을 내밀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챈 스위트피가 곧장 리시안셔스의 발등을 밟아 올라섰다.

“급한 대로 가까운 다른 마을로 이동할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알겠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리시안.”

스위트피의 애정 표현을 못 들은 체한 리시안셔스는 그대로 소녀를 안고 날아올랐다. 제 반려가 편히 쉴 숙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리시안셔스의 날갯짓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얼굴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스위트피가 가장 좋아하던 자매의 표정이었다.

“스윗.”

제 자매가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스위트피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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